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1782 ~ 1840) 출생
니콜로 파가니니 (이: Niccolò Paganini,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렸다.

–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
.출생: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아
.사망: 1840년 5월 27일, 프랑스 니스
국적: 제노바 공화국(1782-1797), 리구레 공화국(1797-1805), 프랑스 제1제국(1805-1814), 제노바 공화국(1814-1815), 제노바 공국(1815-1840)
.직업: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부모: 안토니오 파가니니, 테레사 파가니니
.형제자매: 줄리아 니콜레타 파가니니, 안젤라 파가니니, 비아지오 파가니니 등
.자녀: 아킬레 파가니니
.악기: 바이올린, 기타
.대표작: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 등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던 바이올린, 비올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그는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연주가다.
“공연 중 발치에는 사슬이 감겨 있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 하인리히 하이네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 빈 공연 직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 연주에 관해 논평한 신문 기사 中

○ 생애 및 활동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 (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 (入神)의 기 (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 · 모자 · 장갑 · 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 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 평가
작곡가로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 (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등 여러 유명한 작곡가들이 이 사람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가운데, 1832년 직접 파가니니의 연주를 라이브 공연으로 들어본 리스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당시에 대하여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십여년이 지나도, 난 그 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나는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누가 저 사람을 바이올린 연주로 앞선단 말이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서 파가니니가 되겠다!라고 다짐해 피아노로 미치도록 매달려 왔다.” 라고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거장들에게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를 쓰러지게 만들 만한, 기교로만 따지면 바이올린 분야에서 피에트로 로카텔리 이후 참 오랜만에 나타난 희대의 천재였다.
그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어서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그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니 파가니니가 말년에 루머에 시달린 데에 기교도 기교지만 이 점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죽하면 그가 연주하면 밤에만 나타나야 할 유령들도 그가 연주만 하면 나와 감탄하고 춤추거나 울었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악마도 감격해 울거나 너무나도 푹 빠져 춤추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바이올린을 G현만으로 연주하거나 활 대신 나뭇가지를 써서 연주하고 개, 고양이, 당나귀 등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 기교뿐이고 진지한 마음이 없다는 식의 혹평을 받기도 했다.
도박에 손을 댔다가 빚을 져서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을 처분했는데 한 사람이 파가니니 이외의 사람이 연주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과르네리를 넘겼고, 파가니니의 ‘내 바이올린, 내 영혼을 이제부터 영원히 제노바에 기증하노라’ 라는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하지만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Mario Trabucco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정기적으로 연주해 주고 있으며 악기 제작자 등, 여러 관리 위원들이 관리 해주고 있다. 또 5년 주기로 10월 12일에 Premio Paganini라는 콩쿠르가 열리는데 이 콩쿠르 우승자에게 여러 부상, 또 녹음 기회와 함께 과르네리 캐논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개의 악보도 남긴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기도 하다. 기타를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는데, 바이올린처럼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기타곡은 크게 자신을 후원해 줬던 귀부인들을 위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곡과 프로들을 위한 난곡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음악도 적극적으로 기타용으로 편곡되고 있다.

말년에는 실력이 하도 사기적인 나머지 악마와 계약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런 그도 아들인 아킬레가 있었다. 젊은 시절 소프라노 가수인 안토니아 비앙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노년에 이 아들을 되찾아 극진히 아껴주었고 많은 재산도 남겨줬다.
파가니니가 외아들인 아킬레를 살아 생전 연주여행에 아킬레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숙소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이래서 아들인 아킬레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고 게다가 파가니니는 아킬레가 귀족이 되게끔 자신의 팬인 귀족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 심지어 아들을 귀족이 되게끔 한다면 귀족에게 가서 공연도 하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아킬레는 커서 귀족이 되어 남작 작위와 같이 영지도 하사받았다. 아킬레는 존경하던 아버지를 생전 원하던 대로 죽으면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분부를 평생동안 지키려 했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영면하다” – 묘비명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아킬레는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교회 무덤에 묻으려 했으나 악마와 계약하여 안된다고 거부당했으며 결국 고향에 묻힐 수 있게 되기까지 평생을 노력한 끝에 1886년, 무려 46년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아킬레는 이렇게 아버지를 드디어 원하던 대로 묻히게 해주고 10년도 안가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에 많은 시간을 아버지가 원하는 무덤에 묻게하고자 노력한 셈이다.
그런데 파가니니가 직접 그런 ‘악마’ 소문을 퍼트렸다는 말도 있는데 시시콜콜 캐묻는 주교에게 짜증이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 바이올린엔 악마가 있고 내 활에도 악마가 있고 나도 악마니 알라!’는 투로 말을 했다는 말도 있고, 또 다른 설로는 당시에 기교가 만만찮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없자 파우스트를 보고 악마를 컨셉으로 잡았다는 말이 있다. 또는 이미 주제페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기교를 얻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걸 보면 그런 스토리를 자신의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했을 수도 있다.
그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는데 심지어 그가 악령으로 되살아나 사람을 죽인다는 영화도 있다. 악령 파가니니 (Paganini Horror/1989)라는 영화로 추억의 영화 라스트 콘서트를 감독한 루이지 코지가 감독하고 할로윈 시리즈에서 단골로 나온 배우 도널드 플레젠스가 나온 이탈리아 영화이다.
클라우스 킨스키가 감독 겸 주연을 맡은 1989년 작 파가니니도 있다. 킨스키의 유작이기도 하다.
2013년에 그를 다룬 독일, 이탈리아 합작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Paganini: The Devil’s Violinist)’가 개봉했다. 감독은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호러영화 캔디맨으로 알려진 버너드 로즈. 주연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데이빗 가렛이 담당했다. 연기력은 꽤 아쉽지만 프로배우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고 바이올린 연주만은 파가니니의 실력을 제대로 재연했다.특히 한줄로 연주했던 일화를 재연해냈다. 한줄로 연주한 곡은 ‘모세환상곡’으로 G선만 쓰도록 되어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을 비밀로 붙였으며,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남기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제자도 ‘시보리’ 한 명뿐이라서 그의 기법 중 상당수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작곡의 경우, 연주 분야만큼의 수준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은 음악적으로 연주 실력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강렬한 비르투오소적인 인상으로 인해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작품성과 별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아울러 타 음악가들에 의해 바이올린 외의 악기로 편곡되거나, 이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적지 않다.
리스트가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많은 곡을 남겨서 전공자들을 애먹였던 것처럼 그런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성향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파가니니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기교를 담아낸 음악들을 남겨서 전공자들에게 악명이 자자하다. 바이올린 혼자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소화하는 구성의 음악도 선보였으며 음의 이동도 크고, 손에 많은 부담을 주는 피치카토, 두 가지 음을 연주해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3도부터 10도까지 다양한 화음이 곡에 등장한다. 심지어 네 가지 음을 동시에 연주해야하는 쿼드로플 스톱까지 등장하는데 이런 기교들을 그저 단순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곡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잘’ 소화해야한다는 것부터가 연주자의 실력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부터 현대의 전공자들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
“공연 중 그의 발치에는 사슬이 감겨 있었고 ‘악마’가 나타나 그의 연주를 도왔다.” – 하인리히 하이네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 빈 공연 직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 연주에 관해 논평한 신문 기사 中

○ 작품 목록
대표적인 파가니니 곡 연주로 율리아 피셔 (Julia Fischer) Paganini 24 Caprices가 있다.
파가니니의 작품 번호는 MS를 사용한다. Maria R. Moretti와 Anna Sorrento가 연구했다고 한다. MS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것도 있다.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1~6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
Op. 1, MS 25, 24개의 카프리스(caprice) 1~24
.카프리스 24번 A단조
MS 19, 레스트레게(Le Streghe) – 발레음악을 모티브로 한 변주곡
MS 23, 모세환상곡 – 정확히는 로시니 오페라 모세의 아리아에 의한 G선상의 변주곡이다. 줄여서 모세환상곡으로 불리며, G현만으로 연주했다는 곡이 바로 이 곡이다.
MS 59, 베니스의 카니발 – 변주곡의 형태이다.
MS 84, 기타를 위한 37개의 소나타
MS 109,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칸타빌레
○ 일화
8살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써놓고 자기도 어려워서 연주를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파가니니의 연주 솜씨에 반해서 결혼을 하고 싶은 한 여가수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친구들이 알려주자 파가나니가 ‘아니 결혼? 바이올린 연주를 공짜로 들으려고 하다니. 이런 얌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어느 걸인이 바이올린 연주를 할 때 파가니니가 걸인을 대신해서 연주를 했더니 그 소리에 매혹되어 사람들이 걸인에게 많은 돈을 주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 = 위키백과,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