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7일, 대한민국의 사학자 정인보 (鄭寅普, 1893 ~ 1950) 별세
정인보 (鄭寅普, 1893년 6월 19일 / 음력 5월 6일 ~ 1950년 9월 7일)는 일제령 조선과 대한민국의 한학자 · 역사학자 · 언론인 · 정치인 · 작가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무임소 장관실 초대 감찰위원장이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경업 (經業), 호는 위당 (爲堂), 담원 (薝園), 미소산인 (薇蘇山人)이다.

– 정인보 (鄭寅普)
.출생: 1893년 6월 19일, 서울 종현
.사망: 1950년 9월 7일, 황해도
.부모: 정은조, 달성 서씨
.저서: 조선사연구, 양명학 연론, 자모사, 陽明學演論, 양명학 이야기, 정인보 수필선집 등
.자녀: 정양완, 정양모
정인보 (鄭寅普, 1893 ~ 1950)는 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호가 담원 (薝園)ㆍ위당 (爲堂)이다.
어려서 강화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건방 (李建芳)의 제자로 학문의 기초를 쌓았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의 사망으로 귀국한 뒤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며 국학 연구와 언론 활동에 종사했다.
이익 (李瀷)의 『성호사설 (星湖僿說)』과 정약용 (丁若鏞)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등을 교열해 간행하고, 우리 고서 (古書)에 대한 해제를 신문에 연재했으며, 『양명학연론』과 『오천 년간 조선의 얼』 등도 신문에 발표했다. 해방 후 국학대학장과 제1공화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지냈으며, 6ㆍ25 때 납북되어 사망했다.
저서로는 『조선사 연구』 (1946, 『오천 년간 조선의 얼』 개제)와 『담원시조집 (薝園時調集)』(1948)이 생전에 출간됐고, 『담원국학산고 (薝園國學散藁)』 (1955)와 『담원문록 (薝園文錄)』(1967, 번역본)이 그가 납북돼 사망한 뒤에 나왔으며, 1983년에는 담원정인보전집이 연세대출판부에서 출간됐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과 중국 유학
호조참판을 지낸 정은조 (鄭誾朝)와 달성 서씨 (達城 徐氏) 사이에서 외가인 서울 종현에서 출생했다.
11살에 양근으로 낙향하였다.
13세 때 결혼하고 16살 때 진천 향려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이듬해 귀경하여 단발하고 서강에 가택을 차려 난곡 이건방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31년 21살에 중국으로 유학 가 상해에서 동양학을 전공한다.
이 시대에 홍명희, 문일평, 신채호, 김규식, 박은식, 신규식과 교유하며 지냈다.
- 귀국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양명학자, 그 밖의 학파의 저술을 해제 (解題)하고 그 학통을 밝혔으며, 또 그 출판에 임해서는 이를 교열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것은 실학자 특히 성호 (星湖)와 다산 (茶山)의 저술이었다.
그가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며, 그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이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되고 그것은 <5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표제로 동아일보에 연재되기에 이르렀는 데 이것은 후에 <조선사연구>로 간행되었다.
그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그 정신사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연구는 단재사학 (丹齋史學)에서 계발되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행하여졌으며 그 해박한 한학의 지식과 광범한 사료의 섭렵은 단재사학의 고대사의 전개를 보다 더 완벽하게 체계화했으며 그와 아울러 단재사학의 사론 (史論)의 일부를 더 충실한 이론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사학의 역사의식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얼’의 사관 (史觀)을 보여 주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 광복 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조선사연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의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 (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이승만의 측근이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엄한 처벌을 요구했다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49년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초봄 고려대학교의 촉탁을 받아 교가를 지어 고려대학에 전송까지 하였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사는 잊혀져 버렸다.
1955년 새 교가의 제정소식을 들은 조용만이 뒤늦게 책틈에서 발굴하여 고대신문에 발표했다.

- 한국전쟁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중 적유령 산맥에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그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결국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 죽음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납북과 죽음에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홍명희의 차남으로 간첩으로 남파되었던 둘째사위인 홍기무 (洪起武)가 상당히 관련되었다는 것이 넷째 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이다.
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 (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6.25 당시 사돈 홍명희는 남침 주범 김일성의 장인이었고, 사위 홍기무는 김일성의 처남이었다.
홍명희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자, 전쟁의 최고 지도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김일성의 남침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는 등 6.25 주요 전범 중 한명이었다.

○ 사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01년 연세대학교는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 (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 (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사상
정인보의 가문이 조선후기 소론 학자 관료계로 분류되는바 또한 생모가 달성 서씨로서 소론 명문가의 훈손이었던바 그의 학문적 배경은 조선후기 소론계의 학풍이었다.
소론계 지식인들은 역사학을 중시함과 아울러 부국강병 · 군신지의 등을 강조하여 왔으므로 정인보가 한학자로서 근대기 조선학 연구를 선구했던 것은 이러한 소론학풍의 전통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정인보의 학문 · 사상에서 가장 근간되는 것은 양명학이다.
정인보 스스로가 가장 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이 곧 이건방이었다.
1910년 곧 나라가 망하던 해 정인보는 이건방을 찾아가 사제지간을 맺었다고 한다. 이건방은 강화양명학 학자로서 당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당학의 맥을 잇던 사람이었으며 이건방은 정인보에 대하여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이라는 한시까지 써 그를 총애하였다.
망국을 맞은 정인보는 민족의 주체적 정신을 되살리는 것을 1차 과제로서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을 좇기만 하였던 것이 반성할 우리나라의 역사이자 망국을 맞은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바깥 (남)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실심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실심을 찾기 위하여 정인보는 옛것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옛것을 돌아보아 우리의 병폐의 뿌리와 및 민족의 보배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우리 것에서부터 나라 재생의 원동력을 찾음으로써 민족적 자부심·주체성을 되찾고자 하였다.
정인보는 한문과 국문 (한글)을 아울러 썼으며 동시대의 다른 문인과 비교되게 양문자를 상하관계에 있다거나 종속적 관계에 있다거나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한문과 국문이 대등한 가치가 있으며 상황·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보았다.

○ 가족관계
증조부 : 정원용(鄭元容, 1783~1873)
조부 : 정기년(鄭基年, 1816~1865)
아버지(생부) : 정은조(鄭誾朝, 1856∼1926) – 정인보는 생부 정은조의 슬하 2남 3녀 중 장남.
어머니(생모) : 대구 서씨(大丘 徐氏)
부인 : 진사(進士) 서상진(徐相眞)의 딸
양부(본래 백부) : 정묵조(鄭黙朝, 1847 ~ 1866) – 정인보 생부 정은조의 친형. 정묵조는 정기년의 장남.
양모(본래 큰어머니) : 경주 이씨 부인
.부인 : 성계숙(成癸淑) : 사별
장녀 : 정정완(鄭貞婉, 1913~2007) :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針線匠)
.부인 : 조경희 (趙慶姬, 1897 ~ 1979.10.13)
차녀 : 정경완(鄭庚婉, 1920~ ) :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와 결혼하여 월북.
장남 : 정연모(鄭淵謨, 1923~ ) : 교사 역임
차남 : 정상모(鄭尙謨, 1926~ ) : 회사원 역임
삼녀 : 정양완(鄭良婉, 1929~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역임
삼남 : 정흥모(鄭興謨, 1931~?) : 한국 전쟁시 제 5사단 일원으로 철원지구에서 전사
사남 : 정양모(鄭良謨, 1934~ ) :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사녀 : 정평완(鄭平婉, 1935~ ) : 교사 역임
○ 연구 및 저서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 (國故), 절의 (節義), 실학, 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 (國魂), 경세 (警世), 효민 (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 (薝園時調集)』· 『담원문록 (薝園文錄)』· 『담원국학산고 (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사연구 (1946년, 서울신문사, 상·하, 동아일보에서 연재한 ‘五千年間 朝鮮의 얼’을 묶은 것)
담원시조집 (1948년, 을유문화사)
薝園國學散藁 (1955년, 文敎社)
薝園文錄 (1967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薝園 鄭寅普全集 (198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1-4권은 한글로 쓴 글발과 한시 수편을, 5·6권은 한문으로 쓴 글을 담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