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8월 15일, 프로이센의 6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 1795 ~ 1861) 출생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 1795년 8월 15일 ~ 1861년 1월 2일)는 제6대 프로이센의 국왕 (재위: 1840년 ~ 1861년)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
.출생: 1795년 8월 15일 베를린
.사망: 1861년 1월 2일
.부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형제: 빌헬름 1세,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알브레히트
*프로이센의 군주
.재위: 1840년 ~ 1861년
.전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후임: 빌헬름 1세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생애 및 활동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장남이자 후계자로 1795년 8월 1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이에른의 공주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를 왕비로 맞이했고, 1840년 프로이센 왕국의 군주에 올랐으며, 1858년 뇌졸중 발병 후유증을 사유로 아우 빌헬름의 대리청정 체제를 조치하였으며,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왕비 사이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사후 왕위는 대리청정을 지냈던 아우 빌헬름이 물려받았다.
그는 루터가 95개 논제를 붙였다는 유명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을 새롭게 교체하였다.
독일의 유명한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앞이름인 “프리드리히”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를 매우 혐오했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독일 통일과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들을 ‘폭도’와 폭도에게 미혹된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국민 의회의 궁극적 목표는 군주제와의 싸움이며, 그들에게 황제를 임명할 권한이 없다고 말하며 추대를 거부했다.
결국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13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시위는 끝났다.
빌헬름 4세는 3월 19일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서 1848년 독일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1848 혁명 이후에는 반동정책을 펴긴 했지만 혁명의 유산중에서도 프로이센의 국익에 도움이 될만한 소독일주의를 계속 받아들였고 제한된 틀이나마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융커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의회 대사로 임명한 것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다. 혁명 이후 반혁명 구도로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건 완전히 막지 못했으나, 혁명으로 시민 계층의 힘이 자란 걸 인정해 주었고 부르주아들의 요구에는 터무니 없이 못 미치지만 기존 신분제 제한의회에서 납세액에 따른 부르주아까지 정계로 편입하고 과세권을 허용한 것은 것은 시대를 잘 읽은 조치였다.
여담으로 1847년에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이 덕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사진이 남아있는 최초의 독일 국가원수가 되었다.

○ 평가
1840년 6월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사망한 뒤 4세로서 즉위한다. 그는 황태자 시절에 K. L. v. 할러와 A. 뮐러를 신봉하는 낭만주의적 성향의 소유자였다. 부왕의 시대부터 정치에 관여하여 그 주위에는 재상 K. A. v. 하르덴베르크의 정치개혁에 반발하는 보수파가 모여 있었다. ‘기독교국가’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정치적 수완의 부족으로 ‘왕좌의 낭만주의자’라는 평을 들었다.
1830년대를 통한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사회상황이 크게 변모하고 사회적 모순이 표면화되는 가운데 그는 발생하고 있는 모순을 회피할 시책을 내세우고자 했다. 헌법제정의 시사, 검열의 완화 등 진취적인 방향도 제시했지만 이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1848년 혁명을 앞두고 반체제적인 사조와 운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헤겔 좌파가 등장한다.
1848년 3월 혁명에서 그는 혁명에 일시적으로 양보했으나 그 퇴조와 더불어 베를린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동시에 12월에는 흠정헌법을 발포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대관을 거부했다 (1849년 4월). 또한 프로이센을 맹주로 한 소독일주의적 국가통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좌절했다 (1850년 11월, 올뮈츠 협약). 1857년에 정신병에 걸리고, 1858년에는 동생 빌헬름 (훗날 1세)이 섭정을 맡았다. – 다키구치 기요에이 (瀧口淸榮)
○ 가족
1832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와 결혼했다. 부부간의 사이는 좋았지만 자식이 없었고, 자연스레 둘째 동생 빌헬름이 왕세제가 되었다.
1857년부터는 정신병 발작으로 왕세제 빌헬름이 섭정을 맡았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지만 간혹 멀쩡할 때가 있었는데, 후대왕들에게 절대로 헌법에 대한 맹세를 거절할 것을 주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지론에 의하면 헌법이란 왕과 신민들 사이를 가로막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고, 신이 수여한 통치권을 함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 통치의 핵심인 군대와 관료는 어디까지나 왕에게 충성하는 조직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