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6월 20일, 독일의 신학자 이자크 아우구스트 도르너 (I. A. Dorner, 1804 ~ 1884) 출생
이사크 아우구스트 도르너 (Isaak August Dorner, 1809년 6월 20일 ~ 1884년 7월 8일)는 독일의 루터교 교회 지도자였다. 그는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로 베를린대학교 신학교수를 역임하며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 생애 및 활동
그는 루터교 목사로 재직하던 뷔르템베르크의 노이하우젠 옵 에크 (Neuhausen ob Eck)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울브론 (Maulbronn)과 튀빙겐대학교 (University of Tübingen)에서 교육을 받았다.
2년 동안 아버지를 도운 후, 그는 공부를 마치고 다양한 유형의 개신교를 익히기 위해 영국과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그는 1834년에 튀빙겐으로 돌아왔고, 1837년에는 신학 특별 교수로 임명되었다.
대학 학생 시절 그의 교사 중 한 명은 잘 알려진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es의 저자이자 F. C. Baur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중 한 명인 Christian Friedrich Schmid였다.
Schmid의 제안과 그의 격려에 따라 Dorner는 그리스도의 인격 교리 발전의 역사, Entwicklungsgeschichte der Lehre von der Person Christi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동료인 데이비드 스트라우스 (David Strauss)가 『예수 생애』를 출판한 해인 1835년에 그 첫 번째 부분을 출판했다.
1839년에 완성되었고, 그 후 두 번째 판 (1845~1856)을 위해 상당히 확대되었다.
이는 슈트라우스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으로, “심오한 학식, 판단의 객관성, 역사의 감동사상에 대한 훌륭한 이해” (Otto Pfleiderer)를 보여주었다.

저자는 즉시 신학자이자 역사가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839년에는 오디나리우스 (Ordinarius) 교수로 킬에 초청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Das Princip unserer Kirche nach dem innern Verhältniss seiner zwei Seiten betrachtet (1841)을 제작했다.
1843년에 그는 신학교수로 쾨니히스베르크 (Königsberg)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1847년에 본으로, 1853년에 괴팅겐으로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1862년에 그는 베를린에 교수로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프로이센 복음주의 국가교회의 최고 구성 평의회 회원이었다.
몇 년 후 (1867) 그는 귀중한 Geschichte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History of Protestant Theology, 2권, 1871)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Pfleiderer가 말했듯이 “그 자신의 신념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발전시키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교회의 사상과 신앙의 역사에 대한 애정 어린 연구를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신학적 입장은 그가 죽기 직전에 출판된 Christliche Glaubenslehre (1879 ~ 1881)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 저서에서 독자는 고대와 현대 교사들의 조사와 토론 및 대량의 역사적 자료를 통해 저자 자신의 견해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대부분 고전과 사상 사이의 중간적인 견해이다.
동반 저서인 System der christlichen Sittenlehre는 그의 아들 August Dorner가 1886년에 출판했다.

그는 또한 Herzog-Hauck의 Realencyklopädie에 기사를 기고했으며 Jahrbücher fur deutsche Theologie의 창립자이자 수년 동안 편집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884년 7월 8일 비스바덴에서 별세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중재” 신학자 중 한 명인 그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Schleiermacher), 아우구스트 네안데르 (August Neander), 칼 니츠쉬 (Karl Nitzsch), 율리우스 뮐러 (Julius Müller), 리차드 로테 (Richard Rothe)와 함께 평가되었다.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도르너 (August Dorner) 역시 저명한 신학자가 되었다.
- 핵심 요약
이자크 아우구스트 도르너 (Isaak August Dorner, 1809 ~ 1884)는 19세기 독일 루터교의 대표적인 중도적 (mediating) 조직신학자이자 신학 역사가다.
합리주의와 보수 정통주의 사이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며, 현대 신학(특히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애와 활동: 뷔르템베르크 출신으로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튀빙겐, 킬, 쾨니히스베르크, 본, 괴팅겐을 거쳐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약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기독론의 대가: 그의 대표작인 『그리스도 위격의 발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명저다.
중도 신학: 슈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와 헤겔 (Hegel) 철학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정통 복음주의적이고 역사적인 교리 체계 안으로 통합하려 시도한 ‘중재 신학’의 선구자였다.

○ 중재신학
슐라이에르마허 전통에 서 있는 중재신학자 이삭 아우구스트 도르너 (I. A. Dorner, 1804 ~ 1884)는 튀빙겐 등지에서 역사학, 관념철학, 신학의 수학을 거쳤다.
당시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부에서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을 적용하여 신학성서를 해석하면서 학파를 형성하는 시기다. G. C. 스토르 (G. C. Storr,1746 – 1805)는 성경의 권위와 계신의 초자연적인 특징을 강조하였지만 페르디난드 크리스챤 바우어의 출현 그리고 그의 제자인 스트라우스의 강의로 인해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었다.
실라이어마허 이후 헤겔 (Georg W. F. Hegel, 1770 ~ 1831), 시트라우스 (D. F. Straus, 1808 ~ 1874), 바우어 (F. C. Baur, 1792 ~ 1860), 비이더만 (A. E. Biedermann, 1819 ~ 1885) 사이에 헤겔 철학과 실라이어마허 신학을 병합 보충한 ‘자유 복음파’ (중용파)는 경험 신학에 감정과 지식의 활동도 포함할 것을 주장하였다. 도르너 (I. A.Dorner) 등 많은 학자들이 이 학파에 속했다
자유주의 신학과 신조주의 사이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헤르 사이에서 중재하려하였던 ‘조정신학’을 신학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신학의 과제는 중재, 즉 그리스도 예수 상에 나타난 진리의 영원한 기준과, 개인과 공동체의 변화하는 경험들 곧 실재를 인식함에 있어 다양한 질문들과 범주들 사이의 중재하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