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년 8월 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가 종신통령을 선포
1802년 8월 2일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는 종신통령 (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가문: 보나파르트 가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 / 레티차 보나파르트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자녀: 나폴레옹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지위: 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6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본인 (제1공화국 제1통령)
.후임: 루이 18세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 (프: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에게 있었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제1통령이 된후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원정대를 이끌고 해발 2.469m에 달하는 알프스의 산베르나르 고개 (Great St Bernard pass)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부관들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극구 만류했다. 과거 한니발이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가 이 고개를 넘어간 역사가 없었으며 너무 험준한 협곡이라 군대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하며 밀어 부쳤다. 1800년 5월에 프랑스 원정대는 험준한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붙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수용하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양도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왕당파와 자코뱅 파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탄압하였다.

그리고 1802년 8월 2일에 그는 종신통령 (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한편 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개혁 및 정교협약 등을 추진했다.
– 개혁 작업에 박차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했다. 또,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또 국내 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했다.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다.

– 정교 협약 (1801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와 정치 및 정교협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가톨릭교회는 당시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15%를 차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전체 GDP의 10%를 십일조로 받아가고 있었다.
국민공회는 1790년의 성직자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을 제정하고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의 자산을 몰수한데 이어 성직자들에게도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했다.
국민공회의 ‘반가톨릭 정책’으로 예배는 금지되어 있었다.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되어 매각되었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교황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서진 교회를 약 400만 파운드를 들여 재건했고 교황 비오 7세 (Pius VII)와 정교협약을 맺어, 예배의 자유는 다시 확립되었고,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보호했다.

– 아이티 침공 (1801년 11월)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여명의 원정대를 아이티 (산도밍고)에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다.
카리브 해의 아이티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과 커피를 생산하는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프랑스 혁명 (1789년)의 영향으로 흑인 노예들이 1791년 투쟁을 시작하여 1794년 흑인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낸 후 1801년에 독립을 선언했었다.
프랑스 원정대의 초기활동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1803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군했다.
아이티 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강한 저항과 황열병 그리고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이었다. 황열병은 모기에 의해 전파되며 남미 지역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인데 이 병으로 인해 프랑스 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초기 파병 군인 33,000명 가운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3,000명뿐이었다.
또한 영국군이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박에 대해 강력한 해상봉쇄에 나서자 기세가 위축되면서 요청받은 추가 파병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티 (산도밍고)는 1804년 1월1일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되었다. 이로써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만들었으며 훗날 중남미 지역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스페인로 부터 독립하는데 강한 영향을 주었다.

– 루이지애나 매각 (1803년 4월)
나폴레옹의 본래 계획은 아이티를 점령한후 이곳을 바탕으로 하여 북미 대륙 루이지애나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이티 점령에 실패하면서 차질이 발생하였고 점차 서반구 사업에 관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중 나폴레옹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미국에 매각하였다. 매각대금은 전쟁비용에 보태었다.
그 당시 미국은 통상물량의 1/3을 미시시피 강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는데 뉴얼리언스 기항에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프랑스에 사절단을 보냈다. 루이지애나는 본래 스페인 소유였으나 1800년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소유권을 이양하였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인수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감독중인 스페인 관리가 미국선박의 뉴올리언스 기항을 금한 것이었다.
1803년 4월, 제임스 먼로가 이끄는 미국 사절단을 접견한 나폴레옹은 골치 아프게 된 루이지애나의 매입을 제안하였다. 양측의 협상 끝에 1,500만 달러라는 헐값이 책정되었고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로인해 미국에는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시대가 시작되었다.
– 황제 즉위 (1804년 12월)
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