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7월 28일,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 (Otto Hahn, 1879 ~ 1968) 별세
오토 한 (Otto Hahn, 1879년 3월 8일 ~ 1968년 7월 28일)은 독일의 화학자이다.

– 오토 한 (Otto Hahn)
.출생: 1879년 3월 8일, 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968년 7월 28일 (89세), 서독 괴팅겐
.국적: 독일
.직업: 화학자
.학력: 마르부르크 대학교
.소속: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베를린 대학교
.수상: 노벨화학상 (1944)
.가족: 배우자 (1913년 결혼), 자녀: 1명
.서훈: 1957년 영국 명예 대영 제국 훈장 4등급 (hononory O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1959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4등급)
독일의 화학자. 방사성 붕괴와 방사 화학의 선구자이며 핵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마르크부르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1901년에 마르크부르크 대학교에서 테오도르 징케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11년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의 방사화학과 과장이 되었고, 1938년 말에는 슈트라스만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하였다.
1946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 (막스 플랑크 과학진흥협회의 전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중핵 분열의 발견은 원자력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동시에 원자폭탄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 생애 및 활동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여, 프랑크푸르트· 마르부르크· 뮌헨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38년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두 조각으로 깨지는 원자핵 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중성자로 우라늄을 타격해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려고 시도하던 중 핵분열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핵분열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두 사람은 초우라늄원소의 추출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한다. 담체로 사용했던 바륨과 란탄이 방사성원소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물리학적 원인을 마이트너에게 문의했고, 마이트너는 우라늄핵이 분열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천연우라늄에 0.8% 정도 섞여 있는 우라늄-235가 중성자를 흡수해 질량이 비슷한 바륨과 란탄의 원자핵으로 분열한 것으로, 방사선은 이 핵분열의 일부로 발생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착수하여 실제로 그것을 증명해냈다.
이후 우라늄 원자핵이 작은 원자핵으로 분열할 때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원리를 이용해 원자폭탄이 만들어졌고, 원자력발전도 가능해졌다. 1kg의 우라늄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석탄 300톤의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원자력에너지는 제3의 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보다 앞서 1905-1910년에는 방사성 물질인 토륨과 악티늄의 자연 붕괴에 관한 연구를 하여, 후에 여러 가지 방사성 동위 원소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리제 마이트너와 함께 방사성 물질인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하였다. 1928년 괴팅겐의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장이 되었으며,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오토 한 (Otto Hahn)은 1968년 7월 28일 (89세), 서독 괴팅겐에서 별세했다.

- 업적
1938년 프리츠 슈트라스만, 리제 마이트너과 함께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분열하는 핵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후 나치 독일에서 핵분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됨을 깨달았는데 이를 활용한 핵무기를 개발하는 우란프로옉트에 참여했다. 다만 강제로 연구에 참가했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프리슈는 늦게 참여했다고 쳐도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까지 제외된 것은 논란이 되었으며 오토 한은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은 후부터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의 공로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발언들을 했는데 특히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난 뒤에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것을 두고 “마이트너가 떠나고 나서야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그녀는 방해가 됐다”는 발언까지 하면서 그녀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줬다. 한때 같은 동료로서 서로를 애칭으로 불렀고 그녀의 망명 당시 뇌물로 쓰라고 본인이 유품까지 건내준 사이였음에도 그랬다. 그녀는 친구에게 “내가 오토에게 지워져야 하는 과거가 된 것이 너무나 슬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나치 독일은 1935년부터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명한 것을 항의하여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기 때문에 노벨위원회가 수상을 선정하고도 못 받은 사람이 그때까지 3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노벨위윈회가 꿋꿋이 오토 한을 선정하자 스웨덴 한림원은 난감해하면서 공식 발표를 1년 뒤로 미루었다. 1년이 지나고 나치가 패망하자 잠시 재선정하자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2차대전은 끝났고 이제 독일인도 얼마든지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한에게 수여가 결정되었다. 정작 당시 한은 종전 후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연합군에 감금된 상태여서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못 받았고 데일리 텔레그래프를 통해서야 소식을 접했다. 결국 1946년 12월에 비로소 출국해서 제대로 상을 받았는데 상금은 쓰지 않았다고 한다.
- 기타
1960년대에 서독이 민간 해상 선박의 원자력 추진을 연구하기 위해 제작, 운영한 실험용 원자력 선박에 그의 이름이 붙은 바 있다. 독일 재통일 후인 2009년에 해체되었다.

○ 노벨상 수상
- 수상 업적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44 was awarded to Otto Hahn “for his discovery of the fission of heavy nuclei”.
Otto Hahn received his Nobel Prize one year later, in 1945. During the selection process in 1944, the Nobel Committee for Chemistry decided that none of the year’s nominations met the criteria as outlined in the will of Alfred Nobel. According to the Nobel Foundation’s statutes, the Nobel Prize can in such a case be reserved until the following year, and this statute was then applied. Otto Hahn therefore received his Nobel Prize for 1944 one year later, in 1945.
노벨 화학상은 “중핵분열의 발견”으로 오토 한에게 수여되었습니다.
1944년 노벨 화학상 선정 과정 중 노벨 화학 위원회가 당해 수상자 후보들이 알프레드 노벨 박사의 유지에 부합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오토 한은 1년 후인 1945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 재단의 규칙에 따라 이런 경우 노벨상은 다음해까지 보류되므로 오토 한은 1944년의 노벨상을 1년 후인 1945년에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 수상 추천문
전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화합물이 생성되거나 분해될 때는 전자각 바깥 부분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최근까지 화학이 거의 원자들의 조합이나 결합으로부터 원자의 분리를 연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화학은 현재까지 원자 주변 부분에 관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학문, 즉 핵화학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자의 중심 부분인 핵을 다루며 최근 업적으로부터 판단하건대 과학에서의 혁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원자핵은 아주 작습니다. 러더퍼드는 원자핵의 지름이 원자지름보다 1만 배나 작아 1센티미터의 10조 분의 1 정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러더퍼드는 에너지를 가진 방사성원소의 입자, 즉 발사된 입자로 다른 핵으로부터 작은 조각을 떼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수소핵, 즉 양성자라는 것을 알았는데 미소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원자핵은 양성자로 이루어진 복합구조였습니다. 후에 졸리오와 그의 부인 이렌 졸리오퀴리는 다른 종류의 원소들이 에너지가 풍부한 양성입자의 방사선에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이때 원자의 변환이 일어날 수 있는데 생성된 원자는 일반적으로 불안정하여 다른 종류의 원소입자를 방출하면서 자발적으로 분해됩니다.
페르미는 핵합성을 위해 발사체로써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자를 사용했습니다. 중성자는 양성자와 같은 질량을 가지지만 이름이 의미하듯이 전하를 띠지 않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양성원자핵에 의해 반발하지 않고 이전에 사용했던 양전하를 가진 발사체보다 더 쉽게 결합합니다. 이 방법으로 페르미는 수많은 새로운 종류의 방사성 원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핵화학에 대한 이런 연구들은 반응성 핵의 작은 질량 변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단순히 다른 종류의 원소입자의 첨가나 손실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오토 한 교수가 발견한 반응 과정은 아주 다른 특성을 가집니다. 이것은 무거운 원자핵이 대체로 같은 크기의 두 부분으로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한 교수가 리제 마이트너와 30년 동안 공동 연구를 하면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토륨과 우라늄 같은 가장 무거운 원소에 중성자를 발사하여 얻은 생성물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페르미에 따르면 나타난 원소들은 주기율표 원소들의 연장선상에 있고 한 교수와 마이트너는 이 가정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말에 한 교수는 그의 젊은 동료인 슈트라스만과 함께 수행한 연구를 통해 중성자와 우라늄의 반응에서 형성된 생성물 중의 하나가 화학적으로 바륨처럼 거동하는 일종의 라듐이라고 가정하였습니다.
1939년 1월 한 교수는 이 발견을 발표하면서 중성자에 의해 가장 무거운 원소의 원자들이 반으로 쪼개져 주기율표의 중간에 속하는 원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대담한 견해를 아주 신중한 용어로 표현하였습니다. 한 달 후에 그는 이론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과학자들이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수행한 연구에서 거의 동시에 확증되었습니다.
한 교수의 발견은 놀라움을 자아냈고 세계 과학자들에게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보어가 개발한 원자핵 구조이론에 연구의 기초를 두었던 리제 마이트너와 프리슈에 의해 중요한 이론적 연구가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이 연구는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핵분열이 거대한 에너지 방출과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분열 중에 생성되는 조각들이 거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방향으로 퍼지는 것이 계산을 통해 나타났으며 프리슈는 이것을 실험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핵분열 중의 생성물이 중성자의 방출과 함께 분해된다는 졸리오의 발견과 연결되면서 한 교수의 발견은 우라늄을 쪼개서 아주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 연쇄반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후의 연구는 아주 희망적이었습니다.
적은 양의 방사성원소를 화학적으로 확인하는 데 있어서 한 교수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중원자`heavy atom 핵분열의 수많은 생성물에 대한 화학적 연구 방법에 길을 열었습니다. 분열은 반응하는 핵의 구조와 쪼개는 중성자 에너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분열의 기본 생성물은 불안정하며 점차 분해되고 원소입자를 방출하여 그것들 각각이 다른 종류의 원자들의 연속적인 출발점이 됩니다. 지금까지 물질 분열 과정의 직접 혹은 간접 생성물은 약 100개가 존재한다고 밝혀졌습니다. 이와 같은 생성물은 주기율표에서 셀레늄과 프라세오디뮴 사이에 있는 25개 원소들과 연결됩니다.
핵분열은 아주 위험하지만 그 발견은 매우 중대하며 유망합니다. 1943년 가을에 한 교수는 핵화학 분야에서 이룬 그의 최근 업적에 대한 스웨덴 과학원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연쇄반응으로 우라늄이 쪼개지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연쇄반응으로 우라늄이 쪼개지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순식간에 만들어져 그 효과가 이때까지 알려진 어떠한 폭발 현상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교수는 내포된 기술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는 “신의 섭리는 하늘에 다다르는 나무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염원으로부터 그가 원자력 정복은 훨씬 후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적인 목적을 위한 원자력의 사용보다 원자폭탄의 개발이 더 가깝게 다가와 있다는 생각에 전율하였습니다.
한 교수는 불굴의 정신으로 그가 부딪힌 문제를 푸는 데 매우 고무되었지만 인간에게 불을 주었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그는 인간이 원자력을 통제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이 발견의 선물이 주는 책임감을 깊게 느끼기를 빕니다. 그러면 이것은 축복이 될 것이고 인류 생활의 향상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중원자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한 교수님께 1944년 노벨 화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교수님이 감사의 뜻을 표하며 유감스럽게도 이 수여식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상을 수여하고자 하는 과학원의 결정을 지금은 실행할 수 없습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 화학위원회 위원장 A. 베스트그렌
티셀리우스 교수는 1946년 12월 13일에 오토 한 교수를 위해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한 교수님.
교수님은 불행히도 1945년 10월 10일에 열린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화학 분야 노벨위원장은 교수님의 연구 결과를 자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교수님이 상을 받고 축하를 받기 위해 직접 참석하였다는 사실에 기쁨을 표현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중핵분열의 발견은 우리 모두, 온 인류가 앞으로의 발달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큰 두려움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위대한 발견이 어떠한 궁극적인 실제 응용과는 상관없이 원자핵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에서 더 많은 열정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은 특히 교수님께 엄청난 기쁨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원자핵의 실제 응용에 관해서는 교수님도 결국 인류에 대한 축복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과 함께 하리라 확신합니다.
오토 한 교수님. 교수님께 왕립과학원의 뜨거운 축하를 전해드리며, 이제 전하로부터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1944년 노벨 화학상은 1945년 11월 15일에 발표되었다.

○ Honors and awards
During his lifetime Hahn was awarded orders, medals, scientific prizes, and fellowships of Academies, Societies, and Institutions from all over the world. At the end of 1999, the German news magazine Focus published an inquiry of 500 leading natural scientists, engineers, and physicians about the most important scientists of the 20th century. In this poll Hahn was elected third (with 81 points), after the theoretical physicists Albert Einstein and Max Planck, and thus the most significant chemist of his time.
As well as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44), Hahn was awarded:
the Emil Fischer Medal of the Society of German Chemists (1922),
the Cannizaro Prize of the Royal Academy of Science in Rome (1938),
the Copernicus Prize of the University of Konigsberg (1941),
the Gothenius Medal of the Akademie der Naturforscher (1943),
the Max Planck Medal of the German Physical Society, with Lise Meitner (1949),
the Goethe Medal of the city of Frankfurt-on-the-Main (1949),
the Golden Paracelsus Medal of the Swiss Chemical Society (1953),
the Faraday Lectureship Prize with Medal from the Royal Society of Chemistry (1956),
the Grotius Medal of the Hugo Grotius Foundation (1956),
Wilhelm Exner Medal of the Austrian Industry Association (1958),
the Helmholtz Medal of the Berlin-Brandenburg Academy of Sciences and Humanities (1959),
and the Harnack medal in Gold from the Max Planck Society (1959).
Bust by Knud Knudsen
Hahn became the honorary president of the Max Planck Society in 1962.
He was elected a Foreign Member of the Royal Society (1957).
His honorary memberships of foreign academies and scientific societies included:
the Romanian Physical Society in Bucharest,
the Royal Spanish Society for Chemistry and Physics and the Spanish National Research Council,
and the Academies in Allahabad, Bangalore, Berlin, Boston, Bucharest, Copenhagen, Göttingen, Halle, Helsinki, Lisbon, Madrid, Mainz, Munich, Rome, Stockholm, Vatican, and Vienna.
He was an honorary fellow of University College London,
and an honorary citizen of the cities of Frankfurt am Main and Göttingen in 1959,
and of Berlin (1968).
Hahn was made an Officer of the 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of France (1959),
and was awarded the Grand Cross First Class of the Order of Meri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1959).
In 1966, US President Lyndon B. Johnson and the 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AEC) awarded Hahn, Lise Meitner and Fritz Strassmann the Enrico Fermi Award. The diploma for Hahn bore the words: “For pioneering research in the naturally occurring radioactivities and extensive experimental studies culminating in the discovery of fission.”
He received honorary doctorates from
the University of Gottingen,
the Technische Universität Darmstadt,
the University of Frankfurt in 1949,
and the University of Cambridge in 1957.
Objects named after Hahn include:
NS Otto Hahn, the only European nuclear-powered civilian ship (1964),
a crater on the Moon (shared with his namesake Friedrich von Hahn),
and the asteroid 19126 Ottohahn,
the Otto Hahn Prize of both the German Chemical and Physical Societies and the city of Frankfurt/Main,
the Otto Hahn Medal and the Otto Hahn Award of the Max Planck Society,
and the Otto Hahn Peace Medal in Gold of the United Nations Association of Germany (DGVN) in Berlin (1988).
Proposals were made at various times, first in 1971 by American chemists, that the newly synthesised element 105 should be named hahnium in Hahn’s honour, but in 1997 the IUPAC named it dubnium, after the Russian research centre in Dubna. In 1992 element 108 was discovered by a German research team, and they proposed the name hassium (after Hesse). In spite of the long-standing convention to give the discoverer the right to suggest a name, a 1994 IUPAC committee recommended that it be named hahnium. After protests from the German discoverers, the name hassium (Hs) was adopted internationally in 1997.

○ Main discoveries
Discovery of radioactive elements (1905–1921)
Radioactive recoil (1909)
Fajans-Paneth-Hahn Law
Protactinium (1917)
Nuclear isomerism (1921)
Applied Radiochemistry (1936)
Nuclear fission (1938)
○ Publications in English
Hahn, Otto (1936). Applied Radiochemistry.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Hahn, Otto (1950). New Atoms: Progress and Some Memories. New York-Amsterdam-London-Brussels: Elsevier Inc.
Hahn, Otto (1966). Otto Hahn: A Scientific Autobiography. Translated by Ley, Will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Hahn, Otto (1970). My Life. Translated by Kaiser, Ernst; Wilkins, Eithne. New York: Herder and Herder.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