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0월 13일, 장 모네 (Jean Monnet, 1888 ~ 1979)에 의해 ‘유럽합중국을 위한 행동위원회’ (Action Committee for United States of Europe) 창설
장 모네 (프: Jean Monnet, 1888년 11월 9일 ~ 1979년 3월 16일)는 1955년 10월 13일에 ‘유럽합중국을 위한 행동위원회’ (Action Committee for United States of Europe)를 창설했다.

장 모네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행정가, 외교관이다.
유럽 통합의 영향력있는 지지자로서, 모네는 쉬망 선언을 기초하는 등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창설에 기여하였고 이로 인해 유럽 연합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1955년 로마조약에 의해 ECSC가 유럽경제공동체 (EEC)로 발전되면서 그는 총재직을 물러나 민간조직인 유럽합중국행동위원회 (Action Committee for United States of Europe)를 조직한다.
모네는 공직에 선출된 적은 없으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후 프랑스 재건을 위해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프랑스 공방전 당시 영국에서 처음 만난 이래로 1970년까지 서로 협력과 반목을 거듭했던 샤를 드골과의 복잡다면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모네는 1976년 헬무트 콜, 자크 들로르와 함께 명예 유럽 시민으로 지명되었다.
모네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1988년 프랑스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하였다.

–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 (Jean Monnet, 1888 ~ 1979)의 생애 및 활동
장 모네 (프: Jean Monnet, 1888년 11월 9일 ~ 1979년 3월 16일)는 1888년 프랑스의 꼬냑 지방에서 꼬냑 장사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정규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 중국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야말로 산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일개 꼬냑 장사꾼에서 유럽통합의 주역이 된 계기는 1차 세계대전 때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건의한 영국과 프랑스의 군수 물자 보급망을 통합시키자는 그의 제안이 채택되면서부터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전후에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의 사무차장으로 일하면서 그의 지역통합에 대한 비전과 경륜을 가꿔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그의 평생의 소신이 된 ‘유럽통합’의 정신으로부터 나찌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효과적 방안의 하나로 프랑스와 영국을 연방으로 통합하는 ‘불영연방’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유럽통합 정신의 중요한 주춧돌이 된 ‘미국 중시 정책’은 2차 대전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에 기초해 그가 작성한 미국 철강 및 자동차 산업의 군수산업으로의 전환 방안이 채택되어 미국의 참전 계기를 제공한 데에서 극적으로 잘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들은 그를 유럽통합의 아버지라는 점 외에도 2차 세계대전 승전의 숨은 영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전후에 그는 전시 군수보급체제구축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경제계획청 장관으로 일하면서 전후 복구의 일선에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를 시장과 계획을 결합하는 프랑스 경제체제 구축과 시장과 무역 통합 일변도가 아닌 산업간 협력과 통합을 강조하는 유럽통합의 ‘설계주의적 노선’을 구체화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195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인 로베르 슈망이 주도한 ‘슈망계획’에 의해 발족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는 사실 모네의 이러한 그간의 경험과 노선의 결정체였다.
모네가 ECSC의 집행기구인 ‘고위기구 (High Authority)’의 총재 (Commissioner)를 맡으면서 유럽통합에 대한 그의 오랜 꿈이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했다. 1955년 로마조약에 의해 ECSC가 유럽경제공동체(EEC)로 발전되면서 그는 총재직을 물러나 민간조직인 유럽합중국행동위원회 (Action Committee for United States of Europe)를 조직한다. 여기에는 각국의 주요 정당 지도자와 노조위원장 등 주요 정치세력의 지도자들이 참여해 사실상 유럽통합을 배후에서 이끌어 갔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20년간 이 위원회를 주도하면서 각국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럽통합의 기본 노선은 변함이 없도록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1976년 유럽 정상들은 그에게 최초의 ‘유럽명예시민증’을 수여했고 1979년 그가 죽자 프랑스의 위인들이 묻히는 파리의 판테온묘지 (만신전)에 묻혔다. 그는 인도의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20세기 세계의 3대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점은 젊어서부터 간직한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하나하나 실천해 나간 실용적 추진력, 정치가로 성장할 수도 있었던 여러 기회를 마다하며 정치적 중립과 이념적 중도 노선을 견지하면서 격동기 유럽에서 통합의 전도사 역할을 해 나간 점, 그리고 시대의 대세를 파악해 유럽통합에 대해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낸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