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7월 14일, 영국의 여행작가•탐험가 거트루드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1868 ~ 1926) 출생
거트루드 마거릿 로시언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CBE, 1868년 7월 14일 ~ 1926년 7월 12일)은 영국의 작가, 여행가, 탐험가, 고고학자, 정보원이다.

– 거트루드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본명: 거트루드 마거릿 로시언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출생: 1868년 7월 14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럼주 워싱턴 (現 영국 잉글랜드 타인 위어주 선덜랜드 워싱턴)
.사망: 1926년 7월 12일 (57세), 이라크 왕국 바그다드
.성별: 여성
.국적: 영국
.직업: 작가, 탐험가, 고고학자
.서훈: 1917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거트루드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1868 ~ 1926)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아라비아 등지를 여행했다.
오늘날 요르단과 이라크의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생애 및 활동
거트루드 벨은 1868년 7월 14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럼주 워싱턴 (現 영국 잉글랜드 타인 위어주 선덜랜드 워싱턴)의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지적 탐구심과 모험심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성장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뒤 문학, 등반,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세계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 대한 깊은 매혹을 느껴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를 수차례 방문하며 고고학적 조사와 지리적 탐사, 현지 부족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다.
이를 통해 영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동의 문화와 사회 구조, 정치 상황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학계와 정계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보기관과 아라비아국에서 자문관, 분석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아랍 민족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영국의 중동 정책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와 함께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상하며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이라크 국가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하여 국경 획정, 행정 체계 설계, 국왕 파이살 1세의 즉위 지원 등 국가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영국군이 1917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벨은 콕스의 요청으로 그곳에 소환되어 CBE 훈장을 받고 활동을 이어갔으며, 1918년 콕스가 떠난 뒤 행정 책임자가 된 윌슨과 처음에는 의견이 비슷했지만 1919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자치 문제를 두고 점차 대립하게 되었고, 벨은 프랑스와 영국의 평화협상 현장과 중동 여러 지역을 돌아보며 아랍 자치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반면 아놀드 윌슨은 영국의 직접 통제를 선호해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1920년 여름 시아·수니 부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벨은 이를 윌슨의 오만한 통치 탓으로 돌렸다가 같은 해 10월 콕스가 돌아오면서 벨은 다시 동양국 비서로서 아랍 정부와의 중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전쟁과 재정난으로 피로해진 영국 정부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이라크의 자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처칠이 1921년 카이로 회의를 열었고 벨은 콕스와 로렌스와 함께 이 회의에서 영국 위임통치 지역의 국경과 통치 방식을 논의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벨은 트랜스요르단과 이라크에 하심 가문 왕정을 세우는 ‘샤리프안 해법’을 적극 지지했고 파이살이 이라크를 통합할 적임자라고 보았으며, 회의에서 모술 문제로 한때 패했지만 이후 국민투표 과정에서 친파이살 쿠르드 엘리트를 확보함으로써 결국 모술을 이라크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고 1926년 터키와의 앙카라 조약으로 확정되었으며, 벨은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하려는 영국의 결정과 시온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며 밸푸어 선언이 현실과 동떨어진 위험한 정책이라 비판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벨은 이라크 국가 구성의 핵심 설계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영국 제국 정책과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서 복잡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샤리프안 해법으로 파이살이 이라크 왕으로 추대되자 벨은 잠재적 반대자였던 탈리브를 콕스에게 제안해 체포·추방하게 했고, 이후 1920년대 내내 영국 고등판무관부 자문단의 핵심으로서 파이살 즉위 초기 이라크 행정 전반에 관여하며 부족 지리, 지도층 정보, 현지 정치 조언을 제공했고, 알카툰이라 불리며 파이살과 영국·아랍 엘리트 간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국기와 왕기 디자인까지 제안하는 등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도 관여했으며, 시아·수니·쿠르드·유대인·아시리아인 등 다양한 집단을 하나의 국가로 묶기 위한 통합 과업 속에서 시아파의 지지를 확보하는 문제를 가장 큰 과제로 보면서도 시아 지도자들과 문화적 제약 탓에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고 시아파가 정권을 잡으면 신정체제로 흐를 것을 우려해 수니 중심의 통치를 지지했으며, 왕과의 협업이 쉽지 않음을 토로하면서도 실무를 계속 맡았다.
동시에 고고학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 박물관 설립을 주도하고 문화재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등 학자로서의 사명감도 놓지 않았으나, 전쟁과 정치적 갈등, 책임감 속에서 지친 마음과 건강 악화가 겹쳐 1926년 바그다드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 거트루드 벨, 이라크를 만든 여인
199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보면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던 영국 군인들이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행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군인 중 한명이 “저 산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자 다른 군인이 “벨의 지도에 길이 나와”라고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벨의 지도는 거트루드 마거릿 로디안 벨(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이 만든 지도를 말한다. 벨은 여자였다. 영국 정보장교로 아랍군을 이끌고 오스만튀르크와 싸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여성판, 사막의 여왕 등 다양한 별명을 지닌 벨은 영국이 이라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관리이자, 정보원, 고고학자, 탐험가다.
벨은 1868년 7월 14일 더럼 지방의 워싱턴 뉴 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제철업자이자 자유당 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자본가였다. 할아버지가 준남작(baronet)의 작위를 부여받았고, 아버지가 작위를 세습하였기에 경(sir)으로 불리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런던 퀸스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1888년 20세 때 여성 최초로 현대사를 전공하여 학사 취득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당시 옥스퍼드는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기에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다.
벨은 옥스퍼드를 떠나 당시 평범한 여성의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벨은 6개월간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후 1892년 주이란 대사로 봉직하고 있던 이모부를 만나기 위해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젊은 외교관 헨리 카더건을 만났다. 문학을 좋아하였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벨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알프스에 이름을 남기다
이란에서 귀국한 후 벨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등산을 즐겼는데, 여성 등산복이 없던 시절, 치마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등정을 할 정도였다.
1899년 프랑스 알프스 라메주 정상에 올랐고, 스위스 알프스 엥겔호른 지역 9개 봉우리 중 7개 정상에 올랐다.
그중 봉우리 하나는 벨의 등정을 기념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 ‘거트루드봉’으로 부른다.
벨의 강인함은 1902년 4274m 높이의 핀스터아르호른 등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상을 수백 미터 앞두고 눈보라를 만나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무려 53시간 동안 밧줄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다.
손발에 동상을 입긴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2년 후 마터호른 등반에 성공하였다.
1900년 벨은 다시 중동(中東)을 여행하였다. 테헤란에서 사귄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재 독일 영사의 부인인 니나 로젠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아랍어, 히브리어, 터키어를 공부하였고 승마를 배웠다.
무신론자(無神論者)로 종교를 경멸하였던 그녀는 시리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드루즈 지역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여타 서구인들과 달리 지역민들을 존중하고 아랍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벨은 어려움 없이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6월 영국으로 돌아온 벨은 1903년 인도에 갔다.
훗날 이라크에서 상관으로 모시게 될 퍼시 콕스 영사를 만나게 된다.
콕스로부터 중동에 관한 소식을 들은 후 천성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아라비아 반도 여행을 결심한다.

– 영국군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 당시 영국인들은 리처드 버튼 경, 찰스 다우티, 기포드 팔그레이브, 윌프리드 블런트의 아라비아 여행기에 매료되었는데 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벨은 거의 2년에 한 번씩 모두 다섯 차례나 중동을 드나들었다. 고고학에 매료된 벨은 발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꼼꼼하게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죽을 때까지 그녀가 남긴 편지와 일기는 1600여 개, 사진은 7000여 장에 달한다. 이 귀중한 역사자료는 현재 뉴캐슬 대학에서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아라비아 여행을 통해 벨은 믿을 수 있는 아라비스트, 즉 아랍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벨을 스파이로 의심했다. 벨이 험한 곳을 홀로 다닌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는 무장경비병, 하인, 요리사가 동행하였다. 1914년 벨은 2400km에 달하는 아라비아 중부 사막 지역을 낙타를 타고 탐험하여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장창립자 메달을 받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군은 아라비아를 잘 아는 벨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로써 벨은 영국군이 채용한 최초의 여성 정보장교가 되어 카이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없지만, 만일 처칠이 성급하고도 무모하게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벨 소령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독일과 손을 잡을 것을 우려한 처칠은 선제공격을 시도하였다. 1915년 4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약 9개월간 이스탄불로 진입하는 바닷길인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오스만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벌인 전투는 5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남긴 채 영국과 프랑스의 후퇴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벨이 사랑하는 남자 리처드 다우티-와일리 중령이 전사했다. 다우티-와일리 중령은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벨은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남았다.

– 9개국에서 사용하는 아랍 삼색기
만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더라면 영국이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대항하라고 아랍인들을 선동하여 규합하는 데 벨이 아랍전문가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무력(無力)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 영국은 오스만튀르크 제국 지배 아래에 있던 아랍인들의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아랍인들이 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하는 데 선봉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아랍인들에게 독립 아랍국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영국을 도와 아랍 항쟁을 이끈 히자즈 지방 메카의 아랍 지도자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도 그중 하나였다. 파이살은 12세 아랍 소년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것을 보다 울분을 토하며 튀르크 상관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잔혹함에 분노한 파이살은 영국의 도움으로 반(反)오스만 아랍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아랍 항쟁군은 영국인 마크 사이크스가 만들어준 적색, 흰색, 검은색으로 된 삼색기를 들고 싸웠다. 이 깃발은 오늘날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을 포함하여 아랍 9개국의 국기의 바탕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독립국의 범위는 영국의 계획과 달랐다. 아랍 전 지역을 독립국 영토로 생각한 아랍인들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항쟁 이전인 1916년에 러시아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영향권에 둘 지역을 나누어 정하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약’이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국제 공동관리 구역으로 두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그 외 아랍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로 했다. 영국이 아랍인에게 약속한 아랍 독립국은 영국의 힘이 미치는 지역으로 한정됐으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은 애초부터 제외된 상태였다.
바스라를 거쳐 1917년 바그다드로 돌아온 벨은 총영사로 근무 중이던 콕스를 보좌하여 중동문제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그다드는 벨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벨은 모든 아랍인이 하나가 되는 아랍국을 생각한 적이 있으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여러 개의 아랍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사이크스가 프랑스의 피코와 협의한 것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한 셈인데, 정작 사이크스는 벨을 싫어하였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을 이렇게 평했다.
“오만하고, 과장이 심하고, 밋밋한 가슴을 지녔고, 남자 같고, 세계여행이나 하고 다니고, 엉덩이나 흔들고, 실없는 말이나 하는 바보같이 멍청한 수다쟁이, 이 빌어 처먹을 것!”
그도 그럴 것이 벨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두고 사이크스가 무능하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사이크스는 극심한 반아랍 정서를 지닌 사람이었다. 벨은 사이크스를 1905년 하이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사이크스는 아랍인을 “겁 많고 병들고 게으른 동물”로 비유하여 벨을 크게 놀라게 했다. 벨은 사이크스와 달리 아랍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아랍 지역을 여러 국가로 나눴다는 점에서 벨과 사이크스는 초록동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아랍인에 대한 감정은 사뭇 달랐다.

– 시아와 수니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예감한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국가를 세울 것을 계획하였고, 1920년 11월 11일 국제연맹은 영국에 이라크를 보호통치령으로 위임하였다. 전통적으로 아랍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라크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새로운 이라크는 북부까지 포함한 국가가 되었다.
벨은 시아파 무슬림이 다수인 이 지역의 통치자는 수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니를 시아보다 더 문명인이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시아는 종교적 광기를 지닌 사람들로 위험하고 전(前)근대적이라고 보았다. 1920년 10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벨은 시아파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행사하여 매 순간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가정해 보신다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황과 시아파 종교지도자를 단지 바보 같은 노인네들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아직 그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벨은 결론적으로 시아보다 소수인 수니파 무슬림이 실권을 갖는 새로운 국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수니 무슬림들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神政)국가가 설 것입니다. 이는 진정 사악한 일입니다.”

– 새로운 나라를 만들다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가 문명국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라크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떠안아야 할 부담과 비용을 거부하는 거친 부족들로 구성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대중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내부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벨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백서(白書)를 쓴 여성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행정보고서》라는 제목의 백서는 당시 런던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소포타미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려는 노력보다 “개가 뒷다리로 섰다”면서 여성이 백서를 썼다는 데 놀라는 언론의 반응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921년 8월 23일 영국 정부는 벨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과 싸웠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벨은 새로운 나라 이라크를 위한 헌법을 쓰는 데 일조하면서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의 국경선을 그었다. 벨은 이라크의 국경을 정할 당시 모습을 1921년 12월 4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무실에서 하일에서 온 신사와 아니자 부족의 지도자 파하드 벡의 도움으로 이라크 남쪽 사막지대 국경선을 그리며 아침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파하드 벡이 사막에 대해 제가 잘 알고 있다고 믿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콘월리스가 그에게 부족의 경계를 묻자 그는 ‘카툰(여왕)에게 물어보시오. 그녀가 잘 아오’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파하드로부터 아니자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모두 알아내고 하일에서 온 사람에게서는 샴마르 부족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유물을 전부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리저리 꽤 합리적으로 국경을 확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2015년 벨의 삶을 영화화한 〈사막의 여왕 (Queen of Desert)〉 개봉에 앞서 벨로 열연한 니콜 키드먼은 “벨이 이라크와 요르단의 국경을 획정하였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라크를 만들고 아랍인들에게 ‘여왕’으로 불린 벨이 이라크에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국립박물관이다. 당시 서구 고고학자들은 중동에서 발굴한 유물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벨은 고고학 유물이 전부 고고학 발굴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법으로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왕에게 간청하여 고대 유물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26년 6월 16일 이라크 국립박물관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 벨 이후의 이라크
벨은 1926년 7월 11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살 여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라크 건국 이후 정치적으로 크게 할 일이 없었고, 1923년 자신의 상관이자 후견인이었던 콕스가 떠난 이후 런던이나 주변의 영국 관료들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우울증을 앓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1921년 8월 28일 일기에서 벨은 이라크라는 나라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라크를 사랑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이라크는 지금 아랍 수니, 아랍 시아, 쿠르드 세 파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 1921년부터 2003년까지 80여 년 동안 이라크는 소수 수니가 다수 시아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벨은 셋 중 둘이 힘을 합하여 하나를 제어하는 영국의 통치 원칙에 충실하였다. 아랍 수니와 쿠르드 수니가 연합하여 수니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아랍 시아를 다스리고, 아랍 수니와 시아가 아랍이라는 이름 아래 힘을 모아 쿠르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아랍이라는 언어적 정체성도 수니와 시아라는 종교적 정체성도 이라크를 평온한 국가로 만들지 못하였다. 이라크 지방과 메카가 위치한 히자즈 지방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당시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자즈 출신 파이살을 굳이 이라크의 왕으로 옹립한 것 또한 패착이었다. 왕정은 1958년 쿠데타로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되었다.
어쩌면 오늘날의 이라크는 벨의 실패작이라기보다는 벨의 말마따나 시민의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권력만을 탐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1921년 2월 17일 벨이 파하드 벡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파하드 벡은 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관료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영국과 같다고 생각하나 봅니다만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이 나라는 당신 나라처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벨은 이에 “그래서 저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길 바라는 겁니다”라고 하자 파하드 벡은 “예. 그러나 당신이 돌보아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벨이 옆에서 서서 지켜보겠다고 하자, 영국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한 파하드 벡의 모습에서 스스로 결연한 의지 없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다.
80여 년 동안 권좌를 무력으로 지키다 아랍 시아에 권력을 빼앗긴 아랍 수니가 IS 극단주의자로 되어버린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바그다드의 바브 알-샤르지에 묻혀 있는 벨이 그토록 싫어했던 시아가 장악한 이라크는 어떻게 될까? _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 유네스코 유산 ‘거트루드 벨의 기록물’ (The Gertrude Bell Archive)
‘거트루드 벨의 기록물 (The Gertrude Bell Archive)’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세계에 대해 특별한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료이다. 이 기록물은 오늘날 인구 이동과 인종 청소, 전쟁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파괴되면서 극적인 변화를 겪어 온 여러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례를 담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이 기록 자료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 현안이 된 중동 지역의 중요성 때문에 이 기록물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기록물로써 주목 받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약 150만 명의 방문자가 이 기록물을 참조했는데 그 중 87%는 다른 국가에서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거트루드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1868 ~ 1926)은 이라크가 국가로서 형성되던 무렵에 이라크 국내에 있으면서 영국 정부를 위해 일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가 남긴 ‘거트루드 벨 기록물’은 현재의 중동과 유럽,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라크가 보존하고 있는 유산 가운데서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마도 뉴캐슬대학교 (University of Newcastle)에서 보관하고 있는 거트루드 벨의 문서일 것이다.”
이 기록물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1926년까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의 여러 나라를 돌면서 해당 국가의 역사적 과도기를 보낸 경험을 거트루드 벨이 개인적 시각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이 기록물은 당시 그녀가 오늘날 중동이 형성되던 과정과 그 속에서 담당했던 조연 (助演)의 역할을 보여주는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기록물이다.

– 거트루드 벨의 기록물 (The Gertrude Bell Archive)
.국가: 영국(United Kingdom)
.등재연도: 2017년
.외국어 표기: The Gertrude Bell Archive
.소장 및 관리기관: 뉴캐슬대학교(University of Newcastle)
– 본문
.세계적 중요성
거트루드 벨 기록물은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하다. 특히 이라크의 형성기에 중동 지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현대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친 한 특별한 영국(유럽) 여성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은 중동의 역사에 관련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체 아랍과 무슬림 지역을 포함하여, 그리고 서구 세계(미국, 캐나다, 유럽)는 물론이고, 세계 일주여행을 하면서 머물렀던 인도, 파키스탄, 버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등과 같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 대한 역사까지 포함하고 있다.
거트루드 벨은 중동 지역을 돌며 영국 정부를 위해서 일했다. 이 기록물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벨이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과 지역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데, 그 후 이들 모두 상당한 변화를 거쳤기 때문에 이 기록물이 혹시라도 사라진다면 인류 유산에 크나큰 손실이 될 것이다. 이 기록물은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제1차세계대전 이후 해체되고 오늘날의 중동이 형성되던 중요한 시기의 사회적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며 이런 점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기록유산이다.
이 기록물에는 또한 거트루드 벨이 중동 역사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여 한 활동과 20년 이상 자신의 활동과 일상에 관한 성찰을 담은 개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현대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그녀의 기억이 보존되지 않았다면 이 중요한 시기의 역사가 상당 부분 잊혀졌을 것이다. 이 기록물은 한 여성이 남긴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기억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일기, 부모님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 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성찰한 경험을 담은 거트루드 벨의 기록물이다. 거트루드 벨의 편지와 일기를 보면 벨이 자신의 여행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사회생활과 공식 활동 등에 대해서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사적인 기록물이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 사적인 문서가 공적인 서한이나 문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벨이 만난 사람들과 관련된 기록은 그녀가 없었다면 기록되지 않았을 인물과 장소에 관한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초기 자료부터 192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 이 자료로 인해 벨은 제1차세계대전과 종전 직후 시기에 일어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으로 자리매김될 만 하다. 그래서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그녀의 위상에 대한 기억과 함께 종전 후 이 여성이 중동의 형성과 관련하여 기여한 바에 관한 기억이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거트루드 벨 기록물’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의 중동 지역 연구를 위해 사용 가능한 1차 기록물 중 하나로서 세계여행 중에 찍은 사진 자료까지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으며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쳐 왔다. 때문에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 기록물을 귀중한 자료로 여기고 있다.
‘거트루드 벨 기록물’은 20세 초 유럽이나 중동과 같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큰 업적을 이룩한 벨의 역할을 보여주며, 그녀가 직접 참여했던 여성참정권 운동도 이 기록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기록물에 담겨 있는 거트루드 벨의 삶과 활동 가운데 상당 부분 (영국 정부에 제공한 공식 보고 포함)은 중동 역사 형성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거트루드 벨은 「영국 정부 백서: 메소포타미아 민간 정부와 메소포타미아의 아랍에 관한 검토 (Gertrude Bell was author of the British Government White Paper: Review of the Civil Administration of Mesopotamia)」라는 공식 문서의 작성자였다.
이 기록 문서들은 해당 역사에 대한 자료의 1차 자료이다. ‘거트루드 벨 기록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람들과 장소에 대한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물은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과거 이라크의 역사가 지금처럼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오늘날 유럽과 중동, 전 세계적으로 여러 사건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라 여겼던 시리아의 팔미라 신전들이 2015년에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중요성을 이 기록물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거트루드 벨 기록물’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있었던 사람들과 장소, 그리고 현대 중동의 형성에 관한 귀중한 정보로서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유네스코위원회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