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6월 29일,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 1825 ~ 1895) 별세
토머스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 PRS, 1825년 5월 4일 ~ 1895년 6월 29일)는 영국의 생물학자로, 불가지론 (不可知論, agnostic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
.출생: 1825년 5월 4일, 영국 런던 일링
.사망: 1895년 6월 29일, 영국 이스트본
.부모: 레이첼 위더스, 조지 헉슬리
.배우자: Henrietta Anne née Heathorn (1855 ~ )
.자녀: 레너드 헉슬리, 헨리 헉슬리, 에델 헉슬리, 마리온 콜리어, 매리언 헉슬리 콜리어 등
.손주: 올더스 헉슬리, 줄리언 헉슬리, 앤드루 헉슬리, 로렌스 콜리어, 마가렛 아놀드 헉슬리 등
.수상: 코플리 메달, 로열 메달, Wollaston Medal, Linnean Medal, Clarke Medal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여 다윈의 불독으로 알려져있으며 불가지론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이다.
또한 영국의 유명 소설가인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다.

○ 생애 및 활동
토머스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는 1825년 5월 4일, 잉글랜드의 일링에서 태어났다.
헉슬리의 아버지는 지역 일링 사립학교의 교사였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던 헉슬리는 초등교육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그래도 헉슬리는 결혼하여 런던에서 살고 있던 누나의 집에서 생활하며 왕성한 독서욕을 충족시킬 수 있었고, 과학은 물론 고전문학, 철학, 외국어 등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가며 공부했다.
어릴 때 기계 기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1845년 채링 크로스 병원 의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마친 헉슬리는 1846년 왕립 외과의 대학의 시험을 통과했다.
곧이어 남양 지역을 탐사하는 영국 군함 래틀스네이크호에 보조 외과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4년간 해상 근무를 하게 된다.
래틀스네이크호에서 근무하는 동안 헉슬리는 호주를 비롯한 남양 지역 해양 동물의 형태학, 비교해부학,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들을 정리하여 런던으로 보냈고, 1854년 《대양산의 히드로 충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찰스 다윈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그의 논문은 많은 공격을 받았으나, 그로 인하여 왕립 광산 학교의 교수·런던 대학의 시험 위원 등을 지냈다.
1883년 왕립 협회 회장이 되었다.
뛰어난 수필도 많이 발표한 그는 다윈의 학설을 널리 알리고,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 여러 방면에 크게 활약하였다.
저서에 《자연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등이 있다.
후에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의과대학이 되는 체어링 크로스 병원에서 공부하였으며, 모교의 수학과 건물인 헉슬리 빌딩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헉슬리의 아들 레너드 헉슬리와 손자 올더스 헉슬리 또한 저명한 작가이다.

- 다윈의 <종의 기원>을 둘러싼 토론회에서 월버포스 주교와 맞붙다
1860년 6월 30일 다윈의 <종의 기원>을 둘러싼 토론회에서 월버포스 주교와 맞붙었다.
이 책을 옹호하는 측에는 조지프 돌턴 후커와 토머스 헨리 헉슬리라는 동물학자가 있었다. 이날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며 기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윌버포스 주교가 일어나서 다윈과 진화론을 비판했다.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한 연설이었지만, 워낙 유창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설 도중에 윌버포스 주교는 진화론 옹호자들이 앉은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댁들의 주장에 따르면, 댁들의 조상 중에는 원숭이가 있다는 거로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 봅시다. 그 원숭이는 댁들의 할아버지 쪽 조상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 조상입니까?”
지금 와서 보면 어마어마한 모욕이자 악담 같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악의적 모독이 아니라 그저 선의의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주교의 이 말을 들은 헉슬리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전한다.
“하느님께서 저 양반을 내 손에 넘겨주셨군!”
헉슬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설에는 그가 한참 연설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원숭이가 내 조상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주교님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점이 더욱 부끄럽습니다.”
강연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고, 너무 놀란 나머지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
잠시 후, 비글호의 선장으로 일찍이 다윈과 함께 여행했던 로버트 피츠로이 제독이 진화론 반대 주장을 펼치면서 오로지 성경만이 진리라고 외쳤지만, 청중은 야유를 던졌다.
다음 연사인 후커는 윌버포스가 <종의 기원>을 읽은 적도 없고, 과학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점을 들어 조목조목 비판했다.
사실 이날 토론의 핵심은 후커의 조리 있는 논박이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윌버포스에 대한 헉슬리의 반박만이 이미 뚜렷이 각인된 다음이었다.
오늘날은 과학사와 지성사 모두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논쟁 직후에 그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즉 윌버포스의 연설이 더 훌륭했으며, 헉슬리는 무례한 인신공격을 가했다고 본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윌버포스는 말재주를 부리다 낭패를 당했으며, 헉슬리는 뛰어난 재치로 상대방을 물리쳤다는 시각은 그로부터 40여 년 뒤에야 처음 나왔고, 지금은 일종의 정설로 여겨진다.
이 논쟁은 헉슬리의 경력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과학의 옹호자이며 대변자로서, 그리고 열정과 재치를 겸비한 논객으로서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독학으로 의사가 되고, 논쟁으로 ‘다윈의 불독’이 되다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1825년 5월 4일, 영국 미들섹스 주 일링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8세에 공립학교에 입학해 10세에 자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이후 독학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쌓았다. 18세에 의사 자격증을 딴 그는 한동안 개업의로 일하다가 해군에 입대했으며, 1846년에 남태평양 탐사선 래틀스네이크 호의 선의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이때의 여러 가지 경험과 독서는 훗날 그의 경력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오스트레일리아 체류 중에는 미래의 아내인 헨리에타 히손을 만나지만, 아직 직업이나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려 8년간 결혼을 미루어야 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헉슬리는 항해 도중에 발견한 해양생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동물학자로 명성을 얻고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된다. 하지만 당시로선 과학자로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1854년에 헉슬리는 국립광산학교의 교수가 되고 마침내 결혼에도 성공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 접하고는 “난 바보야! 이렇게 간단한 생각을 왜 못했을까?”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크게 감탄했고, 이후 다윈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저서인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 (1863)는 난해한 <종의 기원>의 쉬운 해설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윌버포스 주교와의 유명한 논쟁 이후,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헉슬리는 종교에 대한 회의적인 발언으로 악명이 높았던 X 클럽이라는 모임의 회원으로도 활동했고, 종교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지론자’ (agnostic)라는 말을 창안하기도 했지만, 학교 교육에서 성서를 사용하는 것에는 찬성하는 실용주의자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빈민 아동에 대한 무상 교육 법안 제정이며, 각급 학교에서의 과학 교과목 채택 등의 교육 행정에도 관여했고, 여성과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중년에 들어서 종종 우울증으로 고생한 헉슬리는 환갑이 되기 전에 이가 몽땅 빠져버렸다.
“과학자가 60세가 되면 모두 교수대로 보내야 마땅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그는 교수직과 왕립 학회 회장직을 모두 내놓고 은퇴 생활에 들어갔다.
그런데 영국 수상을 역임한 귀족 정치가 글래드스턴이 어느 잡지에 종교를 두둔하고 과학을 비난하는 글을 쓰자, 특유의 싸움닭 기질이 발동한 헉슬리는 병석을 박차고 나와 또다시 논쟁을 시작했다.
“자연과학에 반대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단적이며 케케묵은 관념이거나, 또는 종교 자체를 거의 말살하려는 사악한 철학에 불과하다.”
평생 과학과 과학적 사고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던 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1895년에 사망했다.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헉슬리 가문’은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및 문인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손자인 줄리언 S. 헉슬리 (1887 ~ 1975)는 저명한 생물학자이며 유네스코의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줄리언의 동생 올더스 L. 헉슬리 (1894 ~ 1963)는 <멋진 신세계>를 비롯한 여러 권의 걸작 소설을 펴낸 작가로 유명하다. 이들의 사촌인 앤드류 F. 헉슬리 (1917년생)는 저명한 생리학자로 196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신사과학자’에서 ‘과학지식인’을 거쳐 ‘과학자’의 시대를 예고하다
오늘날 토머스 헉슬리는 ‘과학자’보다는 오히려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된다.
당대에는 동물학과 고생물학 분야에서 주목 받는 연구를 내놓기도 했지만, 그의 재능은 과학 및 과학 교육의 대중화 쪽에서 더욱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도전적이었던 헉슬리의 태도는 그 당시의 과학계에서는 도리어 반감을 자아냈다.
심지어 다윈도 헉슬리와는 거리를 두었다.
“논쟁을 피하게. 소모적이기만 하니까.” 찰스 라이엘의 이런 충고를 금과옥조로 여기던 다윈으로선 비록 자기편이라 하더라도 천성이 싸움닭인 헉슬리의 태도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헉슬리는 다윈의 절대적인 지지자이긴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성격부터 정반대였다. 아울러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과 헉슬리가 대중화시킨 진
화론은 구체적인 맥락에서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가령 다윈은 점진적인 변이를 지지한 반면 헉슬리는 오히려 돌연변이를 지지했는데, 다윈은 헉슬리의 이런 태도가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실망했다.
일각에서는 헉슬리가 본인의 과학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윈주의를 원용했을 뿐이지, 그는 평생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도리어 일종의 유사-다윈주의를 만들어낸 셈이라는 비판도 있다.
헉슬리는 ‘과학자’ (scientist)라는 명칭 대신 ‘과학지식인’ (man of science)라는 명칭을 선호했다. 당시의 과학자는 대부분 넉넉한 집안 출신의 학벌 좋은 신사들이었고, 다윈 역시 부유한 신사이며 아마추어 과학자였다.
자수성가한 전문인 과학자인 헉슬리가 당시로선 오히려 예외적인 인물이었고, 과학계에 만연한 체면 따지기를 정면으로 비판한 그의 태도는 종종 무례하다는 이유로 적잖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헉슬리로 대표되는 ‘과학지식인’은 과학 연구를 고급 취미로 생각했던 ‘신사과학자’의 시대와 오늘날과 같은 전문인 ‘과학자’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헉슬리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하나로 명성을 누리던 리처드 오언과 견원지간이었다. 비교해부학자이며, ‘공룡’ (dinosaur)이라는 단어를 고안한 오언은 권력층에 밀착해 각종 특혜를 얻었으며, 막판까지도 다윈과 진화론에 극구 반대했다 (일각에서는 윌버포스 주교가 유명한 토론회에 참석하기 전에 오언의 ‘코치’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헉슬리와 오언의 위상이 과거와는 정반대가 되었다. 헉슬리는 다윈과 함께 진화론의 대표자로 손꼽히며 존경 받는 반면, 오언은 어딜 가나 진화론에 반대했다는 크나큰 오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오언의 가장 큰 공적 가운데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자연사 분과를 별도의 건물로 독립시킨 것인데, 이 새로운 박물관이 현재의 런던 자연사박물관이다. 오늘날 이 박물관의 한쪽에는 다윈과 헉슬리의 모습이 커다란 대리석상으로 세워져 있는 반면, 초대 관장 오언의 모습은 작은 청동상으로 세워져 있을 뿐이다.

- 영국의 ‘귤’이 중국에 건너와 ‘탱자’로 변한 사연
1893년 5월 18일,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로마니즈 강연에서 ‘진화와 윤리’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대중 강연을 했다.
이듬해인 1894년에 그는 이때의 강연문에 상당한 분량의 서론을 덧붙여 <진화와 윤리>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다.
이 책에서 헉슬리는 생존에 성공하는 ‘적자’가 항상 옳거나 좋지는 않다고 지적하며, 이른바 ‘진화 = 진보 = 좋은 것’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오해에 일침을 놓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야말로 방향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써, 오늘날 진화론에 관한 오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적 다윈주의 특유의 ‘진보’나 ‘발전’의 개념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중국의 엄복 (嚴復, 1854-1921)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에 나름대로의 해설을 덧붙여 <천연론 (天演論)>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당시로선 최신의 서구 과학 사상을 소개한 이 책은 강유위, 양계초, 노신, 호적, 모택동 등도 애독할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역설은 헉슬리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당시의 중국 독자들은 <천연론>을 사회적 다윈주의에 대한 개론서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진화론이 곧 약육강식의 자연적 이치와 동의어라고 이해했으며, 따라서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국제 정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이 하루속히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귤이 회수를 넘어와 탱자로 변한 격이다.
○ 진화와 윤리
헉슬리는 인간의 윤리가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은 진화가 이끄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우주의 진화를 거스르는 현대 문명의 지나친 경쟁 구도에 경종을 울릴 만한 책이다.
헉슬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 문명은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 우주 진화를 거스르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한 진화 과정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경쟁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을 자제하면서 윤리적 삶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헉슬리의 강연은 강낭콩 줄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탐험을 감행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콩 줄기를 따라 소년이 올라가 본 하늘 위의 세상은 지상과 똑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일면 지상과 같은 세계였다.
하지만 거대한 강낭콩이 만들어낸 하늘 위 세계의 풍경은 이상스럽도록 새로웠다. 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누구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을 만큼 새로웠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은 콩 역시 잎, 줄기, 뿌리, 꽃 등의 복잡하고 섬세한 기관들과 그 작용들의 집합체인, 콩은 콩일 뿐이었다. 이 섬세한 유기체가 하늘을 뒤덮으며 번성하기 위해서는 주변 식물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이 놀라운 생명체는 분해되어 사라지고, 남겨진 씨앗이 다시 싹터 어린 줄기로 자라면서 우주의 과정이 계속될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 역시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을, 순환하는 우주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인간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도 성공적인 투쟁 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진보란 우주의 진화와는 반대되는 과정을, 즉 자신이 타고 오른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태도를 갖추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동물적인 투쟁을 죄악시한다. 문명사회에서 사람들은 심지어 적자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듯싶은 자의 목을 매달기까지 한다.
현대는 소년이 구름 위에서 보았던 문명 세계다. 헉슬리는 모든 청중들이 거의 외우고 있을 테니슨의 가슴을 울리는 시 「율리시스」로 강연을 마감한다.
현대는 호머의 시대 사람들처럼 악이든 선이든 그대로 맞대면하며 살아가는 원시적 유아기가 아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불교 철학자들처럼 악으로부터 도피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아기도 아니다. 과학으로 무장한 성년기의 문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모든 주어진 자연 조건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언젠가는 거역할 수 없는 파도가 뱃전의 사람들을 심연으로 쓸어가듯이 우주의 과정이 인류 문명을 쓸어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악을 구축하면서 문명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성인인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갖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철학자들은 헉슬리가 이 강연을 통해서 사실과 당위 사이의 논쟁에 있어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개념을 확립하는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 중반의 사회학자들은 헉슬리가 이 강연에서 스펜서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만연해 있던 사회다윈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인문학자들은 헉슬리가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세계관을 인간사로 확장해 가는 ‘근대화’의 흐름을 거슬러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헉슬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현대 문명은 윤리적 세계를 지향하면서 우주 진화를 거스르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통한 진화 과정은 여전히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경쟁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을 자제하면서 윤리적 삶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수상
Royal Medal (1852)
Wollaston Medal (1876)
Clarke Medal (1880)
Copley Medal (1888)
Linnean Medal (1890)
Hayden Memorial Geological Award (1893)
○ 저서
논문《대양산의 히드로 충류》(1854)와 저서에 《자연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로마니스 강연》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