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9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 마오쩌둥 / 모택동 (毛澤東, 1893 ~ 1976) 타계
마오쩌둥 (중: 毛澤東,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겸 공산주의 정치인이다. 초대 중앙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자 (字)는 룬즈 (潤之), 융즈 (咏芝)이며, 호 (號)는 쯔런 (子任). 후난성 샹탄 출신. ‘마오쩌둥주의’를 창시한 사상가로도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다.

– 마오쩌둥 (毛澤東)
.출생: 1893년 12월 26일, 청나라 후난 성 샹탄 현사오산 구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 성 샹탄 시)
.사망: 1976년 9월 9일 (82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학력: 중화민국 후난 성 사오산초등학교 졸업, 중화민국 광둥 성 광저우둥산 중학교 수료, 중화민국 후난 성 창사 샹샹 중학교 수료, 중화민국 후난 성 창사 저우청 중학교 수료, 중화민국 후난 성 창사 제1중학교 졸업, 중화민국 후난 성 창사 제1사범학교 졸업
.정당: 중국공산당
.배우자: 뤄이슈 (사별), 양카이후이 (사별), 허쯔전 (이혼), 장칭 (1939 ~ 1976년)
.종교: 무신론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국가주석
.임기: 1945년 6월 19일 ~ 1976년 9월 9일
.후임: 화궈펑 (2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중앙인민정부 주석
.임기: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54년 9월 27일 ~ 1959년 4월 27일
.후임: 류샤오치 (2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제1대 주석
.임기: 1945년 8월 23일 ~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제3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69년 11월 12일 ~ 1976년 9월 9일
.전임: 류사오치 (2대) / 후임: 화궈펑 (4대)
초기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이후로 장제스와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 대항한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겸직과 1949년에서 1950년까지 중국 공산당 국가수반 권한대행과 1950년에서 1959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를 거쳐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 재직 중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959년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임 중국 공산당 제2대 국가원수 직위에 오른 류사오치와 갈등하다가 중국 공산당 부총리 린뱌오 등을 사주하여 196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키고 그 후 1975년에서 1976년 사망 직전까지 중국 공산당 국가주석 권한대행을 지내는 등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 쩌둥이 중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으로 약 4천 5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급진적인 정책이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 관계에 입힌 물적, 인적, 문화적 피해는 수치로 계산이 힘들 정도다. 1931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맡아 왔으며,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다.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중국 공산당 주석에 전임하며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행사했다.

○ 국공 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 국공 내전 승리와 중국 건국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항복한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본격적인 내전이 개시되었다. 초기국면에서 국민당군은 병력수에 있어서 공산군보다 월등히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초기에 유리한 국면을 선점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후쭝난 지휘하의 20만명의 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화민국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측에 유리하도록 전세가 기울었다. 군인들이 민중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한 군율도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군대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유중 하나였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창 강을 건너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2월에는 중화민국의 영역에 남아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결국 중화민국의 대륙 영토는 완전히 상실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대약진 운동과 백화제방·백가쟁명
마오는 건국 선포 직후 소련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에는 지주계급의 숙청이 전제조건이었으므로 수많은 지주들이 집회에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지에 수용되었다. 이는 새로운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반혁명세력을 뿌리뽑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1950년 5월 13일, 북조선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 쪽의 평화적 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 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후 한국 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여 막대한 전비 때문에 신국가 건설이 잠시 지체되지만, 1953년부터 소련의 차관과 기술의 원조를 받아 소련을 본뜬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특히 농업 생산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고, 공업 발전을 위한 기초산업을 건설하였다. 결과에 고무된 마오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고, 농업을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집단 농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공사가 마을마다 구성되어 농민들은 여기에 수용되었다. 또한 공산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1956년에는 공산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 방침을 내놓았지만, 이후 사태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데에 이르자 돌연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1957년에는 당내 사상의 자유도 탄압하는 반우파운동을 전개하여 반체제 인사의 숙청에 나섰다.
마오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수년안에 중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공업 국가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철 생산량을 늘려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대약진 운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기술의 미비와 농업의 경시, 게다가 기후 이상으로 인한 나쁜 작황으로 말미암아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였다.
– 주석 퇴임과 막후실권 행사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따르면 1958년에 마오는 참새가 벼를 먹는모습을 보고 분노하였다. 참새를 가리키며 사람이 먹는 곡식을 새가 먹고있다니!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 때문에 중국에는 참새잡이 광풍이 불어 1959년에는 제사해 운동으로 인해 중국 참새의 씨가 말랐다. 곤충을 먹이로 하는 참새가 없어지면서 각종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의 발생으로 4천만 명이 굶어죽었다. 1959년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전개한 마오를 비판하지만, 도리어 펑더화이 자신이 해임당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아사자와 처형당한 수는 약 2천 500만 명을 헤아렸다. 1959년 대약진 운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마오는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류사오치는 친정 의사를 내비쳤고,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와 수시로 갈등했다. 한편 스탈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마오는 이를 규탄하여 중소간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2년에는 티베트를 둘러싸고 인도공화국과 국경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서방에서 안보적 위협이 증가하자 중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실시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마오쩌둥은 1965년 3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조선의 최용건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의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 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 문화 대혁명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각각 국가주석과 당서기를 맡아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 대약진 운동의 뒷수습을 하면서 점점 마오를 제치고 실권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오는 점점 이름뿐이고 상징적인 위치로 몰려갔다. 그러자 마오는 류사오치의 실각을 위한 공작을 계속 하는 한편, 1966년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다시한번 실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다.
전국에서 마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이 일어났고, 이들은 “공산주의의 적”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사회 원로와 종교인 등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조리돌림을 행했다. 이러한 혼란하에서 마오의 의도대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다시한번 마오는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대량의 학살과 인민재판, 숙청으로 지적 물적 자원을 손실했고, 만력제를 비롯한 명나라, 청나라의 황제 및 고관들의 능과 묘소는 파헤쳐졌다. 저우언라이나 류사오치 등은 혁명에 부정적이었으나 입장 표명이나 언급을 회피했다. 문화 대혁명 기간 중 약 2천~3천만 명 이상의 학살로 인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문화 대혁명으로 반체제 인사와 야당 인사, 반마오쩌둥 인사를 제거한 그는 자신의 권력을 한층 강화하였고, 특히 류샤오치에 맞서 마오를 지지한 국방부장 린뱌오는 일약 마오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 린뱌오의 쿠데타 음모
린뱌오 등의 도움을 얻어 마오는 류샤오치의 실각음모를 꾸몄고, 196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국가주석직은 일시적으로 공석이 되었고, 부주석 둥비우와 쑹칭링을 주석대행에 앉힌 뒤 사실상의 주석직 복귀와 다를 바 없는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고 류샤오치 제거에 공을 세운 린뱌오를 후계자로 승인한다.
린뱌오가 후계자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승계시기를 둘러싸고 린뱌오와 마오의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린뱌오는 빨리 정권을 넘겨주지 않는 마오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린뱌오는 마오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 음모를 꾸몄고, (1971년) 마오는 남중국을 시찰하면서 돌연 린뱌오를 비난했다. 그러나 린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고, 린뱌오는 아들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린뱌오의 쿠데타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현재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상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린뱌오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그의 의심 증세는 강화되었다.

○ 생애 후반
– 4인방의 득세
린뱌오가 사망한 이후, 노쇠한 마오를 대신하여 정치 실권은 혁명원로들을 제치고 장칭 등 사인방과 캉성이 장악하였고, 린뱌오와 공자를 비난하자는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전개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1970년 헌법 수정 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실상의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이러한 와중에서 파킨슨병 또는 운동 뉴런 장애로 짐작되는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활동을 못했고, 공식 업무는 후처 장칭이 사실상 업무를 대행하다시피 했다.
1971년부터 72년에는 저우언라이 정무원 총리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어 사회갈등의 조정을 노력했다.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냉전 기류의 해소에는 일부 기여하였으나 그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벌써 문화대혁명 가치관과 이전의 질서 간 절충, 조정 노력은 균열이 보였고, 저우언라이가 사망하면서 사회갈등 조정노력은 실패하였다. 마오는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당원과 야심가들의 정치적 수사(修辭)에 묻혀버리고 말았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 1차 천안문 시위와 사망
1972년부터 병으로 고생하였다. 암살과 테러를 의심했던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는 것과 비행기 탑승을 주저하거나 꺼렸다고 한다. 와병 중이던 1976년 4월 4일 제1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대규모의 민중봉기였다. 4월 5일 분노한 시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관공서,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교통은 마비되었고, 플래카드에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과 측근인 야오원위안 등을 비판하는 구호와 시가 많이 게재되어 있었고, 뒤에는 마오쩌둥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까지 올라왔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마오쩌둥은 이를 덩샤오핑 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를 제거할 기회로 삼고 덩샤오핑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그러나 소요사태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마오쩌둥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가 격화되며 사태가 확산되어 가던 중 그는 진압을 시도했으나 군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그는 완전히 고립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76년 9월 9일 그는 베이징에서 죽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4세였다. 그의 유해는 자신의 시체를 매장하라는 유언과는 상당히 다르게, 화장하라는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찬가지로 시신이 보존되어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
– 사후
1981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후, ‘마오쩌둥의 문화 대혁명은 내란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고, 문화 대혁명 당시 학살과 소요사태의 책임을 마오쩌둥에게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에게 숙청당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덩샤오핑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자제하거나, ‘공은 공 과는 과’라고 선을 그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인 1999년 10월 1일에 발행되기 시작한 중국 런민비 제5판 100위안, 50위안, 20위안, 10위안, 5위안, 1위안의 지폐 앞면의 인물에 모두 마오쩌둥이 나온다.
○ 사상
– 신민주주의론
1938년 6월, 신화 일보 (新華日報) 발행의 마오쩌둥 은 반일 전쟁의 전략적 쟁점에 대해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사회 성격에 근거하여 혁명의 임무를 밝혔다. “중국 사회는 이미 하나의 식민지이자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이며, 중국 혁명의 주요한 적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이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의 혁명의 대상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이며, 중국 혁명의 성격은 무산계급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계급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다만 일반적인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신식의 특수한 혁명이다. “이런 혁명은 바로 중국과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혁명을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일컫는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자본주의 구민주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와 다른,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특정한 역사 시기에서 채택된 국가 형식으로 신민주주의 공화국의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중국의 사회 현실이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사회였기 때문에 혁명의 임무는 마땅히 반(反)제국, 반(反)봉건이어야 한다. 혁명의 임무는 곧 혁명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중국 혁명은 신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신민주주의 경제는 ‘자본을 제한하고 토지권을 고루 분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으며, 신민주주의 문화는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국, 반봉건 문화”를 가리킨다. 이 문화는 중화민족의 신문화이며 민족적, 과학적, 대중적 특징을 갖는다.
마오쩌둥은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 진리를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천과 완전히 꼭 알맞게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의 특징과 서로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적 형식을 거쳐야 비로소 쓰임새 있어지며, 결코 주관적, 공식적으로 응용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사회 현실, 즉 객관적 실재에 근거한 혁명을 주장한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혁명노선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민 혁명으로 시작해 도시로 확장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 서구나 소련과 같은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혁명노선은 성공적이었고, 마르크스주의가 중국 혁명의 실천과 서로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적 마르크스주의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곧 ‘마오주의’로 정립되었다.
○ 저서
지구전론 (持久戰論)
신단계론
신민주주의론
○ 영향
–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이론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 세력을 농민으로 삼아 공산주의 전파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산업노동자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본 레닌의 입장을 중국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실례로 그는 엉덩이가 없으면 사람이 서거나 앉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중국 공산당과 농민의 관계는 뗄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공산주의 이론과 군사이론은 각국의 혁명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에 호치민, 폴포트, 그리고 체 게바라와 같은 동남아나 중남미의 혁명가들은 그의 전략에 따라 농민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하는 농촌혁명과 게릴라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 마오쩌둥의 공산혁명 수출
마오쩌둥 이념의 주도하에, 개발도상국들에 공산주의 혁명을 지속적으로 수출하고자 계속 시도하였다. 마오는 해외에도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지에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하도록 하고 무기, 경제, 기술, 식량 지원 등을 하기도 하였으며 문화대혁명 때만 해도 ‘모주석어록’을 대량으로 해외로 영어나 스페인어 등으로까지 번역, 수출시켜 마오식 투쟁노선에 기반한 공산주의를 퍼트렸다.

○ 평가와 비판
– 평가
중국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오랫동안 실질적 영도자의 권력을 행사한 데 대해 지식인, 상공인, 고급 기술자들을 믿지 않았으며 노동자와 농민에게 권한을 주었다.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의 고귀한 전통 문화뿐 아니라, 소수 민족들의 제도와 문화도 대거 파괴됨으로써 문화 간 이질성을 약화시켰다는 평은 마오주의 추종자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미국의 언론인 에드거 스노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홍군의 소년병 같은 활동가들을 만난 이야기인 《중국의 붉은 별》에서 토론에서 박식함, 겸손함, 건강함 등이 그의 좋은 점이라 말했다. 마오쩌둥은 현실을 냉정하게 읽기도 하였으며 언론인 박형기가 쓴 덩샤오핑 전기에 따르면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소련파의 이론은 마오에게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 만을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주의)이 공식적 공산주의로 인정되었다.
– 비판
자신의 일방적 이념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하려고 한 광인(狂人)으로, 대량의 인류의 사망 및 인류에 대한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로 비판을 받을 때가 많으며 중국의 전통 문화(유교, 도교, 불교 등)와 중국의 사회구조의 유대 및 협력고리를 완전히 끊어놓은 폭력정치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의심이 많았고 그 자신을 30년 이상 성실히 보좌하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저우언라이조차도 의심했다고 한다. 자신이 사망하면 저우언라이가 집권할 것을 염려하여 그가 와병중 임에도 불구하고 약을 복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휴가를 주지 않고 오히려 과다한 임무를 부과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대규모 군사를 보내 한국과 국제사회와 오랜 갈등을 빚게 했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약 2천 5백만 명, 문화 대혁명으로 약 2천~3천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여, 그가 펼친 정책의 과단성, 무모함과 커다란 피해에 대한 지적과 함께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 관계에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혔다는 비판을 받는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