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7월 24일,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 (Alfons Maria Mucha, 1860 ~ 1939) 출생
알폰스 마리아 무하 (체: Alfons Maria Mucha, 1860년 7월 24일 ~ 1939년 7월 14일)는 체코의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이다.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 알폰스 마리아 무하 (Alfons Maria Mucha)
.출생: 1860년 7월 24일, 체코 이반치체
.사망: 1939년 7월 14일, 체코 프라하
.예술 사조: 아르 누보, 낭만주의, 상징주의, 탈인상주의, 근대 미술, 모더니즘
.직업: 화가
.학력: 뮌헨 미술원, 줄리안느 아카데미, 콜라로시 아카데미
.수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01)
.부모: 안드레아스 무하, 아말리 말라
.배우자: 마루스카 히틸로바 (1906년–1939년)
.자녀: 이르지 무하, 야로슬라바 무호바
.손주: 존 무하, 야르밀라 플로코바
무하는 유럽에서 초기 아르누보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잠시 가라앉았던 무하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에 크게 부활하였다.
이는 영국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포스터를 제작한 Michael English and Nigel Waymouth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무하의 작품들은 많은 삽화가들과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일본의 만화가 타케우치 나오코는 그녀의 만화 캐릭터들에 대한 모티브를 무하의 작품에서 가져왔고, 만화가이자 현재 마블 코믹스의 편잡장인 조 퀘사다 또한 무하의 기술과 일련의 작품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 생애 및 활동
무하는 모라비아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79년 빈으로 옮겨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미쿨로프의 카를 쿠헨 백작이 흐루쇼바니 엠마호프 성과 벽화를 부탁한 뒤에 그의 그림에 감명받아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1887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Académie Julian과 Académie Colarossi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Théâtre de la Renaissance에서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전형적인 회화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클라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있었다.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즈비로그 성의 거대하고 크리스탈로 된 큰 방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그의 붓 아래에서 20개의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왔다.
슬라브 민족 역사에 있어서 변혁의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특히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또한 곧 준공될 성 비투스 대성당의 메인 유리를 스케치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1928년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프라하에 이를 헌정했다.
당시의 프라하에서는 모든 <슬라브 서사시> 작품 전체를 전시할 만한 갤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전쟁후에 일시적으로 모라비아 성에 일시적으로 출품하였다.
체코어로는 Moravsky krumlov로 1963년부터 관람이 가능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번째 우표는 무하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하의 애국심은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그를의 적으로 간주한 명부에 포함할 만큼 유명했다.
193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알폰스 무하는 비셰그라드의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무하의 작품세계는 프라하 박물관에 헌정되었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모라비아 크루믈에서 전시되었다.
또한 무하 삶의 초기 시대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던 <ИВАНЧИЦ> 법원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세계의 많은 주요한 박물관과 화랑들에는 무하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예전의 박람회 단지에서 멀지않은 프라하의<СТРМОВК>공원에 <슬라브 서사시>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물의 건축 설계가 진행 중이다.
소행성 5122는 무하의 명성을 기려서 명명한 것이다.

○ 화풍
그의 스타일은 극도로 이상화된 여성과 그를 장식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로 구성되며, 소위 말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화풍의 시작이자 끝이다.
또한 배경과 장식에 매우 공을 많이 들이는 화풍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상업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석판화가 많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의 연극 포스터부터 말기의 작품들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초기 아르누보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무하의 감각적인 화풍은 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그의 말년에는 지나치게 민족적인 구형 예술이라며 프라하 미술계에서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이후에는 아예 그 존재가 잊혀지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무하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해 현대에서 명성을 되찾았다.
도리어 현대에는 일반인에게는 거부감이 심한 현대미술 (추상, 행위예술 등)과 달리 취향을 덜 타는 편이라 인기가 좋다.
특히 기호화된 자연물과 인물의 형태는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프라하의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 좌측면에 그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그의 독특한 화풍 덕에 보통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무하는 유럽에서 초기 아르누보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잠시 가라앉았던 무하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에 크게 부활하였다.
이는 영국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포스터를 제작한 Michael English and Nigel Waymouth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무하의 작품들은 많은 삽화가들과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 평가
현대미술에 끼친 지대한 영향 탓에, 현대 일러스트레이터의 시조로 여겨진다.
19~20세기를 거쳐간 유명 화가 중 굉장히 무난하고 평탄한 인생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부모가 곁에 있었고, 30대 중반에 사라 베르나르의 전담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유명세가 치솟았기에 가난으로 고생한 기간이 짧다.
40살이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명성을 퍼뜨린 상태였다.
또한 예술의 소재로서 여성을 좋아한 것과는 별개로 성적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다.
여자관계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않았던 당대의 많은 남성 화가와 달리, 무하는 그다지 편력을 보이지 않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해로했다.
말년에 민족 예술가로 활동하다 나치의 시기를 빼면 풍족한 삶을 영위했으며, 20세기 유럽 남성 수명을 한참 넘긴 79세에 사망했다.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과 아르누보의 아이콘 : 무하는 부드러운 곡선, 화려한 꽃문양, 풍요로운 색감, 그리고 신비롭고 매혹적인 여성 묘사를 결합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le style Mucha’로 불리는 이 스타일은 파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미술 애호가의 집을 꾸미는 다양한 디자인과 장식품으로 널리 응용되었다.” 고 무하재단(Mucha Foundation)은 명시한다. 그의 예술은 당대 ‘벨 에포크’ 시기 파리 시각 예술의 중심이 되었다.
.일상 예술화와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 과거의 미술이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면, 무하는 포스터, 광고, 달력, 장식 패널 (panneaux décoratifs) 등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무하의 포스터는 단순한 광고물이 아닌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당시 도시 거리를 ‘야외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아이티무브의 분석처럼, 그는 실용 예술의 위상을 순수 미술 단계로 격상시켰다.
.슬라브 민족의 혼을 깨운 국민 화가 : 파리에서 상업 예술가로 큰 부와 명성을 얻었음에도, 무하는 말년에 조국 체코로 돌아와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약 20년에 걸쳐 완성한 거대한 연작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는 모든 슬라브 민족의 고난과 역사를 담은 걸작이다. 이는 그를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체코의 거장’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 무하의 화풍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 예술계에도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타투,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 수많은 시각 매체가 여전히 그의 구도와 선 표현 방식을 오마주하고 있다.

○ 주요 작품 활동
- 상업화가로의 전성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하 작품 상당수가 이 지스몬다 작업 직후부터 1900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1895년
<사라 베르나르 / 미국 순회공연> 공연 포스터
<파리스의 심판> 달력
1896년
<동백꽃 여인> – 베르나르의 공연 포스터
<황도 12궁> – 달력
<제20회 살롱 데 상 전시회> – 행사 포스터
<뿌리는 향수, ‘로드’> – 광고 포스터
<‘욥(JOB)’ 담배종이회사> – 광고 포스터
<‘르페브르 위틸’ 비스킷> – 광고 포스터. 베르나르를 모델로 기용했다
<사계> – <봄>, <여름>, <가을>, <겨울>
1897년
<백일몽>
<네슬레의 존경스러운 경의> – 네슬레사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 60주년을 기리는 대형 포스터
<웨스트 엔드 리뷰> – 영국 문학잡지 표지
1898년
<메데>
<네 개의 꽃> – <장미>, <아이리스> <카네이션> <백합>
<네 개의 예술> – <시>, <음악>, <춤>, <회화>
1899년
<하루의 시간> – <아침의 눈뜸>, <한낮의 빛남>, <저녁의 관조>, <밤의 휴식>
<장식 패널 앵초와 깃털> – 수채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오스트리아관의 포스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 전체(특히 대형 벽화), 식당 메뉴 디자인을 그렸다.
<네 개의 보석> – <루비>, <에메랄드>, <자수정>, <토파즈>
파리 Royale가의 조르주 푸케(George Fouquet) 보석상점 외벽 및 인테리어
1902년
<페르펙타 자전거> 광고 포스터
<네 개의 별> – <달>, <북극성>, <금성>, <샛별>
오귀스트 로댕과 프라하, 모라비안, 슬로바키아 여정 동행. 조각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파리에서 새로운 장식예술의 주요 내용을 추려낸 <장식 자료집> 출판.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컨셉 디자인을 담은 책인 <공식 자료집>까지 출판할 정도였다. 본인은 “밑천 다 퍼줄 테니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태도였지만, 이를 통해 무하의 디자인이 더 알려지는 역효과를 초래해 더욱 요구가 쇄도했다고 한다. 무하의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의욕이 왕성했음에도 도저히 밀려드는 주문량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1903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 대표 포스터
국립 프라하 극장의 작곡가 베드르지히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오페라 리부셰(Libuse) 무대장치 디자인
- 뉴욕에서의 인물화
1904년 3월 미국을 처음 방문했다. 이때 훗날 <슬라브 서사시>의 후원자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을 만났다.
1905년 1월 미국으로 아주 이주하여 1910년까지 머물렀다. 초상화작업 및 강습으로 생활했다. <인물 장식집>을 출판했다.
1906년 베르나르의 미국 순회공연에 따라 <동백꽃 여인 / 미국 순회공연> 포스터를 그렸다.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보스턴에서 순회전을 개최했다. 이 무렵 미술학도 마리 히틸로바(Marie Chytilova, 1882-1959)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매니저이자 딜러로 활동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아들 이르지(Jiří, 1915-1991)는 번역가 겸 작가로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딸 야로슬라바(Jaroslava, 1909-1986)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부친의 작품을 복원했다. 이렇게 복원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슬라브 서사시. 두 아이들은 무하의 작품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08년, 10월 뉴욕 내 독일인 이민자 극장의 디자인을 제작했다. 보스턴 필하모니 콘서트에서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Vltava)에 감명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 슬라브 민족의 위상, 역사, 문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1909년, 찰스 크레인으로부터 <슬라브 서사시> 후원을 약속받는다. 민족 역사의 기록화/역사화/서사시로, 1900 파리 박람회 때 그리고자 했으나 오스트리아 정부가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우울하다고 거부했던 구상이었다.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1세>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발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 등. 이 슬라브 서사시는 잘 알려진 섬세하고 화려하기만 한 화풍과는 좀 거리가 있는 편. 장엄하고 화려한 그림도 속해 있지만 의외로 죽음이나 슬라브 역사의 음울한 묘사도 상당하다.

- 프라하에서의 민족주의
1910년, 고국 체코로 돌아와 제롬 콜로레도 만스펠트 백작 (Count Jerome Coloredo-Mansfeld)의 즈비로흐 (Zbiroh) 성의 크리스탈 방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1911년, 프라하 시립회관 시장홀 장식을 완성했다. 무하가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석판화를 버리고 민족주의적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르누보 화풍의 유행 자체가 20년 만에(1890~1910) 끝나버렸다.
1912년, <국립연합 복권> 포스터 – 새 정부가 슬라브 민족을 위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기금 활동을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어 독립된 체코슬로바키아가 형성되었다. 이 새 정부를 위한 관제적 양식, 즉 우표, 은행권,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1919년 4월 27일, 프라하의 클레멘티눔 (Klementinum)에서 <슬라브 서사시> 연작 11점을 전시했다.
1920년, 미국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1년, 미국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슬라브 서사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22년, 프리메이슨 체코지부 총본부장이던 알폰스 무하가 로잔에서 열린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의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한다. 무하의 호칭은 ‘주권 대표(Soverign Great Commander)’가 되었다.
1923년, <황야의 여인>
1924년, 책 <프리메이슨>을 출판했다.
1926년, 제8차 소콜(Sokol) 회의에서 <볼타바 강 (Vltava River)에서 슬라브 형제재단 (Slavonic Brethren)>이란 축제연극을 기획했다.
1928년, 무하가 가족과 함께 프라하 Bubenec의 신축 공간으로 이주했다. <슬라브 서사시> 20연작을 프라하 샘플 박람회장에 전시했다.
1931년, 체코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1931년, 슬라브 정부의 요청으로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렸다.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색유리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으로 구성하는 반면, 무하는 유리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가공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934년, <사랑, 이성, 그리고 지혜에 대해> 도서를 출판했다. 프라하 협회 홀라홀(Hlahol)을 위한 그림을 제작했다. 프랑스 정부에게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1936년, 파리 Jeu de Paume에서 무하와 Frantisek Kupka의 공동 회고전을 열었다. 무하는 삶과 작품에 대한 3가지 연설을 개인 인쇄물로 자체 출판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다. 알폰스 무하의 애국심/민족주의는 독일 정부가 그를 ‘적/불온인물’으로 간주한 명부에 올릴 정도였기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 심문을 가했다. 이로 인해 그는 폐렴에 걸려 7월 14일 사망하고, 프라하 비셰흐라트(Vyšehrad)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나치는 무하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그럼에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정작 히틀러도 무하처럼 상업미술로 생계를 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 작품
알폰스 무하 (1860~1939) 대표작은 지스몽다 (Gismonda), 황도 12궁 (Zodiac), 그리고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 시리즈다.
– 대표작
- 상업 포스터 및 장식 예술
지스몽다 (Gismonda, 1894): 당시 유명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주인공으로 그린 연극 포스터로, 우아한 곡선과 비라틴적 구도로 파리 전역에 무하 열풍을 일으켰다.
황도 12궁 (Zodiac, 1896): 달력 디자인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원형 배경 속 여인의 화려한 머리 장식과 별자리 상징이 조화를 이루는 아르누보의 정수다.
사계 (The Seasons, 1896):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을 자연물과 함께 장식 패널 형식으로 표현했다.
- 말년의 회화 대작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 1912~1926): 체코인과 슬라브 민족의 고난과 역사를 담아낸 초대형 캔버스 20점으로 구성된 말년의 역작이자 국민 화가로서의 혼이 담긴 시리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