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5일, 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장제스 / 창카이섹 / 장개석 (蔣介石, Chiang Kai-shek, 1887 ~ 1975) 별세
장제스 / 장개석 (蔣介石,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또는 창카이섹 (Chiang Kai-shek)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군사 지도자이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 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 1, 3대 총통 (1925년 ~ 1975년)이었다.
제스는 자 (字)이며 흔히 불린다. 본명은 장중정 (蔣中正).
아명은 루이위안 (瑞元), 족보명은 저우타이 (周泰), 학명은 즈칭 (志淸)으로 종교는 감리교이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화민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 장제스 (蔣介石)
.출생: 1887년 10월 31일, 청나라 저장성 닝보 부 펑화 현
.사망: 1975년 4월 5일 (8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학력: 중화민국 국방참모학교
.정당: 중국국민당부
.모부: 부) 장조총 (蔣肇聰), 모) 왕채옥 (王采玉)
.형제: 장제칭 (이복 형), 장루이칭 (동복 아우)
.배우자: 쑹메이링 (3혼), 야오예청 (첩실)
마오푸메이 (이혼), 천제루 (이혼)
.자녀: 장징궈 (적장남), 장젠화 (적장녀), 장웨이궈 (서차남), 장야오광 (차녀)
.손주: 장샤오옌, 장샤오융, 치앙 샤오 창, 장샤오원, 장샤오캉, 장샤오쯔, 치앙 샤오 우
.증손: 치앙 완 안, 장우백, 에드워드 치앙, 앤드류 치앙, 치앙 요 성, Chiang Yomei, 비비언 챙, 장진쑹 등
.종교: 불교 → 개신교(감리회)
*중화민국의 1, 2, 3, 4, 5대 총통
.임기: 1950년 3월 1일 ~ 1975년 4월 5일
.전임: 염석산 (대리) / 후임: 옌자간
*국민정부의 주석
.임기: 1943년 8월 1일 ~ 1948년 5월 20일
.전임: 린썬 / 후임: (폐지)

*국민정부의 군사위원회 위원장
.임기: 1931년 12월 15일 ~ 1946년 5월 31일
.전임: (신설) / 후임: (폐지)
*국민정부의 행정원장
.임기: 1939년 12월 11일 ~ 1945년 6월 25일
*국민정부의 행정원장대리
.임기: 1947년 3월 1일- ~ 947년 4월 18일
.전임: 쑹쯔원 / 후임: 장췬
*중국국민당의 총재
.임기: 1938년 4월 1일 ~ 1975년 4월 5일
.전임: 장제스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총회 주석 직함) / 후임: 장징궈 (당주석 직함)
*중국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
.임기: 1936년 5월 12일 ~ 1938년 4월 1일
*군사 경력
.군복무: 청국 육군, 일본군, 국민혁명군
.복무기간: 1911년-1952년 (현역), 1952년-1975년 (명예 국민당군 수장)
.소속: 국민혁명군
.최종계급: 특급상장 (特級上將)
.지휘: 중화민국 육군 원수, 중화민국 황푸 군관학교 총수, 중화민국 국민당군 원수
.참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장개석 (장제스, 蔣介石, 1887 ~ 1975)은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대륙 시절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대만(타이완) 정부의 초대 총통을 지낸 인물이다.
要為自由,要為黨國,來箏氣!
자유를 위하여! 당의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 1934년 황포군관학교 개교 10주년 연설 中

○ 생애 및 활동
1887년 10월 31일, 청나라 저장성 닝보 부 펑화 현에서 태어났다.
1906년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갔다.
일본 유학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쑨원의 신임을 받아 1923년 제1차 국공합작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이후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군, 해군,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 (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 (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지만,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1948년 5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인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년 3월 1일부터 1975년 4월 5일까지 초대~5대 (리쭝런의 직무대행기간 및 사망으로 인한 옌자간의 직무승계기간 제외)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 주요 생애와 업적
현재 대만에서는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시각과 과거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 (과거사 청산)이 공존하고 있다.
.중국 대륙 통치와 국공내전
쑨원의 후계자로서 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 대립 (국공내전)했으나, 패배하여 1949년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다 (국부천대).
.한국 독립운동 지원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에 감명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명문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사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만 통치
대만으로 이주한 후 초대부터 5대까지 총통을 역임하며 현대 대만의 기틀을 마련했다.
.가족 관계
부인은 중국 근현대사의 유명한 인물인 쑹메이링(송미령)이다.

- 약력
1906.4. 바오딩군관학교 입교
1907.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
1909.5.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졸업
1926.4. 제2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26.4.14.~1928.11.10.)
1926.4. 제2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6.4.16.~1927.3.10.)
1926.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1926.6.5.~1927.4.1.)
1927.4. 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사령관 (1927.4.5.~1929.1.22.)
1928.2. 제4대 군사위원회 주석 (1928.2.7.~1928.11.7.)
1928.10. 제2대 국민정부 주석 (1928.10.10.~1931.12.15.)
1930.11.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1930.11.18.~1931.12.15.)
1932.3. 초대 국민정부 군사위원장 (1932.3.6.~1946.5.15.)
1935.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2기, 1935.12.7.~1937.1.1.)
1938.4. 초대 중국국민당 총재 (1938.4.1.~1975.4.5.)
1939.12. 제22대 국민정부 행정원장 (3기, 1939.12.11. ~ 1945.5.31.)
1941.12. 제12대 난징 국민정부 외교부장 (1941.12.27. ~ 1942.10.20.)
1943.8. 제4대 국민정부 주석 (1943.8.1.~1948.5.20.)
1947.3.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1947.3.1.~1947.4.23.)
1948.5. 초대 중화민국 총통
1954.5. 제2대 중화민국 총통
1960.5. 제3대 중화민국 총통
1966.5. 제4대 중화민국 총통
1972.5. 제5대 중화민국 총통

○ 평가와 비판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항일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키고, 타이완에서 2.28 사건의 학살자이자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부정적인 평가의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 부패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일당 독재, 진보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백색 테러로 불리는 보수 테러, 독재에 저항하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질적으로 반대한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평가도 최근에는 일제와의 끈질긴 항전, 친일파 처단 등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내리고 있다.
- 정책 실패의 원인
그는 새로운 국민정부의 주석으로서 사회개혁 정책을 굳건하게 지지했으나, 그 정책의 대부분은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로는 1928년 그가 중국 군벌들을 흡수했지만 그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우선 각 지방의 군벌들을 진압했다기보다는 중립화시킨 것뿐이었고 군벌들은 여전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한 1945년 이전까지 내부 친인척과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를 다스리지 못함으로써 국공 내전에서 패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만다.
○ 기타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의 구 명칭인 장제스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다.
중정기념당 (中正紀念堂)은 그의 사후에 중국 화교들이 돈을 모아 지은 그의 기념관이다. 타이베이 시내에 위치한다.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제스는 1945년 김구의 귀국시 미화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으나, 김구는 미군정의 방해로 이 돈을 국내에 들여오지 못했다.

○ 어록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노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中國如果亡於帝國主義,我們還可以當亡國奴,尚可苟延殘喘,如果亡於共產黨,則縱為奴隸尚不可得。— 1931년 8월 22일 난창에서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보낸 전보
자유를 위하여! 당의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要為自由,要為黨國,來箏氣! — 1934년 황포군관학교 개교10주년 연설에서
우리는 평화를 바라지만, 구차한 안정을 바라지는 않는다. 응전은 준비하지만, 전쟁의 개시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전국적인 응전의 국면 이후에는 최후까지 희생만이 있을 뿐, 결코 조그만한 요행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전쟁이 시작된다면 남북도, 노소도 없이, 누구든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항전할 책임이 있으며 모든 것을 희생할 결심을 굳혀야 한다.
我們希望和平,而不求茍安;準備應戰,而決不求戰。我們知道全國應戰以後之局勢,就只有犧牲到底,無絲毫僥倖求免之理。如果戰端一開,那就是地無分南北,年無分老幼,無論何人,皆有守土抗戰之責任,皆應抱定犧牲一切之決心。— 루산성명 중 일부
일본인들은 피부병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심장병이다.
The Japanese are a disease of the skin. The Communists are a disease of the heart. — 1941년, 시어도어 H. 화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나라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동포 여러분.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선을 배푸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지고지귀(至高至貴)의 특성이며 우리가 일관되게 성명한 ‘우리는 일본 군벌은 적으로 삼되 일본 인민은 결코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폭(暴)으로 폭을 갚고 능욕을 가지고 그들의 지금까지의 잘못된 우월감에 대응한다면 원통함과 원통함은 서로 앙갚음하여 영원히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인의의 스승이 가르친 목적이 아닙니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충칭에서 한 연설 중 일부.
“나라가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문물 없이 살 수는 없다.”
“강대국의 압박에 맞설 수 있는 국가가 있다면, 그 국가는 강한 것이다.”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대륙을 다시 공격하여…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하여… 중국을 구하라. — 장제스의 유언으로 알려진 문장.

○ 가족 관계
증조부 장사증 (1783~?)
조부 장사천 (1814~1894)
부 장조총 (1842~1895) 청 저장성 출신 / 모 왕차이
본인 장제스 (1887~1975) 제1~5대 총통
장남 장징궈 (1910~1988) 제6, 7대 총통 / 며느리 장팡량(1915~2004)
손자 장샤오원 (1935~1989)
손녀 장샤오장 (1937~)
손자 장샤오옌 (1940~)
증손자 장완안 (1978~) 정치인
현손자 3명
손자 장샤오츠 (1940~1996)
손자 장샤오우 (1945~1991)
손자 장샤오융 (1948~1996)
증손자 장여우보 (1976~) 디자이너
현손자녀 1남 1녀
차남 장웨이궈 (1916~1997) 군인, 정치인 / 며느리 스징이 (?~1953) / 며느리 추아이룬
손자 장샤오캉 (1963~)
당조카 장정인
당조카손자 장샤오셴 (1900~1936)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