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8월 2일,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워런 G.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865 ~ 1923) 타계
워런 개메일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865년 11월 2일 ~ 1923년 8월 2일)은 미국의 29번째 (제34대) 대통령 (1921 ~ 23)이다. 그리고 임기 중 사망한 여섯번째 대통령이다.

– 워런 개메일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출생: 1865년 11월 2일, 미국 오하이오 주 코시카 (現 미국 오하이오 주 블루밍그로브)
.사망: 1923년 8월 2일 (5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배우자: 플로렌스 클링 하딩
.학력: 오하이오 센트랄 대학교
.정당: 공화당
.종교: 침례교
*제29대 미국 대통령
.재임: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전임: 우드로 윌슨(제28대) / 후임: 캘빈 쿨리지(제30대)
미국의 제29대 대통령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그 평가가 절대적으로 낮은 인물이다.
정치와 사생활을 막론하는 무능한 행적으로 인하여 미국인들이 가장 안 좋아하는 대통령을 조사할 때마다 절대적 1위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에선 꼴찌를 면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며 이 직책을 맡지 않았어야 했소.” _ 친구이자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이였던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에게 보낸 편지 中

○ 생애 및 활동
1865년 오하이오 주 코시카(Corsica, 현 블루밍그로브 · Blooming Grove)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하이오 센트랄 대학교에서 학업했다.
변호사 시험에 떨어진 후 미국 오하이오주 소도시 매리언 (Marion)의 한 신문 편집장으로 일하던 워런 하딩은 26세에 만난 5살 연상의 플로런스 메이블 클링 (Florence Mabel Kling)과 결혼한 후 인생이 바뀌었다.
그녀는 오하이오주에서 이름난 기업가의 딸로 정치적 야망이 매우 컸는데 그런 부인의 영향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딩 부부는 자식이 없었다.

- 대통령이 되기 전
오하이오주 정계에서 탁월한 웅변 능력으로 주목을 받는데 성공한 하딩은 오하이오 정계의 거물인 해리 미케이자 도어티 (Harry Micajah Daugherty, 1860 ~ 1941)의 후원으로 오하이오주 부지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까지 당선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그저 무명 의원이었다.
그는 1889년 공화당 주상원에 선출되었고, 2년 후에도 재선되었다. 그는 1903년 부지사에 선출되었으나 1910년 주지사 선거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주립 정계에 있는 동안에 하딩은 영리한 정치적 전략가 해리 M. 도허티의 현신적인 우정을 얻었다. 몇년 후에 도허티는 하딩을 대통령이 되는 데 열심히 일하였다.
1912년 하딩은 공화당 국립 회의에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두 번째 임기 기간을 위하여 후보로 지명하는 데 선택되었다. 이 명예로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후보 지명보다 더 위대한 감동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1916년 국립 회의에서 하딩은 기조 연설을 하고 영구적인 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사실 본인도 대통령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917년 공화당에 복당한 후 재출마를 고려할 때 그에게 접근한 하딩은 루스벨트의 눈에 들어 부통령 러닝메이트를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1919년에 루스벨트 마져 사망한다. 아마 루스벨트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그는 평범한 부통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 대통령 당선 과정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각종 조사 및 예측에 따르면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실책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공화당의 집권이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화당 내부에서는 당내 파벌로 결정이 나지 않자 당원 투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때 9번이나 투표를 했는데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계파 대표들이 모두 합의해서 적당히 뽑아준 사람이 하딩이었다. 이 결정이 날 때 하도 사람들이 시가를 펴 그 방이 시가 연기로 자욱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Smoke-filled room’ (시가 연기로 꽉 찬 방)으로 유명하다. 부통령 후보는 첫판에 캘빈 쿨리지로 결정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아무리 투표를 해도 결판이 안 났던 것이다.
하딩은 처음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오지 않으려 했으나 당내 계파 중진들에 의해 “들러리” 역할로라도 당내 경선에 출마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하딩이 출마를 했으며 원래 경선 캠프도 차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시 공화당 경선에서 최유력 후보는 레너드 우드 (Leonard Wood, 1860 ~ 1927) 장군, 프랭크 오런 라우든 (Frank Orren Lowden, 1861 ~ 1943) 일리노이 주지사, 하이럼 존슨 (Hiram Johnson, 1866 ~ 1945) 상원의원 3명이었다. 계속 투표를 했는데도 우드, 라우든, 존슨 중 그 누구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자 계파 수장들이 모여서 최하위였던 하딩을 뽑기로 하고 우드 쪽 대의원들 (사실상 군인 표)을 제외한 나머지 대의원들이 모조리 하딩을 찍어서 갑자기 8차 투표에서 하딩이 선두로 치고 나오고 9차 때 나머지 후보들이 사퇴하는 형식으로 하딩이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하딩-쿨리지 조의 상대 후보는 민주당 제임스 M. 콕스-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였다. 1920년 대선 출마자 중에서 콕스를 뺀 하딩, 쿨리지,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직을 해봤다. 사실 전당대회 혼란은 민주당이 더 했는데, 19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대회는 무려 44번이나 투표를 한 끝에 콕스로 결정났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고작 9번 투표였는데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는 루스벨트로 빨리 당첨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양보하는 사람이 없어서 투표가 반복됐다. 원래 민주당 후보로는 우드로 윌슨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기브스 매커두 (William Gibbs McAdoo, 1863 ~ 1941)가 가장 유력했으나 38차 투표에서 콕스로 역전되어 콕스가 후보로 뽑혔다.
하딩의 선거공약이 “정상 정치로의 복귀” (Return to Normalcy)였다. 윌슨의 다소 개방적인 외교정책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을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이야기. 대표적인 고립주의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복귀한 나머지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1920년 대선은 콕스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 vs 하딩의 미국 우선 번영 정책에서 유권자들이 미국 우선 번영 정책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20년대 내내 미국은 아메리카니즘의 시대로 미친듯한 경기호황과 주식 폭등을 겪는다.
하딩은 1920년 대선에서 무려 1천 6백만표 (60.3%)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는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먼로 이후 최대이며, 바로 직전 윌슨 대통령의 표 (약 9백만표)의 1.7배로, 이 기록은 60.8%를 받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36년)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후엔 린든 B. 존슨의 61.1% (1964년), 리처드 닉슨의 60.7% (1972년) 등의 기록이 있지만 이건 모두 신임받은 재선 대통령으로서의 득표였다. 즉, 초선 인물에게 몰아준 경우는 이 경우가 유일하다.
하딩의 1920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신규 유권자가 생긴 대선이기도 하다. 바로 수정헌법 19조로 주어진 여성 참정권 때문이다. 유권자가 3,009만명에서 5,440만명으로 1.8배, 거의 배로 증가했다. 더불어 1920년 첫 라디오 정규방송이 1920년 선거 개표방송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미국 미디어 역사에 의외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 사망
농업 경제의 대공황이 1922년의 선거에서 공화당원들이 나쁜 실수를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23년 6월 하딩은 담화 순회를 만들어 자신의 행정부에서 신임을 재생하는 일을 찾았다.
부인과 큰 공무적 당과 함께 그는 국가를 가로질러 캐나다와 알래스카를 방문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워싱턴으로부터 긴 전갈이 하딩의 통로를 도달하였다. 그 일은 석유 임대들의 상원적 투자에 관한 소식을 방해하고 말았다.
기자들은 우울해진 하딩이 자신의 친구들에 의하여 배신당할 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냐에 그들에게 의문하였다.
자신의 기차가 시애틀을 지나갈 때 하딩은 식중독에 걸려 병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행은 의사들이 하딩은 폐렴에 걸렸다고 보고한 샌프란시스코에서 멈췄다.
하딩은 거기서 8월 2일에 58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체가 워싱턴으로 돌아오면서 수많은 애도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유해는 매리언으로 옮겨졌으며, 플로렌스 여사도 1924년 11월 21일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암살설도 있었으나, 훗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 평가
무능력한데다 성격도 유약했고, 선출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내 파벌의 안배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각 파벌에서 보내온 장관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부하들도 똑같이 무능한데다 부패해서 임기 내내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하딩의 친구들로 구성된 “오하이오 갱”들의 부패 때문에 죽을 때까지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재향군인회 (Veterans’ Bureau) 회장 찰스 로버트 포브스 (Charles Robert Forbes, 1878 ~ 1952)가 보훈병원 건립 예산을 횡령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 원래 재무부 주관인 보훈병원 건립권을 미국 재향 군인회 (American Legion)을 이용해 압력을 넣어 재향군인회로 이관시킨 뒤 비리를 저지르다 걸린 것이다. 비리 사실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자 포브스는 사직서를 낸 후 유럽으로 도주했다.
법무부 장관 해리 M. 도어티 (Harry M. Daugherty)가 1차대전 당시 압류한 미국 내 독일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부정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다만 이 사건은 하딩의 임기 이후에 발생했고, 하딩 재임 시절에는 티포트 돔 스캔들에 연루되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하딩 자신도 자신이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능력이나 전망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생활도 나빠서 집권여당인 공화당이 주도해서 금주법을 만들어놓고도 정작 자신은 백악관에서 수시로 술을 마셨다. 심지어는 금주법으로 압류한 밀주를 그대로 백악관으로 가져와서 마셨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리고 하딩의 취미가 술 먹고 포커치는거라 백악관에서 수시로 큰 도박판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