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9월 9일, 독일의 정치인이자 기업인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Karl Friedrich von Siemens, 1872 ~ 1941) 별세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Karl Friedrich von Siemens, 1872년 9월 5일 ~ 1941년 9월 9일)는 독일의 기업가이다.
전기 공업계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독일 지멘스 가문의 일원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Karl Friedrich von Siemens)
.출생: 1872년 9월 5일, 독일 베를린
.사망: 1941년 9월 9일, 독일 베를린
.조부모: 크리스티안 페르디난트 지멘스, 엘레오노르 다이히만
.부모: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 안토니 지멘스
.형제자매: Hertha Viktoria Ottilie von Siemens
.자녀: 에른스트 폰 지멘스
.사촌: 마리 엘리자베스 아그네스 폰 지멘스, 마리 폰 그라에베니츠, 샬롯 소피 마틸드 폰 지멘스
1919년 이래 독일의 지멘스 본사 사장을 했다.
1920~24년 독일 민주당 국회 의원을 역임 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23~33년 당시 임시 경제 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지멘스 기업의 창립자 베르너 폰 지멘스, 발명 DNA로 다이얼 전신기 발명
독일의 대기업 지멘스는 산업재, 에너지, 헬스케어 등 총 15개의 서로 다른 사업분야를 거느리고 있다.
세계적 첨단기술업체라는 위상은 지멘스 창립가문의 선천적 ‘발명DNA’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기업들이 많은 독일에서도 지멘스 가문은 특출난 경영자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베르너 폰 지멘스부터 남달랐다.
베르너 폰 지멘스는 1816년 독일 하노버 인근 렌테(Lenthe) 지역의 가난한 농가에서 10명의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난 탓에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가 선택한 길은 군대였다. 포병학교 사관후보생이 된 베르너는 탄도학 수학 물리학 등의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1846년 베르너는 장거리 무선전신에 쓰일 수 있는 다이얼 전신기를 발명한다.
청년 장교는 이 발명을 계기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다. 1847년 베르너는 기계공인 게오르그 할스케와 동업해 ‘지멘스-할스케 전신 건설회사’를 세웠다.
이후 지멘스의 사업을 확장한 것은 창업자의 두 동생 빌헬름과 칼이었다. 빌헬름이 강철을 만드는 데 쓰이는 ‘평로법’을 개발해 지멘스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면 칼은 러시아 전신망 사업을 수주하는 등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지멘스를 확장했다.
지멘스는 그러나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위기를 맞는다. 독일이 패전하면서 지멘스-할스케사는 영국과 러시아 등 해외 자산을 대부분 몰수당했다.

위기의 순간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창업주 베르너 폰 지멘스가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아들 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였다.
1차대전으로 지멘스는 자기자본의 40%가량을 잃었으며 해외 자산의 대부분과 특허권도 상실했다.
손에 든 것이 거의 없었던 칼 프리드리히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스스로를 ‘폭풍우 속의 선장’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는 날서린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모든 사업부문을 지멘스-할스케사와 지멘스-슈커트사라는 두 개의 지주회사 체제로 정비했다.
여기에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를 통한 지멘스 가족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다지며 지멘스를 성장궤도로 복귀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추슬러 지멘스라는 배를 다시금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키워내야 했기 때문이다.
1927년 독일 국가철도회사의 경영이사회 의장을 맡았으며 1931년에는 독일 전기기술협회의 초대 의장을 맡기도 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의 등장은 지멘스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 왔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지멘스는 전쟁물자 공급에 나서야 했다.
민간용 제품 생산이 전면 금지됐고 전쟁물자 생산만 가능했다. 전쟁 기간 연합군의 폭격과 이에 따른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후 지멘스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연합군은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기에 나치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판단해 지멘스를 비롯한 독일의 주요 대기업들을 해체하려고 했다.

칼 프리드리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합군측을 설득하며 그룹 해체를 막기 위해 나섰다.
결국 지멘스 해체계획은 1951년 철회됐다.
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의 뒤를 이은 아들 에른스트 폰 지멘스가 지멘스를 맡기 시작한 1966년 이후 현 지배구조의 골격을 갖게 됐다.
독일 정부가 대기업 집단에 속하는 회사들 간의 결합규제를 이전보다 강화하도록 증권법을 개정하면서 지멘스의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떠올랐다.
당시 지멘스 가문은 지멘스-할스케, 지멘스-슈커트, 지멘스-라이니거 등 세 개의 지주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세 지주회사의 공동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던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지주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해 그룹 형태로 지멘스를 재조직했다.
이어 유능한 전문 경영인들을 등용해 회사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1971년 에른스트의 뒤를 이어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은 피터 폰 지멘스도 1981년 의장직을 내놓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멘스 가문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피터 폰 지멘스의 조카이자 동명이인인 피터 폰 지멘스가 1981년부터 5세대 가족의 자격으로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지멘스 가문의 보유 지분은 5.5%로 최대주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0명에 달하는 지멘스 가족들이 나눠 보유하고 있는 이 지분은 현재 ‘지멘스 vSV’라는 신탁회사를 통해 위탁 관리되고 있다.

○ 지멘스 “순간의 이익위해 미래를 팔지 않겠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기업들이 많은 독일에서도 지멘스 가문은 특출난 경영자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베르너 폰 지멘스부터가 그렇다. 그는 세계 전기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과학자요 발명가였다. 동시에 베르너는 “순간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팔지 않겠다”는 경영철학을 통해 기업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단기적인 이윤보다는 기술개발에 주력해야 하고,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장기적인 성장의 선결과제로 꼽는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미 오래 전에 실천한 것이다.
베르너 이후에도 지멘스 가족 출신의 기업인들은 유럽의 산업과 경제를 이끄는 풍운아들로 활약했다.
지멘스가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베르너와 그 후손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창업 1세 : 3형제의 역할 조화
지멘스-할스케사(社)를 설립한 이는 베르너였지만 사실 지멘스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주인공은 그의 두 동생 빌헬름과 칼이었다.
사업에는 같이 참여했지만 세 형제의 기질은 사뭇 달랐다.
맏형 베르너가 카리스마를 지닌 사업가였다면 빌헬름은 과학자였다.
빌헬름은 1844년부터 영국에 거주하며 전선 개발에 매달렸다.
1858년 지멘스-할스케사의 영국 자회사가 설립되자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과학자였다.
빌헬름이 개발한 대표적인 것은 지금도 강철을 만드는 데 쓰이는 ‘평로법’.그가 발명한 평로법으로 산업용 기계와 철도 레일은 물론 에펠탑에 들어가는 강철이 만들어졌다.
베르너의 또 다른 동생 칼은 형들과는 달리 ‘장사꾼’ 기질이 농후했다.
1853년부터 러시아 사업권을 형에게서 위임받은 칼은 특유의 수완으로 러시아 전역을 연결하는 전신망 사업을 따냈다.
1888년 베르너는 전신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는다.
이에 앞서 동생 빌헤름은 1883년 사망한 직후 귀족 작위를,칼은 189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 창업 2세 : 최고의 기업인으로 추앙받다
베르너의 세 아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이는 막내 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였다.
베르너와 둘째부인 안토니에 사이에서 태어난 칼 프리드리히의 어릴 적 애칭은 ‘칼리’였다.
어린 칼리는 이복형인 아놀드와 빌헬름에 비해 재능이 떨어져 보였다.
아버지 베르너 폰 지멘스가 “확실히 저 아이는 학업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걱정했을 정도다.
그러나 1919년 두 형이 죽고 난 뒤 경영권을 이어받은 칼 프리드리히는 당대 ‘독일 최고의 기업가’로 추앙받으며 뒤늦게 기업가적 소질을 발휘한다.
그는 스스로를 ‘폭풍우 속의 선장’이라고 불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추슬러 지멘스라는 배를 다시금 세계적인 전자기업으로 키워내야 했기 때문이다.
1927년 독일 국가철도회사의 경영이사회 의장을 맡았으며 1931년에는 독일 전기기술협회의 초대 의장을 맡기도 했다.
정치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1919년 독일 제국의회의 대표로 선출됐다.
1930년대 초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득세하자 칼 프리드리히는 “급진적인 나치가 세력을 키우면 키울수록 독일 경제는 위기에 맞닥뜨릴 것이다”라고 독일 경제계에 경고하기도 했다.
- 창업 3세 : 단일 그룹으로
지멘스 그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데에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의 역할이 컸다.
칼 프리드리히의 아들이자 창업주 베르너 폰 지멘스의 손자인 에른스트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지멘스를 실질적으로 재건해낸 경영자였다.
그의 영도 아래 종전까지 3개의 독립적인 지주회사로 운영 중이던 지멘스는 단일 그룹으로 통합한다.
동시에 그는 가족기업의 오랜 전통을 바꿔 전문경영인 체제를 뿌리내리는 데도 일조했다.
에른스트는 경영자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활동 후원가로도 유명하다.
1958년 그는 젊은 과학도를 지원하기 위해 ‘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재단’을 설립했다.
197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상을 제정해 음악가들을 후원했으며,1983년에는 예술후원재단을 만들었다.
에른스트의 이 같은 열정은 현재 독일 내에서 지멘스를 ‘사회적 책임을 가장 잘 실천하는 기업’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