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2월 19일, 프랑스 연합군과 호치민군 사이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The First Indochina War) / 베트남 독립 전쟁 (1946 ~ 1954) 발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The First Indochina War) 또는 베트남 독립 전쟁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프랑스와 비엣민 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 (the Franco-Vietminh War) 등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를 상대로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연합군은 베트남 문제를 중화민국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북쪽에서는 공산군이 내려오고 남쪽에서는 지도자 공백 상태라 혼란이 계속되었으므로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어 재무장시킨 데 따라 북 (北)은 비엣민이, 남 (南)은 프랑스가 장악하여 8년 동안 전쟁이 계속된 것이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와의 국경부분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한 이후,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게 되며, 1954년까지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기간으로 간주한다. 전쟁이 끝나고 북에는 호찌민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고, 남에는 괴뢰황제 바오 다이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전투가 북베트남 통킹에서 벌어졌지만, 충돌은 전국으로 이어졌고 이웃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되었다.

○ 배경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는 19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는 응우옌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파병하여 제1차 후에 조약, 제2차 후에 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지배 하에서 무거운 세금과 부역, 소금, 알코올, 아편의 전매 등의 착취를 받았다. 저항 운동에 참여한 자 다수는 비밀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사형을 받았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경제적인 수탈뿐 아니라 전통 문화를 파괴당하고 프랑스 문화를 강요당하는 등 전형적인 식민지 정책의 압정을 당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 점령되면서 중일 전쟁을 확대시켜 막히고 있던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중화민국의 물자를 차단시키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권과 친화 정책을 써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진주를 인정받았다. 일본군은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진주하여 전 국토에 걸쳐 주둔하였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내정 주권은 전쟁 말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처리될 때까지 프랑스에 있었다.
- 공산당의 신장
베트남 사회구조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가족제도이며, 이것을 기초 단위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는 촌락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촌락이 독자적인 장로 회의를 집약점으로 하는 자치 형태를 유지하며, 강하게 단결하여 베트남 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에 역대 왕조나 프랑스 식민지 행정 기관도 촌락 자치에 쉽게 간섭하지 못하였다.
경제구조는 총인구의 약 85%가 농업, 목축, 어업 산업에 의존하며, 국민 총생산의 50%에서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정부는 이러한 경제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자본 투자했지만, 촌락 자치 형태에 방해를 받고, 이어 일본군의 점령 통치를 받게 되었다. 특히 토지 문제가 중요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프랑스는 촌락마다 공동 경영 형태인 공전제에 개입하여 농지 개혁에 착수했다. 1930년에는 전체 경작지의 80%가 사유지가 되었지만 농민 중 약 70%이 소작인으로 전락했고 약 6%의 대지주가 경작지의 60% 이상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북위 14도 이북의 북부 베트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많은 농민들이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공산주의 세력은 농지 문제에 주목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하고 이후 민중 저항의 대의명분으로 삼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 동맹 (비엣민)은 베트남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하였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된 9월 2일에 하노이에 있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시기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공에서 식민군을 재결성하자, 9월 2일 독립선언은 양측의 충돌을 불렀다.

-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연합국 일반 명령 제1호 (1945년 9월 2일 공포)에 근거해, 북위 16도선 이북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게, 이남은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에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할당하여 프랑스군이 본격적으로 도착할 때까지 진주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말에는 북베트남의 노한 장군이 인솔하는 180,000명 규모의 중국군 부대가 진주하였고, 남베트남에는 9월 12일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이 이끄는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 제1진이 상륙하여 각각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착수했다. 프랑스는 쥬 티엘리 다르잘류 제독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하였고 본국의 두 개 사단의 파견을 결정하여 필립 르크레르 드 오트클로크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Corps expéditionnaire français en Extrême-Orient)을 편제하고 9월 12일에 마다가스카르 여단을 제1진으로 하여 출발, 10월 5일에 선발부대가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 장군은 10월 9일에 잭 마슈 대령이 인솔하는 군대와 함께 도착했다.
11월까지 세 개로 나누어 제3 기계화 사단과 제9 식민지 사단이 도착했다. 공군은 수송기와 전투기를 중심으로 약 100기를 파견하였고, 해군은 필립 오보와노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호위함대를 인솔하여, 《전함 리슈류》, 《경순양함 그로아르》, 《구축함 르 트리온판》, 《항공기 수송함 베아룬》이 극동 해역으로 배치되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베트남은 중국군의 장기 주둔을 경계하였고 비엣민도 1945년 11월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해산하여 중국에 대한 회유를 하는 등 중국군 철수를 위한 노력이 계속했다. 프랑스도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군의 증강과 중국군과 협의를 거듭해 1946년 2월에 프랑스-중국 협정이 체결되어 4월 이후 차례로 철수를 감행했다. 그 대가로 중국 각지에 있던 프랑스 조차권의 회수와 하이퐁항의 자유화, 재인도차이나 화교에 대한 우대조치 등을 받아들였다.
비엣민의 독립선언 이후 각지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9월말에는 영국군도 말려들었고, 10월말 이후에는 프랑스 원정군이 도착하자 충돌이 격화되었다. 중국군의 철퇴에 수반하여 1946년 2월 28일과 3월 6일 비엣민과 프랑스는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연방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나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과 통킹 지방의 프랑스 군주둔을 인정하였다. 3월 26일에는 프랑스 흔적이 많이 존재하는 남부 베트남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워 일시적으로 타협하였다.

○ 전개
1946년 3월 6일의 합의조항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 비엣민과 프랑스가 상호 불신하는 와중에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11월 23일 프랑스가 하이퐁을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 부대가 하노이를 공격하였다. 하노이 공격에서 베트민은 발전소를 파괴하고 시내 곳곳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공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에는 하노이 중심지를 장악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민은 호치민 주석의 장려에 따라 1941년 중국 인민전쟁을 모델로 삼아 전략을 수립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선택했던 전략에 따르면 이 전쟁은 3단계로 이루어져있다. 제1단계에서 베트민군은 방어에 치중하며 산악 요새에서 전력을 강화하고, 양측의 힘이 비슷해지는 제2단계에 이르면 혁명군은 굴에서 나와 적의 노출된 시설을 기습한다. 그리고 마지막인 제3단계에서는 전면 공세로 들어가 베트민은 적군을 바다로 내모는 최종 공세를 시작한다.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 (Vo Nguyen Giap) 장군은 1947년 1월 탄라오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하노이의 후방 교란적전을 계속했다. 그러던 1947년 프랑스는 기선 제압에 나섰는데, 그것이 바로 그해 10월에 있던 레아 작전 (Operation Lea)이었다. 프랑스군은 중앙 지도부와 정규군의 말살을 목적으로 베트민의 주 기지인 비엣박에 최소 10,000명 이상의 프랑스 병력 (이중 적잖은 병력이 프랑스 공수부대였다)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레아 작전에서 프랑스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지만, 자신들이 목표로 선정했던 호치민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1950년부터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통킹 만 북쪽에서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은 프랑스계 베트남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강화하고 ―1953년에는 45만명에 이른다 ― 한국 전쟁에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인식한 미국의 도움을 받아 2년 동안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 전후
- 남베트남의 대혼란
미국은 본래 베트남 지역의 독립에는 찬성이었지만 베트남이 공산화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화 되고 결국 미국마저 공산화될 것이라고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 프랑스가 떠난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 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미국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서방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베트민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압제자 프랑스를 지원하는 명백한 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비시 프랑스/일본 제국이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절에 OSS를 통해 호치민과 베트민의 독립 투쟁을 지원해 주었던 국가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에도 호치민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 독립을 이룰 수 있고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힘에 대해서 두려워 했고 후일의 통일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35]
호치민은 2차 대전 때의 동맹관계를 떠올려서인지 미국의 해리 S. 트루먼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 자신과 자신의 당인 베트남 공산당이 30년대 이래로 쭉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뢰가 얻기 힘들어서 말 그대로 헛된 기대일 뿐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의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스트 세력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치민은 그에게 붙은 일종의 ‘성자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은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인물이 절대로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상적인 다원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요소를 총동원했으며 수틀리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정치적 괴물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독립 이전부터 말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늦어도 1947년에는 이런 사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걸로 보인다. 베트남에서 독립운동 세력은 베트민만 있던 게 아니고 북쪽에는 베트남 국민당(VNQDD)나 대월당, 남쪽에는 종교파 세력 같은 다른 세력들이 즐비했다. 이들 대부분이 2차 대전 때는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처럼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원리로 일본군과 협력했기에 미국의 편이 아니긴 했으나 종전 이후로는 이미 일본은 망했고 이들 비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은 미국의 적이 아니었다. 이런 대체제들이 있던 마당에 철저한 독재정권으로 확인된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을 미국이 지지할 만한 이유는 단 1도 없었다.
황제가 경찰권을 군벌과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되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 (Ngô Ðình Diệm)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에 호치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 빙쑤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집권 1년도 지나지 않아 정치적 동맹 세력들을 배신하고 숙청하는 북쪽의 베트민이 10여 년 전에 저질렀던 짓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일을 저질렀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본인도 군사적으론 무능했기 때문에 지엠에게 배신당한 종교파 세력이 가진 군사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공화국 정규군이 이들 지역을 장악하는 데도 실패해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결국 몇 년 뒤 베트콩의 침투가 본격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되었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 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뉴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켰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왔다. 1960년 12월에는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 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 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이 반부패 운동에 참여하는 데 좌,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목사, 승려, 학생 등 남베트남 국민들은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문제는 당시 국가 상황이 여러 면에서 최악에 가까워지고 있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서로 반목하다 급기야 서로를 향해 테러와 암살을 행했다.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됐다. 반대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인사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는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똑같은 놈들로 보일 뿐이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를 좀 평화롭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했으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결국 나라를 버렸다. 온 나라가 불교 신자,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극좌/극우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남베트남은 국가 내부의 부패가 심각해지며 내부 불만이 심화되어 치안이 악화되었고 좌익과 우익은 이념적 유혈갈등을 마구 일으켰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마구 반목하며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를 공공연하게 탄압했다. 물론 불교계도 부패했고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천여 년이 넘도록 불교를 많이 믿어 온 베트남 여론은 이런 탄압을 환영하지 않았다.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탄압하곤 정작 가톨릭을 내세우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니 이런 여론의 분노를 지지삼은 남베트남 불교계는 남베트남 지엠 정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쟁이 심화되며 사람들이 마구 죽어가기까지 해 극도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불교계는 이미 남베트남이라는 국가에 소속된다는 소속감도 잃어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불교계 군벌 및 장교들마저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으며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 주요 도시가 차례차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징병 반대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병 징집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교도 시위가 이렇게 격해지며 경찰로는 감당조차 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판국에 이르렀음에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불교도 시위 와중에 저명한 승려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군부에서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기까지 했는데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하던 응오딘지엠의 제수 (응오딘뉴의 아내) 쩐레쑤언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을 두고 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 (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라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중들이 바베큐를 더 한다고 하면, 제가 기쁜 마음으로 휘발유와 성냥을 지원할게요(if the Buddhists wish to have another barbecue, I will be glad to supply the gasoline and a match.)”라고 했다. 또 “중놈들이 한 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 게 고작이죠… 그 바베큐요? 자기 만족일 뿐이죠, 게다가 수입 휘발유를 썼잖아요”라고 했는데 이 막말은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위에서 보듯이 영어 자막을 달고 미국에서도 방송되었고 이 막말을 본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황당해했다. 원래 베트남은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할 정도로 국민들의 상당수가 독실한 불교도인 나라다. 이런 곳에서 집권 세력이 종교적 편견에 찌들어서 불교를 맹목적으로 탄압하고 비하하면서 극소수인 가톨릭교도들에만 온갖 이권을 안겨주니 당연히 온 국민이 분노할 수밖에 없다.
결국 소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해 응오딘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했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응오딘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 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응오딘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쩐레쑤언은 그 때 딸과 미국에 있었고 다른 자식들이 먼저 로마로 망명하여, 로마로 따라가 살다가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 해 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지엠 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 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쿠데타를 부르는 막장에 빠진다. 이때부터 1975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응웬까오끼 전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 좌익 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정부를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 북베트남의 통일 정책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고 결정했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 두었고 COSVN (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주언이 그 수장이 된다.
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우선 60만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호찌민과 북베트남이 그들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의심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가톨릭 세력은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세력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들 또한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향에서 쫓겨난 셈[45]이었다.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응에안 (Nghệ An) 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48]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되었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 중 학살된 농민의 수는 1만~5만여명으로 추정되며[49] 북베트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한때 공산당 내부에서 호찌민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으며 호찌민 이하 공산당 간부들이 집단농장화 정책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남베트남과 미국의 북베트남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으며 미국이 총선거를 씹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 중국 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굳이 토지개혁의 성과물이라고 하자면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어쨌거나 토지정책의 오류로 인민군이 나서야 할 정도로 심각한 농민반란까지 이어지자 프랑스와의 투쟁을 주도한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기존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잠시 1선에서 물러나 남부 베트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인 레주언 등의 신진 지도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레주언은 자신들의 양보가 일시적일 거라는 북부 출신 기존 지도부의 예상을 깨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빠르게 장악한다. 남부가 기반이라 자본주의 남베트남 정권이 존속하면 지지 기반을 상실해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크게 불리해지는 사정상 새 지도부는 총력을 다해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했고 협상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고 본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등의 구파를 밀어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해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되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해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 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 식민제국이라는 과대망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프랑스
프랑스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교훈을 얻기는 커녕 국력과 명분 모두 식민제국의 유지를 못한다는 현실을 인정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무리수를 연달아 뒀다. 알제리에서도 분리독립 여론이 상승하자 1954년에는 베트남보다 더 지독한 전쟁인 알제리 전쟁을 치루다 인도차이나 전쟁보다 더욱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도 결국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56년에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국유화 선언에 반발해 수에즈 운하를 강탈할려는 목적으로 영국과 제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미국의 반대와 소련의 핵공격 위협에 굴복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헤게모니는 미국과 소련에 있다는 점을 재확인만 했다. 이후 무려 2010년대까지 영향력를 행사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만 프랑사프리크 체제로나마 간신히 대외 영향력을 유지하며 철옹성같던 프랑스 식민제국이 붕괴되는 결말을 낳았다.
○ 종결
1954년 7월 20일 밤과 21일 사이에 진행된 제네바 협상에서 프랑스는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 두 지역으로 나누는 임시분할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인정받았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독립을 확약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