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4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의 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1894 ~ 1918) 별세
가브릴로 프린치프 (보: Gavrilo Princip, 세: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 Gavrilo Princip, 1894년 7월 25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블랴이 ~ 1918년 4월 28일 체코 테레진)는 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목표로 삼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출생: 189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오블랴이(Obljaj), (現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제10주 보산스코그라호보)
.사망: 1918년 4월 28일 (23세), 보헤미아 왕국 테레진 교도소
.묘지: 사라예보 Vidovdan Heroes Chapel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경력: 사라예보 사건의 당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 부부 암살
.신체: 182cm, 40k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활동가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사라예보 사건의 주범이다. 사라예보 사건 직후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고 징역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자신이 벌인 일이 세계 대전을 일으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책임은 부정했다. 그는 전쟁으로 가족과 지인들을 잃은 주변인들로부터 오는 비난과 폭행에 크게 상심하다 1918년 교도소 복역 중 향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산스코그라호보 인근에 위치한 오블랴이 마을에서 페타르 프린치프 (Petar Princip)와 마리야 프린치프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린치프에게는 9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6명의 형제가 유아 시절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는 병약한 프린치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이름을 딴 “가브릴로” (Gavril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린치프의 부모는 무슬림 대지주 밑에서 일하던 빈농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페타르는 청년 시절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 이후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스니아 북서부에서 달마티아로 물자를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1903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낸 프린치프는 교장으로부터 세르비아어 서사시를 선물로 받았다. 13세 시절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는 형 요반 (Jovan)의 요구에 따라 사라예보로 이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요반은 동생을 사관학교로 입학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요반은 삼림 벌채 공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동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1910년에 프린치프는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김나지움에 진학했다. 프린치프는 1910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마리얀 바레샤닌 (Marijan Varešanin)의 암살을 시도한 혐의로 처형된 보그단 제라이치 (Bogdan Žerajić)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
프린치프는 1911년부터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단체는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주의 운동을 주장했다.
남슬라브주의 운동은 187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이 주도하였으며 남슬라브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878년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설립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프린치프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최한 혐의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했다.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서 280km 정도 떨어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도보로 횡단했다. 프린치프는 흑수단의 게릴라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키가 기준에 미달해서 거부당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프린치프는 사라예보에 있던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프린치프는 청년 세르비아 대원 15명과 함께 훈련소에서 암살, 폭탄 제조 훈련을 받았고, 나중에 베오그라드로 귀환하게 된다.
- 사라예보 사건과 사망
흑수단 대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인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그의 아내인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4년 6월 28일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프린치프의 동료였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차량 밑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지면서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수류탄을 던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린치프는 라틴 교 인근에 위치한 거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프린치프는 사이안화물 성분이 들어간 캡슐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독약이 불량품이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뒤를 이어 권총 자살을 시도했지만 발포하기 직전에 군중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 당국에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사건의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으로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범행 당시에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20년을 선고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전에 테레진 감옥에서 23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 사후 및 평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민족자결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에 따라 가브릴로의 뜻대로 남슬라브 민족들을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태어났다.
그러나 말이 같은 남슬라브 계통이기는 해도 수백년 동안 분열되어 서로 이질적인 정체성과 종교를 갖고 있는 민족들이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각 민족 간의 갈등을 제어하지 못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노력 아래 통합되는 듯 했으나 티토 사후 세르비아인의 권력 독점과 타 민족 차별은 슬로베니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코소보-북마케도니아가 각각 독립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집단 학살을 거쳐 유고슬라비아는 분열되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유고슬라비아의 이념적 근거가 된 대 (大) 세르비아주의를 숭배한 인물이고 따라서 전간기와 냉전기에는 유고슬라비아 혹은 세르비아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대 (大) 세르비아주의와 소수민족의 민족주의가 충돌해 결국 파국이 발발했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인종청소하면서까지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 (大) 세르비아주의가 몰락하면서 현대 구 (舊)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가브릴로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다.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대학살을 경험한 보스니아는 절대로 가브릴로를 미화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 서구에서도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비극을 초래한 인물로 평가한다.
참고로 유럽에서 20세기 역사를 두고 종종 하는 농담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모든 게 완전히 바뀌었지만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는 세르비아에서도 비판적으로 바뀌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프린치프가 추종한 대세르비아주의가 실패한 이념이라는 진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민간과 정부를 막론하고 다르지 않은데 단적인 예로 2015년에는 정부에서 그의 동상을 세웠다. 기념식에 참석한 세르비아 대통령 토미슬라브 니콜리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영웅이었고, 그는 해방이라는 개념의 상징이었습니다”라고 수백 명의 시민들 앞에서 말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2014년 세르비아는 그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얼굴이 새겨진 은화를 주조하고 정부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세르비아 정교회도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선포했다. 고위급 성직자 암필로히예 (Амфилохије) 대주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단지 그의 자유와 국민들을 옹호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세르비아에게 2등 시민 취급받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테러리스트로 보고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당연하겠지만 굉장히 평가가 박하다 못해 나라를 끝장낸 전범이라는 비난도 많이 나온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