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알바니아 국왕 아흐메트 조그 1세 / 조구 1세 (Zogu I 또는 ‘스컨데르베우 3세’, 1895 ~ 1961) 출생
조구 1세 (알: Zogu I 또는 ‘스컨데르베우 3세’, 1895년 10월 8일 ~ 1961년 4월 9일)는 알바니아의 국왕 (재위 1928년~1939년)으로, 총리 (재임 1922년 ~ 1924년)와 대통령 (재임 1925년 ~ 1928년)을 역임하였다.

– 메트 조그 1세 / 조구 1세 (Zogu I 또는 ‘스컨데르베우 3세’)
.출생: 1895년 10월 8일, Burgajet Castle
.사망: 1961년 4월 9일, 프랑스 쉬렌
.묘지: Mausoleum of the Albanian Royal Family
.국적: 알바니아
.부모: 사디예 토프타니, Jemal Pasha Zogolli
.배우자: Geraldine of Albania (1938년–1961년)
.자녀: Leka, Crown Prince of Albania
.종교: 이슬람교
알바니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그리고 근대 알바니아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왕.
더 나아가 알바니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
알바니아는 1946년에 군주제가 폐지, 공산화되었다.
대통령에 이어 국왕으로 재임하면서 알바니아의 근대화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권력 강화를 위해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결국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을 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1895년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알바니아 부렐 (Burrel) 근처 부르가예트 성에서 지방 영주였던 제말 파셔 조골리 (Xhemal Pashë Zogolli)와 사디예 톱타니 (Sadije Toptani)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코스탄티니예에서 교육받았으며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복형이자 장남인 젤랄 베이 조골리(Xhelal bej Zogolli)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장자 권리 상속을 거부하자 아흐메트 조구가 대신 집안을 이끌게 된다. 17살이 되던 이듬해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아흐메트 조구는 지방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조구는 자원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후 5년 동안 서유럽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아흐메트 조구는 서유럽의 생활 양식에 익숙해지게 되고 이는 이후 아흐메트 조구의 정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흐메트 조구는 종전 이후인 1919년 알바니아로 돌아온다.
- 정계 입문과 권력 장악
본격적으로 아흐메트 조구가 정계에 입문하던 시기 알바니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방마다 토착 영주들의 입김이 강해 사실상 수백개의 지역으로 쪼개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알바니아는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정치 체제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이러한 후진성은 알바니아의 정치 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불안정은 극심해서 1921년 7월부터 12월까지 불과 다섯 달 동안 다섯 번이나 내각이 바뀔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중재를 맡아야 할 인물인 빌헬름 비트 (Wilhelm zu Wied, Vilhelm Vidi) 대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일에 체류 중인 상황이었다.
한편 아흐메트 조구는 이때 북부 지지층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키우고 있었고 1920년부터 1년 동안 슈코더르 (Shkodër) 주지사, 1921년부터 1924년까지는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내무부 장관 시절인 1923년 총선이 실시되고 조구파가 자유주의 세력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흐메트 조구는 본격적으로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주된 경쟁자는 저명한 학자이자 알바니아 정교회를 재조직한 판 놀리 (Fan Noli, 1882–1965)였다.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놀리와 달리 북부 출신 무슬림 지주들을 대변하던 조구는 토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놀리와 극심한 충돌을 빚는다. 여기에 더해 조구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지배하던 코소보 지방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알바니아인들의 권리 보호를 제대로 부르짖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진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고 있었다. 결국 1924년 2월 23일 의사당 앞에서 급진파였던 아브니 루스테미 (Avni Rustemi, 1895 ~ 1924)의 주도로 아흐메트 조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조구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넉달 후인 6월 10일 아브니 루스테미가 조구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판 놀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익 쿠데타가 일어나 조구는 유고슬라비아로 쫓겨난다.
이렇게 조구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듯 했으나 판 놀리가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원 아래 조구는 불과 반년 후인 12월 13일 유고슬라비아군과 러시아 백군 잔류 세력을 데리고 다시 알바니아 본토로 들어온다. 결국 12월 24일 조구가 다시 수도 티라나를 장악함으로서 판 놀리 정권은 붕괴되고 판 놀리 세력은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다시 권력을 장악한 조구는 이듬해 비트 대공을 몰아낸다. 이후 알바니아를 공화정으로 전환시켰고 1월에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된다.

- 대통령 재임 시절
보수적인 무슬림 지주층이 주요 지지 기반인 조구였지만 그의 정부는 서유럽식 국가 모델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표로 사회 개혁이 추구 되었는데 이 시기 주요 업적이라면 1926년 2월 알바니아 최초의 근대적 지폐인 레크 (lek)화가 도입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인 식견을 가졌던데다 군주정을 폐지한 인물이었지만 조구는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를 추구했고 남은 정적들을 탄압하면서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한편 조구는 국경 지방의 마을 일부를 교환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고 거기에 더불어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티라나의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티라나 중심부에 이탈리아 양식의 근대식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관계 강화는 국왕 즉위 이후 더욱더 강화되는데 무솔리니는 10여년 후 알바니아를 병합함으로서 조구의 뒤통수를 친다.
- 국왕 즉위
1인 권력을 확립해나가고 있던 아흐메트 조구는 대통령 타이틀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바로 국왕이었다. 물론 1925년에 비트 대공의 군주직을 박탈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대통령보다는 국왕이 더 매력적인 직책이었던 것이었다 마침내 1928년 9월 1일 아흐메트 조구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알바니아 왕국을 세우고 알바니아인들의 왕 조구 1세 (Zogu I, Mbreti i Shqiptarëvet)라는 이름으로 국왕으로 즉위한다. 동시에 그는 알바니아 왕국군 (Ushtria Mbretërore Shqiptare)의 최고 원수 칭호를 수여받는다. 조구 1세는 자신이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컨데르베우 3세라는 즉위명도 역시 사용하게 된다.
국왕 즉위 이후 그는 절대 권력을 강화하면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영국과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국가는 일개 지방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혈통을 문제시하여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폴란드 제2공화국, 그리스 제2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상당수의 유럽 국가는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다. 특히 조구 1세의 알바니아 왕국은 역시 같은 알바니아계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 왕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 국왕 재위시절
국왕 재위 시절 조구 1세의 주요 정책은 세속주의와 정교분리의 강화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즉위 선서식 당시 조구 1세는 국가 통합을 위해 쿠란과 성서에 동시에 손을 얹고 즉위 선서를 하여 자신은 알바니아 최대의 소수 종교인 기독교 또한 알바니아 최대 종교이자 자신의 종교인 이슬람 못지않게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게다가 조구 1세는 유럽 국가들과의 종교적 괴리감을 줄이고 자신의 종교적 색채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아흐메트 1세 대신 자신의 성을 딴 조구 1세를 즉위명으로 선택했다. 이러한 행보는 실제 정책에도 반영되어 조구 1세는 1928년 샤리아를 폐지하고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체계에 기초한 민법 시스템을 도입한다. 경제적으로도 조구 1세는 경공업 육성을 꾀했고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도로, 교량 등 인프라 건설 사업과 전화 등 통신망 연결 사업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 발달은 매우 지지부진했고 아직도 알바니아의 주력 산업은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농업이었다. 게다가 전국적인 야학 설립 등 교육 진흥 정책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의 문맹률은 80%에 육박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 들어서서 전세계적인 대공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알바니아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당시 알바니아의 외채 대부분은 이탈리아가 갖고 있었고 인프라 확충 및 여러 건설 사업은 이탈리아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에 알바니아는 더욱더 이탈리아에 예속되어 가고 있었다. 조구 1세는 이탈리아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해야 했고 이제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등의 추축국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알바니아와 추축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1938년 4월 27일 열린 조구 1세와 헝가리의 귀족인 어포니 게럴디네 (Apponyi Géraldine)의 결혼식에서도 제대로 드러났다. 우선 게럴디네 왕비부터가 추축국인 헝가리의 귀족이었으며 당시 결혼식에는 갈레아초 치아노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는 조구 1세에게 메르세데스-벤츠 540K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알바니아와 추축국들의 우호적인 관계와 달리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자극받아 알바니아를 병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구 1세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는 여기에 대한 대비를 해두고 있었다.
- 이탈리아 침공과 망명
마침내 1939년 4월 7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조구 1세는 처음에는 군대로 대항하려 했으나 군대가 사실상 이탈리아군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소용없었고, 이전부터 이미 이탈리아 침공에 대비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조구 1세는 게럴디네 왕비와 생후 이틀된 레카 왕자를 데리고 왕족들과 함께 알바니아를 빠져나온다. 알바니아를 빠져나오기 직전 조구 1세는 티라나와 두러스 (Durrës)의 국립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빼낸다. 금괴를 챙긴 조구 1세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자 조구 1세는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오려 했으나 알바니아는 이미 엔베르 호자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한 뒤였기에 왕위 복귀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1946년 파루크 1세의 도움으로 이집트 왕국에 정착하게 된 조구 1세는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왕당파 게릴라를 여러 차례 알바니아 본토에 침투시켜 공산 정권을 붕괴시키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 냉전이 완전히 고착화되면서 서방의 도움도 더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전복시키면서 조구 1세와 그의 가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고 그들은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다.

- 사망
조구 1세는 평소에 애연가였고 왕위 복귀 좌절에 따른 실망감도 겹쳤기에 건강을 해치게 된다. 결국 조구 1세는 1961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 근교 쉬렌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
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망명 알바니아인 단체는 그의 아들 레카 왕자를 알바니아의 왕 레카 1세로 선포한다.
공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조구 1세의 가족은 스페인, 남아공 등지를 떠돌아다녀야 했고 2002년이 되어서야 알바니아에 돌아온다.
게럴디네 왕비는 2002년 티라나의 한 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타계했고 레카 왕자는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알바니아가 엉망이 되자 이 틈을 타서 왕정을 복구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추방당했다. 그나마 코소보 전쟁을 지지하고 도운 게 인정되어 알바니아로 돌아와 살게되어 조국에서나마 2011년 타계한다. 하지만, 레카 생전에 아버지 조구 1세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가, 그가 죽고 1년 뒤인 사후 51년 만인 2012년 11월 17일 알바니아 독립 100주년에 맞춰서 알바니아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행사는 알바니아 정부 주관으로 진행되었으며 조구 1세의 유해와 다른 왕족들의 유해는 티라나에 위치한 왕족 영묘에 안장된다.
○ 평가
알바니아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확립하는데에 기여했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 붕괴 이후 알바니아 내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가 확립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의 경우 알바니아가 유럽 사회에 제대로 편입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기에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독재자였지만, 사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도 하고 조구 1세의 뒤를 이은 엔베르 호자 공산 정권의 독재가 조구 1세의 그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무자비했기에 상대적으로 조구 1세의 독재에 대한 기억이 희석되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상을 건립하고 주요 거리와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등 조구 1세에 대한 기념 사업들을 알바니아 구 왕실과 협력하여 실시하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