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7월 24일, 미국의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1782 ~ 1862) 타계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본명 Maarten Van Buren, 1782년 12월 5일 ~ 1862년 7월 24일)은 미국의 8번째 대통령 (임기: 1837 ~ 41)이다.
그 이전에는 제8대 부통령과 제10대 국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민주당의 핵심 발기인이며, 아일랜드계인 앤드루 잭슨과 함께 두 번째 비영국계 대통령으로 첫 네덜란드계, 그리고 첫 뉴욕주 출신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출생: 1782년 12월 5일, 미국 뉴욕 식민지 킨더후크
.사망: 1862년 7월 24일 (79세), 미국 뉴욕주 린더널드
.정당: 민주공화당(1799년 ~ 1825년), 자유토지당(1848년 ~ 1852년), 민주당(1825년 ~ 1848년, 1852년 ~ 1862년)
.배우자: 한나 호이스 밴 뷰런
.자녀: 에이브러햄, 존, 마틴, 스미스
.종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미국의 제8대 대통령
.임기: 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부통령: 리처드 멘터 존슨
.전임: 앤드루 잭슨(제7대) / 후임: 윌리엄 헨리 해리슨(제9대)
*미국의 제8대 부통령
.임기: 1833년 3월 4일~1837년 3월 4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전임: 존 C. 칼훈(제7대) / 후임: 리처드 멘터 존슨(제9대)
그의 제1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네덜란드어였다.
그는 임기 중에 경제 문제에 시달려야 했고, 그 임기는 1837년의 공황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루스툭 전쟁과 캐롤라인 사건 동안 영국과 식민지인 캐나다와의 관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자신의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밴 뷰렌은 4년 후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선거의 결과 근소한 차이였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완패하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대결 분위기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녔다.1848년 밴 뷰런은 자유토지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마틴 밴 뷰런은 국무부 장관, 부통령, 대통령을 경험한 두 명 중의 1명으로 나머지 한 명은 토머스 제퍼슨이다.

○ 생애 및 활동
뉴욕 식민지 킨더후크의 네덜란드인 공동체 지역에서 에이버러햄과 마리아 밴 뷰런의 5명 자식들 중에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호이스는 요하네스 반 알렌의 미망인이었으며, 첫 결혼 시절에 3명의 자식을 두었다.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 뷰런은 술집과 시장 판매용 채소 재배원을 운영하였다.
어린 마틴 밴 뷰런은 마을 학교에 다녔으며, 14세 때에 지방 검사 프랜시스 실베스터 아래 법률을 공부하였다.
15세가 되면서 처음으로 법원 재판에 참석하였다.
1801년 밴 뷰런은 뉴욕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1803년 법정에 수용되었고 고향에서 이복형 제임스 반 알렌과 함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1807년 자신의 먼 사촌이자 어린 시절의 애인 한나 호이스(1783~1819)와 결혼하였다.
한나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18년 전에 사망하였다. 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맏아들 에이브러햄은 아버지의 백악관 비서를 지냈으며, 후에 멕시코 전쟁 중에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참모가 되었다. 둘째 존은 뉴욕의 법무 장관이 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 좋아 말솜씨가 좋아 킨더후크의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정규 교육과정은 거친 적이 없다.
어쨌든 그 능력으로 변호사가 되었으며, 그 후 정치에 진출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그는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815년 뉴욕 검찰 총장이 된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완전하게 익히게 되는데, 그런 과도하게 드러나는 “배운 예의범절”이 데이비드 크로켓 등에게는 위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1824년 자신이 지지했던 앤드루 잭슨이 존 퀸시 애덤스에게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게 되자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을 정상으로 한 파벌을 만들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현대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게 된다.
그가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으로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머신 (Machine)’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머신이란 대중을 투표에 동원하는 촘촘히 구축된 선거조직을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멀쩡해 보이는 ‘머신’이 왜 문제가 되냐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중 동원이라는 게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를 떠올리게 하는 금품 살포를 비롯한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머신은 구축과 유지에 큰 비용이 드는 탓에 한 사람이 쓰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후계자가 물려받는 경우가 빈번하고, 따라서 “계파”의 구축과도 친연성이 크다.
그래서 영단어 “머신 폴리틱스 (Machine Politics)”에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
그리하여 1828년 잭슨이 당선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어 국무장관에 오르게 되었고 1832년에는 부통령 존 C. 칼훈이 사직하자 잭슨은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4년 뒤에는 잭슨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부통령을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최초라고 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1837년의 공황이 터지고 만 것.
이 공황의 규모는 1930년대 대공황 만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공황 발생 전에는 사상 최악의 공황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급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이건 잭슨 때 연방은행 없에겠다고 뺀 돈을 사은행들한테 넣어놨더니 돈놀이 하다가 거품 꺼졌는데 영국 자본까지 함께 빠져나가면서 생긴 문제였는지라, 본인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가 극구 반대하며 협력을 요청할 때도 멍때리고 돕지 않았던게 밴뷰런이었던 지라, 본인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타 국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을 거부하는 등, 전임자 잭슨에 비해 우유부단하게 비춰졌고 이를 두고 휘그당에서는 그의 이름을 빗대 Martin Van Ruin (마틴은 폐허를 만들었다!)라는 식으로 공세적인 선거를 펼쳤다.
캐롤라인호 사건을 윈필드 스콧 장군을 파견해 미영간의 분쟁을 차단한 것, 제2차 세미놀 전쟁 (인디언 전쟁의 일부)을 승전으로 이끌고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을 유지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업적을 세웠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이미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잭슨 밑의 많은 이들도 등을 돌린 상태였고, 결국 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후보분열이 일어나 런닝메이트도 없을 정도였다.
1840년 결국 재선에 실패, 윌리엄 해리슨에게 패하고 백악관을 나오게 되었다. 사실 선거인단에 비해 선거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고 한다. 127만표 대 112만표. 6.1%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에 도전했고 기어이 1848년에는 독자 출마를 감행하였다.
그가 새로 만든 자유토지당은 서부개척지를 노예제로 부리지 말고 해방 노예들이 토지를 일구게 하는게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낫다는 개념있는 주장을 했다.
자유토지당은 비록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하원과 상원에서 4년간 의미있는 제3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밴뷰런의 선전 (10% 득표)은 민주당의 표를 일부 갉아먹어 재커리 테일러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자유토지당은 1852년 공화당에 합류하지만 마틴 밴뷰런은 민주당으로 복당하여 죽을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남았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조용히 살다 1862년 7월 24일에 별세했다. 향년 79세
강력한 노예제 반대입장으로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어느 정도 역할을 한 셈이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