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8월 6일, 항일 월북시인 임화 (林和, 1908 ~ 1953) 별세
임화 (林和,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며 문학평론가, 정치가이다.

– 림화 (林和)
.본명: 림인식 (林仁植)
.필명: 임화 (林華), 임다다 (林多多), 김철우 (金鐵友)
.아호(雅號): 쌍수대인 (雙樹臺人), 성아 (星兒), 청로 (靑爐)
.병칭: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
.출생: 1908년 10월 13일, 대한제국 한성부 동숭방
.사망: 1953년 8월 6일(44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학력: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
.경력: 시인, 소설가, 문학 평론가, 前 영화평론가, 前 영화배우, 前 연극배우, 前 정치가
.소속: 前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당: 무소속
.배우자: 지하련(재혼), 이귀례(이혼)
.자녀: 임혜란, 임원배
*前 북조선국 문화선전성 예하 문예학비서관
(前 北朝鮮國 文化宣傳省 隸下 文藝學秘書官)
.임기: 1949년 6월 1일 ~ 1953년 8월 3일
서울 출신이며, 본명은 ‘임인식’ (林仁植)이며, 아호 (雅號)는 쌍수대인 (雙樹臺人), 성아 (星兒), 청로 (靑爐)이다. 그 외에도 ‘임화’ (林華), ‘김철우’ (金鐵友)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남조선로동당 창당 활동 등에 참여했다.
1947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 남북 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6일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 생애 및 활동
- 생애 초반
한성부의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상, 이강국과는 보성고보 동기생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무렵 친구인 윤기정과 함께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 항일 작가, 문필 활동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 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쓰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약 1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31년 귀국한 이후로도 참여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카프에서 좌파 문학 이론을 생산하고 김기진, 김화산 등을 공격하는 각종 논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다. 카프 활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이후 1935년 자신이 서기장까지 지낸 카프가 강제적으로 해산된 이후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는 듯하였으나,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문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헌영에게 매료된 이후 남로당 노선을 걸었다.
- 일제 강점기 후반
일제는 그에게 회유를 하며 전향을 권고했지만 거부하였다. 그는 대화숙에 강제로 입소되었지만 창씨 개명은 끝까지 거부하였고, 총독부는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여 감시하였다. 특히 박헌영과의 관계를 의심, 내통 여부를 중점적으로 감시하였다. 결국 그는 황군 위문 작가단의 주된 인물로 활동하며 친일의 행위를 했지만, 그 정도는 약했던 것 같다.

- 해방 이후
박헌영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는 8월 15일 여운형, 안재홍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으나,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이 경성에 나타나자 그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동참했다.
1947년 두 번째 배우자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월북하였고, 1948년 4월의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9월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동참하였다.
1953년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임화는 흰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로 불렸다고 하며, 김유영이 연출한 영화 《혼가》(1929)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을만큼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초창기에는 ‘임다다’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다이즘 성향을 보였고, 카프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식문학론’을 내세우는 등 외국의 최신 문화 이론을 수입하여 자생적으로 소화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임화의 첫 배우자는 일본 유학 시절에 함께한 동지 이북만의 동생 이귀례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있었는데, 임화는 그 딸을 생각하며 한국 전쟁 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를 썼다. 이 시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은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숙청의 빌미로 삼았다.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이 작곡하여 한국 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른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 사후
한국 전쟁 발발 후 만주에 피난차 머물고 있던 배우자 지하련은 1953년 박헌영 계열이 몰락하면서 임화가 간첩 혐의로 처형 당했으며 시신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실성한 상태가 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2001년 9월에 발굴돼 공개된 미군 정보장교인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임화이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 드러나, 기존 통설대로 리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 정보를 수집해 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베어드가 김수임과 연결된 이강국을 통해 북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 활동사항
192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담 (曇)-1927」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 (dadaism)과 프롤레타리아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담-1927」은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한 것으로 프로시와 이야기시의 유형에 넣을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 (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 (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 (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하였다.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順伊)」·「어머니」·「병감 (病監)에서 죽은 녀석」·「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1932년에 카프 서기장이 되면서 카프 제2세대의 주역이 되었다.
카프 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 시집 『현해탄 (玄海灘)』·『조선신문학사』 간행, 출판사 ‘학예사’ 운영, 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 대한 협조 등으로 점철되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많은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 (朴憲永) · 이강국 (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 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 당시 그의 옆에는 이원조 (李源朝) · 설정식 (薛貞植) 등의 문인들이 있었다.
19세부터 시 · 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 ·『찬가 (讚歌)』(1947) ·『회상시집 (回想詩集)』(1947)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이 있다. 비록 미완으로 그쳤지만 조선신문학사 서술 작업도 꾀한 바 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20 ~ 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그는 문학운동사 · 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 평가
일본의 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소설화한 「북의 시인, 임화 (원제: 北の詩人)」(1964년)이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이는 1987년 한국에도 번역본이 소개되었다.
임화 (林和)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월북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낙산에서 태어나 1953년 8월 6일 북한에서 처형당했다. 십대 시절 보성고등보통학교 중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경성거리를 방랑했던 문학청년 임화는 스무 살 때 영화 《유랑》과 《혼가》의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
수려한 외모로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리며 1929년 연기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난다.
2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1932년 조선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통칭 카프의 지도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에 매진했다.
1938년 《해협의 로맨티시즘》이 포함된 첫 시집 《현해탄》을 출간하고, 2년 뒤 평론집 《문학의 논리》를 낸다.
해방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약했고, ‘조선의 레닌’ 박헌영을 열렬히 추종하여 1947년 월북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문화공작대로 남한에 들어오지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자 다시 북한으로 간다.
1953년 남로당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임화는 이해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복 음모와 미국의 고용 스파이 등의 죄목으로 처형당해 생을 마감했다
○ 작품
대표작으로 전체주의의 문학론, 일본 농민문학의 동향, 대지의 세계성, 19세기의 청산, 카톨리시즘과 현대정신, 비평의 고도 (高度), 조선적 비평의 정신, 수필론 외 시집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