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5월 18일, 영국의 수리 물리학자•전기 공학자 올리버 헤비사이드 (Oliver Heaviside, 1850 ~ 1925) 출생
올리버 헤비사이드 (Oliver Heaviside, 1850년 5월 18일 ~ 1925년 2월 3일)는 영국의 수리 물리학자 및 전기 공학자이다.

– 올리버 헤비사이드 (Oliver Heaviside)
.출생: 1850년 5월 18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미들섹스 캠든 타운 (現 그레이터 런던 캠든타운)
.사망: 1925년 2월 3일 (향년 74세), 영국 잉글랜드 데번 토키
.국적: 영국
.직업: 전기공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학력: 괴팅겐 대학 (1905년 명예박사)
.수상: 패러데이 메달 (1922)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전기공학자로 해석학과 전자기학및 전기공학을 연구했다.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전리층을 발견한 사람이다.
파장이 짧은 전파 (단파)가 먼 거리의 통신에 알맞다는 것을 1902년경 헤비사이드와 미국의 케넬리가 각각 따로 발견하였다.
지상으로부터 100km 떨어진 하늘에는 전기를 띤 전리층이 있어 단파는 그 층과 땅 사이를 되풀이하여 반사하기 때문에 멀리까지 전파를 보낼 수 있게 된다.

○ 생애 및 활동
헤비사이드는 토마스 헤비사이드와 레이첼 엘리자베스 웨스트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다.
13세에 캠든하우스 문법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으로 16세까지만 다니고 나온다.
이후 18세에 전신회사에 취직했다. 이 무렵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여가시간에 독학으로 공부하던 그는 맥스웰의 저서에 감명을 받은 이후 전자기학 연구에 열중하게 된다.
전신회사에 다니며 주경야독한 결과 22세에 첫 논문인 “The Best Arrangement of Wheatstone’s Bridge for measuring a Given Resistance with a Given Galvanometer and Battery”를 Philosophical Magazine에 게재했다.
이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전신회사를 24세에 그만두고, 집에서 평생을 은거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 업적
헤비사이드는 포인팅 벡터를 처음으로 제안했고 페이저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임피던스와 리액턴스개념을 제안했으며 이를 페이저를 통해 쉽게 설명하였다.
전리층의 존재 또한 예측하였으며, 1880년대 초에는 현재 벡터 미적분학에서 쓰이는 표기를 확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1884년 맥스웰 방정식을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부연설명을 하면 맥스웰이 정리한 방정식은 20개의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헤비사이드가 당시 해밀턴이 제안한, 사원수의 아종인 벡터로써 간결화한 것이다.
물론 헤비사이드 이전에도 맥스웰이 실수부 (스칼라)를 제외한 사원수를 이용하여 간결화 (1873, 전기자기론)한 바가 있으나, 헤비사이드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간략하게 줄였다.
헤비사이드의 그 외의 업적으로는 라플라스 변환, 전송선 이론의 개발, 헤비사이드 계단함수, 디랙 델타 함수, 헤비사이드 연산자법, 헤비사이드 부분분수 전개법, 동축 케이블의 발명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1891년에는 왕립 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1905년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말년
헤비사이드는 시골에 작은 집으로 은거했고, 돈이 없어서 계속 고생을 하면서 늘그막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은 그와 그가 사는 집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고, 헤비사이드는, 총명한 사람답게, 2층 창문에다 쇠 파이프를 비스듬히 기대 놓고 이를 라이플 총처럼 위장함으로써 애들을 쫓아 버릴 수 있었다.
그는 1925년 2월 3일 (향년 74세), 영국 잉글랜드 데번 토키에서 쓸쓸히 별세했다.
- 기타
수학, 물리학과 전기전자공학에 전혀 무관한 이들조차도 올리버 헤비사이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경우가 많다.
엉뚱하게도 영국 시인인 T. S. 엘리엇이 쓴 시에 그의 이름이 나오며, 그 시를 뮤지컬로 만든 캣츠에도 그 귀절이 가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Up up up past the Russell Hotel,
Up up up to the Heaviside Layer
여기서 헤비사이드층이란 케넬리-헤비사이드층 (Kennelly–Heaviside layer)을 가리키며, 원래는 헤비사이드가 발견한 지구 전리층의 일부인데, 엘리엇의 시에서는 착한 개와 고양이들이 가는 천국으로 묘사된다.

○ Publications
1885, 1886, and 1887, “Electromagnetic induction and its propagation”, The Electrician.
1888/89, “Electromagnetic waves, the propagation of potential, and the electromagnetic effects of a moving charge”, The Electrician.
1889, “On the Electromagnetic Effects due to the Motion of Electrification through a Dielectric”, Phil.Mag.S.5 27: 324.
1892 “On the Forces, Stresses, and Fluxes of Energy in the Electromagnetic Field” Phil.Trans.Royal Soc. A 183:423–80.
1892 “On Operators in Physical Mathematics” Part I. Proc. Roy. Soc. 1892 Jan 1. vol.52 pp. 504–529
1892 Heaviside, Oliver (1892). Electrical Papers. Vol. 1. Macmillan Co, London and New York.
1893 “On Operators in Physical Mathematics” Part II Proc. Roy. Soc. 1893 Jan 1. vol.54 pp. 105–143
1893 “A gravitational and electromagnetic analogy,” The Electrician, vol.31, pp. 281–282 (part I), p. 359 (part II)
1893 reproduced in, Electromagnetic Theory vol I, Chapter 4 Appendix B pp. 455-466
1893 Heaviside, Oliver (1893). Electromagnetic Theory. Vol. 1. The Electrician Printing and Publishing Co, London.
1894 Heaviside, Oliver (1894). Electrical Papers. Vol. 2. Macmillan Co, London and New York.
1899 Heaviside, Oliver (1899). Electromagnetic Theory. Vol. 2. The Electrician Printing and Publishing Co, London.
1912 Heaviside, Oliver (1912). Electromagnetic Theory. Vol. 3. The Electrician Printing and Publishing Co, London.
1925 Electrical Papers. 2 vols Boston 1925 (Copley) 1950 Electromagnetic theory: The complete & unabridged edition. (Spon) reprinted 1950 (Dover)
1970 Heaviside, Oliver (1970). Electrical Papers. Chelsea Publishing Company, Incorporated.
1971 “Electromagnetic theory; Including an account of Heaviside’s unpublished notes for a fourth volume” Chelsea.
2001 Heaviside, Oliver (1 December 2001). Electrical Papers.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 부록 : 올리버 헤비사이드 (Oliver Heaviside) 이야기
올리버 헤비사이드 (Oliver Heaviside, 1850 ~ 1925)는 가난한 집안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숙련된 목판공이었다. 목판공은 한때는 잘 나가던 직업이었지만 사진판과 같은 신 기술에 밀려 점차 단순 하급노동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그의 집은 전형적인 런던의 빈민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헤비사이드는 16세까지 학교를 다녔고, 학교를 졸업하고 한 2년간 혼자서 공부를 하다가, 18세의 나이로 덴마크에 있는 전신회사에 전신기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는 덴마크에서 4년간 일하고, 이 전신회사가 영국 전신회사에 합병이 되면서 영국의 뉴캐슬이란 도시에서 2년 일했다.
그가 24살이 되던 해, 그는 안정적이고 보수도 괜찮았던 전신회사를 때려치우고 런던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면서 과학을 독학하기 시작한다.
그를 매료시켰던 책은 영국의 거장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이 1873년에 펴낸 『전기자기학 소고』였다.
대학에서 고등수학을 공부한 학생들도 어려워서 쩔쩔 매던 책인데, 그는 자신의 골방에서 두문불출한 채로 (밥을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아서 그의 어머니가 식사를 문 앞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이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읽어나갔다.
여기에 쓰인 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등수학도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러길 몇 년, 그는 서서히 전신 (telegraphy)에서의 신호의 전파를 수학적으로 규명한 논문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들은 아주 복잡한 고등수학을 사용했고, 그 함의도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전신선을 보호하기 위해 감싼 절연물질에 흠 (fault)이 생겨서 전류가 그곳으로 새어나가기 시작하면 메시지의 전달이 잘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는데, 그는 이런 흠 (fault)이 어떤 경우엔 메시지를 더 뚜렷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수학적으로 보이면서, 전신선에 ‘인공적인 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메시지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몇 년간 전신에 대한 수학적인 논문을 쓰다가 그는 자신과 보통 엔지니어 사이에 가로막힌 벽을 실감했다.
그는 자신이 몇 년간 노력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이해했듯이, 다른 엔지니어도 노력하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엔지니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논문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맥스웰은 쿼터니온 (quaternion)이라는 수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치던 분석 해석학을 사용했는데, 헤비사이드는 이것이 보통 엔지니어들에게 불필요하게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수학을 안 쓰고 이를 설명할 수는 없고… 결국 헤비사이드는 이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수학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벡터 대수학(vector algebra)이 그것이다. 이공대 대학생이면 맨 처음에 배우는 curl (▽x), divergence (▽·)와 같은 벡터 대수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헤비사이드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다.
벡터 대수를 이용해서 헤비사이드는 엄청나게 복잡한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불과 4개의 방정식으로 다시 씌어질 수 있다는 놀랄만한 사실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최고 물리학자 헬름홀츠 (Herman von Helmholtz)의 프로테제 (protege)였던 헤르츠 (H. Hertz)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4개의 맥스웰 방정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벡터 대수는 헤비사이드를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만이 아니라, 대학에 있는 유명한 과학자들조차 헤비사이드의 논문을 읽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임페리얼 대학의 유명한 수학자였고, 헤비사이드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었던 존 페리 (John Perry)는 “나는 감히 헤비사이드를 이해하는 척 하지 못함을 고백해야겠다.
우린 헤비사이드를 우리 레벨로 좀 해석해 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아무도 안 읽는 (못 읽는) 논문을 『Electrician』이라는 잡지에 투고한 데는 긴박한 이유가 있었다.
이 약간의 고료가 그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류가 흐르는 도선의 주변에 형성되는 전자기 장 (fields)에 대해 수학적인 분석을, 인간의 이성이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시도하던 그는 그의 업적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커녕 친구조차 없었다. 나중에 그가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그를 학회에 초청했을 때도 학회 등록비가 없어서 꼼짝 못할 정도의 궁핍한 생활이 계속됐다. 당시 대학교수 연봉이 500-1000파운드였는데, 그의 원고료는 일년에 약 40파운드에 불과한 돈이었다.
1887년, 그가 서른 일곱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시 전화가 보급되면서 전화 목소리의 찌그러짐이 큰 문제였는데 (160 킬로미터 정도가 전화의 최대 전송거리였다), 헤비사이드는 그의 수학적 분석을 통해 수백-수천 킬로의 전송에서 이 찌그러짐을 말끔히 없애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 해법은 너무 간단했는데, 우리의 상식과 정 반대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든 회로에는 inductance라는 것이 있고, 사람들은 이 inductance를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해법은 이를 오히려 더 크게 하고, 이러기 위해 ‘장하 코일’ (loading coil)과 같은 것을 전선에 부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먹히지 않자 헤비사이드는 자신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엔지니어들을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헤비사이드의 비난의 표적은 윌리엄 프리스 (William Preece)였다.
프리스는 당시 영국의 우편국 (Post Office)에서 기술적인 문제를 총 책임지고 있었던 막강한 사람이었다. 헤비사이드처럼 그도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밑바닥 전신기사에서 출발해서 1887년 당시엔 대영제국의 통신의 기술적 문제를 총괄하는 영향력 있는 위치에까지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프리스는 그가 18살 소년이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당시 영국 최고의 과학자로 세인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마이켈 파라데이 (Michael Faraday)가 전신 신호의 ‘지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수행했던 실험을 파라데이의 조수로서 도와주었는데, 이 실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파라데이의 인품과 그의 통찰력, 그리고 그의 겸손함에 감복되었던 것이다. “아, 정말 위대한 과학자는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위대한 파라데이의 인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던 프리스에게, 헤비사이드는 수학을 조금 잘한다는 것을 믿고 까부는 천방지축 망아지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대화보다는 서로에 대한 공격과 냉소적인 얘기만이 오갔으며, 우편국의 기술자들은 프리스 앞에서 헤비사이드의 이론을 테스트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식의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헤비사이드의 이론에 동감하는 몇몇 과학자들은 이를 테스트해 볼 도리가 없었다. 조금 실험을 하다가 별 신통치 않은 결과가 나오자, 그의 이론은 서서히 잊혀졌다.
1900년 영국이 아닌 미국에서, 마이클 퓨핀 (Michael Pupin)과 조지 켐벨 (George Campbell)이란 엔지니어가 헤비사이드의 이론에 기초해서 특허를 신청할 때까지. 퓨핀은 이 특허 때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해 지면서 모든 아이디어가 자기 것인 양 얘기하기 시작했다.
프리스는 작위를 받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다가 죽었다.
헤비사이드는 시골에 작은 집으로 은거했고, 돈이 없어서 계속 고생을 하면서 늘그막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은 그와 그가 사는 집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고, 헤비사이드는, 총명한 사람답게, 2층 창문에다 쇠 파이프를 비스듬히 기대 놓고 이를 라이플 총처럼 위장함으로써 애들을 쫓아 버릴 수 있었다.
그는 1925년 쓸쓸히 죽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