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1월 20일, 러시아 생물학자 트롬핀 리센코 (Trofim Denisovich Lysenko, 1898 ~ 1976) 별세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Trofim Denisovich Lysenko, 러: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1898년 9월 29일 ~ 1976년 11월 20일)는 소비에트 연방의 생물학자로 1930년대에 리센코주의로 알려진 농업 학설에 입각하여 소련의 농업 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 학설은 생물의 유전성은 전적으로 유전자에 달려 있다는 당대의 유전학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 트롬핀 리센코 (Trofim Denisovich Lysenko)
.출생: 1898년 9월 29일, 우크라이나 카를로프카
.사망: 1976년 11월 20일, 러시아 모스크바
.부모: 옥사나 리센코, 데니스 리센코
.형제자매: 파벨 리센코
.자녀: 루드밀라 리센코, 유리 리센코, 올렉 리센코
.수상: 레닌 훈장, 사회주의 노동영웅, Honorary Academician of VRAL 등
리센코주의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여파는 과학계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리센코는 ‘맨발의 과학자’로 영웅시되었고 거의 대부분 조작으로 얻어진 그의 연구 성과는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리센코는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숙청에 앞장섰다.
특히 위대한 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 (러: НКВД)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리센코의 책임이 크다.
리센코주의 농업 정책은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이전 체제 비판이 가능해지면서 소련의 과학자들은 리센코주의에 맞서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인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비탈리 긴즈부르크, 표트르 카피차가 리센코 학설의 비과학성과 리센코의 과학적 정적 탄압을 고발하고 나섰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생물학, 특히 유전학의 부끄러운 후진성에 대한 책임과 사이비 과학을 유포시킨 것, 모험주의, 학문의 격하, 그리고 수많은 진짜 과학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해고하고 체포하고 심지어 죽인데에 대한 책임이 있다.” —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1964년 과학아카데미 총회
여론이 리센코에 불리하게 기울어지면서 1965년 리센코는 실각하고 소련에서의 리센코주의 농업 정책은 끝이 났다.
그러나 리센코주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수년간 더 영향을 끼쳤다.

○ 생애 및 활동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의 카를롭카에서 우크라이나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달리 눈에 띄는 행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후 키예프 농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농업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1928년 육종학자 이반 미추린(Иван Мичурин, 1855–1935)의 연구를 계승하여 춘화처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훗날 라이벌이 되는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리셴코의 춘화 연구는 높게 평가했을 정도다.
‘춘화처리’ (春化處理)는 보리, 밀처럼 겨울철 휴면을 거쳐야만 하는 종자들을 인위적으로 저온 처리하여 휴면 없이도 정상적인 발아가 이루어지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농업 외에도 원예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튤립과 같은 화훼의 경우 전 해에 꽃이 피고 진 구근이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겨울을 겪지 않으면 피라는 꽃은 안 피고 잎만 무성하게 나거나 괴이한 형태의 상품 가치가 없는 기형 꽃이 피게 된다. 이런 저온처리의 가장 극적인 예는 바나나의 종자를 영하 60도에서 장기간 처리해 온대지방인 일본에서 바나나를 재배할 수 있게 한 몬게 바나나이다.
본래 춘화처리는 리센코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농부들이 경험상으로 알게 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겨울밀 (가을에 심어 여름에 거두는 밀)을 억지로 봄에 심으면 이삭이 패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영양생장만 하는데 춘화처리를 거치면 겨울밀을 봄에 심어도 정상적으로 이삭이 패므로 수확이 가능하다.
또한 리센코는 소련에서 감자 씨눈만 오려내서 씨감자를 심는 농법을 최초로 발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리센코는 당시 소련의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용불용설을 지지했다. 그는 한 세대의 종자에 춘화처리를 해 놓으면 그 다음 세대부터는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심어도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사실 그가 이런 학설을 주장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한두해의 연구로 대충 학설에 끼워맞춰 내놓은 결과를 그대로 농업 프로젝트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다. 비록 후성유전학의 발견으로 그가 옳았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농업에도 적용할 때는 또 지난한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바로 적용한 것이 최대의 패착이었다.

유전학 및 종자학 등 종자관련 연구가 최소 5~10년 단위로 이어지는 길고 지루한 연구이고 중간중간에 돌연변이나 다른 유전자의 침입, 병충해나 농약사용에 통한 내성변화, 우성 및 열성유전자에 의한 종자변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며 그 사이에서 돌연변이와 정상개체를 구분하고 분류하여 근삿값에 가까운 값을 구해야 하지만 하지 않고 자신의 용불용설에 맞게 대충 뜯어고친 내용만으로 진실인 것마냥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소련 지도부는 이런 연구결과를 검증도 하지 않고 바로 적용해 버렸다. 현대의 GMO 작물을 개발해 상용화하기까지는 평균 13~14년의 시간이 걸리며 한국에서 냉해로 인해 없어진 통일벼도 시험재배로 최소 6년을 재배한 걸 생각해 볼 때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당연히 이런 연구 결과가 소련 농업 발전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거기다 당시 소련은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소련 농업이 개판 5분 전이었을 때 리센코의 이론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3)이 진행되면서 소련 농업부는 바빌로프의 유전학보다는 단기적으로 생산량을 높일 방법을 찾았고 리센코의 이론은 거기에 딱 적임자였다. 농업체제 전환의 부작용과 리센코의 엉터리 이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소련 농업은 1980년대까지도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최대 적성국인 미국에게서 식량을 사 오는 굴욕적인 처지에 놓였다.
현대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주요 농업수출국 중 하나로 세계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좋은 땅이 많아도 잘못된 유사과학과 잘못된 정책으로 농업을 어디까지 말아먹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 생리학, 물리학 그리고 특히 생물학 – 관련하여 스탈린은 “올바른” 당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결국 생물학 분야에서 유전학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의미였다.
그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엄청난 해악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과학자였다. 왜냐하면 리센코는 당시 소련 과학계에서 이만큼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도 드물었던 데다 출신 성분도 ‘부르주아’의 아들인 바빌로프와 달리 일반 농민의 아들로 우수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센코이즘의 사상적 베이스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인데 용불용설에 따르면 부모의 후천적 유전형질이 자식에게 유전된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거하여 사회적·역사적 환경 속에서 공산주의적 인간이 탄생하면 그 자식 또한 공산주의적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때문에 리센코이즘은 어찌 보면 공산주의를 자연과학적으로도 일견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이었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엥겔스 생전에도 자연과학에 변증법을 적용하려는 등의 형식으로 존재했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것보다 사회적 학습이 중요하며 원래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선전과 학습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사회주의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에 오염된 이기적인 인간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살게 되면 마치 춘화처리된 밀처럼 되어서 소비에트 인간 (homo sovieticus)이 될 수 있고, 그 자식들 또한 이타적인 사회주의자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과학자로서 실수를 잔뜩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소련 생물학계의 정점으로 올라섰다.
당시 소련에서는 유전학이 큰 화제를 불러왔는데 그 연구의 선도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진화생물학의 종주국인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전학을 전공하고 이를 재배식물에 적용하여 많은 성과를 낸 인물이었으며, 종자 연구에도 관심이 많아 전세계 많은 종자들을 모아 파블롭스크 실험국에 보관하여 연구하고 종과 변종의 기원중심설을 만드는 등 현대 유전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바빌로프는 한때 소련 농업과학아카데미의 총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센코는 바빌로프의 유전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리센코는 유전학 이론을 연구 결과로 반박하기보다는 선천적인 유전자를 중시하는 유전학이 반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며 바빌로프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을 부르주아나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데 치중했고, 스탈린 역시 극도의 소련 국가주의자였던 터라 외국 학문이었던 유전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바빌로프는 농업 관련 연구에 주력했던 리센코와는 달리 식물 분류와 초파리 실험 등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이론적 연구에 몰두했던 것도 숙청의 이유가 되었다. 결국 바빌로프는 대숙청의 피바람에 휘말려 감옥에 갇힌 뒤 1943년에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와 동시에 멘델 등의 생물학자들의 이론이나 소련의 유전학도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낙인과 함께 발전이 정체되었다.

바빌로프의 숙청은 그가 소련의 주류학설을 거부하는 이레귤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용불용설이 주류 학설이었는데, 이는 리센코가 정치질을 하기도 전에 러시아의 멘델학파 학자들이 스스로 자폭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유전학은 아직 우생학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고, 멘델학파 학자들 중 우생학적 발언을 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이들은 “한 세기면 수많은 길들여진 인간 개체 집단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들 사이의 차이는 마치 퍼그나 푸들 같은 소형견과 그레이트데인이나 세인트버나드 같은 대형견 사이의 차이만큼 클 것이다,” “1917년 혁명으로 러시아 귀족의 우수한 유전자풀이 소실된건 인류의 큰 피해다. 이를 우생학적 수단으로 교정해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사랑은 출산과 분리될것이며, 정자는 특정 승인된 출처에서만 제공되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좁혀나갔다. 심지어 194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허먼 조지프 멀러는 스탈린에게 “(레닌과 다윈 같은) 오만 분의 일 확률로 선별된 가장 우수한 개체의 정자를 러시아 여성들에게 인공수정하여 소비에트 위버맨쉬를 만들어야 한다”는 뇌절에 가까운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우생학적 견해는 당연히도 공산주의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대숙청 당시 이들은 스탈린의 보호를 받았던 다른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대로 숙청당한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본보기로 리센코는 스탈린과 정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과학계의 독재자가 되었다. 이미 과학보다는 유사과학에 가까웠던 그의 이론에 반대하면 반동분자나 파시스트로 몰려 큰일을 당했으므로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감히 반대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생물학 연구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소련의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바빌로프가 숙청되기 전에 남겨 놓은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종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끔찍한 기아와 전쟁에 맞선 용맹한 생물학 연구자들도 트로핌 리센코의 위세와 광기엔 맞설 수 없었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초래한 그의 권력 자체는 스탈린이 죽으면서 그 위세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흐루쇼프도 생물학에는 무지했던지라 그의 이론은 1950년대 말까지 쓰였다. 대체적으로 생물학에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않았던 소련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그의 엉터리 이론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이걸 농업에 접목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여기에 더해 리센코는 작물을 빽빽하게 심으면 농사가 잘 된다는 밀식 재배 이론의 지지자였다. 밀식 재배를 할 경우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습해 및 병해가 심해지고 작물이 가깝기 때문에 해충이 숨을 공간이 많아져서 해충 피해도 커진다. 거기다 심어놓은 작물들도 땅이 좁으면 햇빛이나 양분 등을 두고 서로 경쟁하며 생식생장을 하지 않고 영양생장만 하기 때문에 필요한 농산물은 안 달리고 식물의 키와 잎만 크다가 결국 줄기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죽는다. 즉 이론적으론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 적용하면 큰일나는 재배법인데, 리센코는 자신의 밀식 재배 이론을 처녀지 개간 운동에 그대로 적용했다.
결국 흐루쇼프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시베리아-카자흐스탄 지역의 처녀지 개간 운동이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야 리센코와 그의 이론은 맹렬한 비판을 받으면서 소련 과학계에서 퇴출되었고 유전학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소련 농업에 남긴 상처는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으며 이는 현재의 러시아의 농업에도 상당한 악재로 남고 말았다.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1957년에는 소련을 방문한 북한 과학자 계응상이 리센코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1962년과 1963년도에는 처녀지에서 가뭄이 일어나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었다. 1964년부터 러시아 과학계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그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맹비난하였다. 결국 1965년에 모스크바 유전학 연구소장직을 사임하면서 반 강제로 과학계를 떠나게 되었다. 1976년에 모스크바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는데 소련 정부는 이틀 뒤에 사망 사실을 발표했다. 사후 모스크바에 있는 쿤데보 공동묘지에 묻혔다.

– 재평가
2007년 이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후성유전학이 2010년대에 이르러서 과학적 타당성을 확증하게 되면서 리센코의 유전학 이론의 일부는 재평가되고 있다. 후성유전학에 의하면 CpG 섬(CpG Island)의 메틸기 결합 (이른바, DNA 메틸화)에 따라 염색질 (chromatin) 구조가 변형되면서 획득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 2019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도마뱀 연구로 ‘볼드윈 효과’ 입증되면서 표현형만이 아니라 선택압에 의해 개체의 유전형도 변형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 최신 학설에 따르면 리센코의 유전학 이론은 형질 변형에 관계하는 시간적 계기를 잘못 파악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사이비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연구 내용은 현대 후성유전학 및 볼드윈 효과에서 사회적 맥락 (선택압)이 형질을 변화시키는 원리와 본질적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 단계를 넘어 정밀한 검증도 없이 생존에 필수적인 농업 정책에 적용하려 한 부분은 전형적인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 저서
Heredity and Its Variability (1945)
The Science of Biology Today (1948)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