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12일, 미국의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 ~ 1988) 별세
장미셸 바스키아 (프: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그라피티 예술가이다. 아버지가 아이티계, 어머니가 푸에르토리코계다. 그는 1970년대 뉴욕에서 그라피티 그룹 SAMO의 일원으로 처음 이름을 날렸다. 이후 사이 톰블리, 장 뒤뷔페 등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1988년 8월 27세에 요절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 (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시와 그림의 전유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 비평을 긴밀히 결합시켰다. 또한 바스키아는 작품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개인에 대한 진실을 더욱 심오하게” 하면서 사회에 뿌리박힌 권력 구조와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계급 투쟁에 대한 지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출생: 1960년 12월 22일, 미국 뉴욕 뉴욕 브루클린
.사망: 1988년 8월 12일, 미국 뉴욕 뉴욕 그렛 존스 스트리트
.매장: 1988년 11월 3일, 미국 뉴욕 뉴욕 더 그린-우드 묘지
.시대: 현대 미술, 신표현주의, 원시주의
.영향을 준 인물: 앤디 워홀, 빠블로 삐까쏘, 사이 트웜블리, 로버트 라우센버그, 장 뒤뷔페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다. 통칭 검은 피카소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 세대 그래피티라이터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다.

○ 생애 및 활동
장미셸 바스키아는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사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밑으로 여동생 리잔 (Lisane, 1964년생)와 자닌 (Jeanine, 1967년생)이 있었다.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 (Gerard Basquiat, 1930년 ~ 2013년 7월 7일)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틸데 안드라데스 (Matilda Andrades, 1934년 7월 28일 ~ 2008년 11월 17일)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브루클린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맨해튼의 미술관에 같이 가고 브루클린의 미술관의 어린이 회원으로 등록시킴으로써 예술에 관한 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스키아는 4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조숙한 아이였고 천부적인 재능의 예술가였다.
그의 선생님이자 예술가였던 호세 마차도 (Jose Machado)는 그의 예술적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더욱 격려하였다. 11살 때, 바스키아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었다.
1968년 9월, 바스키아가 8살이 되던 해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차에 치어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비장절제술을 받았다. 회복될 동안 어머니는 가져다 준 그레이 해부학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미래에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증명하였다.
부모님은 그 해에 이혼하였고 자신과 동생들은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다.
가족은 브루클린 보럼 힐에서 5년 동안 살았고 1974년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이사하였지만 2년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13살이 되던 해 어머니 마틸데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병원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15살이 되던 해, 바스키아는 집을 나와 톰프킨스 스퀘어 공원의 벤치에서 잠을 잤고, 한 주 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0학년 때, 에드워드 머로 고등학교 (Edward R. Murrow High School)에서 중퇴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제라르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고 바스키아는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티셔츠와 손수 만든 우표로 자급자족하였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삶의 시작이었다.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스키아는 1980년대 당시 브레이크 댄스, 펑크족의 출현, 레게, 힙합 등의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렸다. 바스키아는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이 그린 낙서에 담긴 특유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만들었다.
이후 바스키아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 (City-as-School)에서 낙서 화가 알 디아즈 (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 (Same Old Shit의 약자)를 조직하고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 (시각예술학교)을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특히 이 시기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과 만났다고 한다. 이후 1980년 바스키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는데 전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었던 바스키아는 어느덧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유명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같은 여러 소문들과 갈등이 바스키아를 괴롭혔고 결국 바스키아는 워홀과의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워홀의 사망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스키아에게 큰 상실감과 심각한 마약 중독을 초래했는데 결국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 작품
바스키아는 마치 원시인이나 어린 아이같은 그림을 그린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바스키아의 그림을 인종 문제를 비롯해 당시 뉴욕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비극과 유머가 공존하는 풍자적인 화풍이 그의 아이덴티티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 세대 그래피티라이터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다.

- 대표 작품
뉴욕 맨해튼과 부룩클린의 미술관에서 예술에 대한 꿈을 키운 바스키아는 1970년대 뉴욕에서 그래피티 그룹 SAMO의 일원으로 처음 이름을 알렸고, 2017년 5월 18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982년작 ‘무제’가 1248억 원에 낙찰되며 앤디 워홀을 넘어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미술가가 되었다.
피카소로부터 시작된 추상주의가 캔버스를 벗어나 뒤샹을 중심으로 ‘레디 메이드’ 열풍이 불던 당시 바스키아는 원색의 추상적 심벌과 그래피티, 철학적 싯구를 담은 그림들로 ‘검은 피카소’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앤디 워홀, 키스 해링 등과 교류한 그의 그림은 데이빗 보위, 조니 뎁, 마돈나 등의 사랑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졌고, 제이지는 ‘Piccaso baby’라는 곡에서 바스키아를 언급하며 세상을 풍자했다.
1988년 8월 12일, 맨해튼 그린스트릿의 작업실에서 스물일곱의 청년 바스키아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그린 그림에는 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등 진실을 탐색하는 철학적 시선이 담겼다.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와 현대 비평을 긴밀히 결합시켜 자전적 이야기와 죽음을 주제로 지하철과 거리의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는 1985년 ‘뉴욕타임즈’ 표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Crown, 1982
우리가 흔히 아는 이 뾰족뾰족한 왕관이 바스키아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미국 아티스트 중 최고가 낙찰
작품 무제가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패션 이커머스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에 의해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인 110,500,000 달러로 낙찰되었다.

○ 기타
바스키아와 관계가 있었던 현대미술가 줄리앙 슈나벨이 전기 영화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영화배우 캐스팅이 어마어마한데 배우 제프리 라이트가 바스키아 역이였고 그의 우상이자 파트너였던 앤디 워홀은 데이비드 보위가 맡았고, 무엇보다도 바스키아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화가 알버트 마일로역을 게리 올드만이 맡았다.
여담으로 앤디 워홀을 우연히 본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강매하려고 했었던 일화가 있는데 워홀은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라며 거절을 했었고 그때 당시 바스키아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응수했었다.
미국의 록밴드 스트록스의 6집 The New Abnormal이 바스키아의 작품인 Bird on Money를 앨범 커버로 차용하였다.
빅뱅의 멤버 T.O.P의 솔로곡 DOOM DADA을 비롯한 수많은 힙합곡에서 언급되는 미술가 중 하나이다.
한국내 한 업체가 바스키아와 콜라보레이션한 골프의류를 런칭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클라이드앤, 컨버스 등의 업체가 콜라보 의류와 신발을 발매한 적이 있다.
그의 고향 브루클린의 NBA 팀인 브루클린 네츠의 2020-21 시즌 시티 에디션 유니폼은 그의 아트워크를 활용해서 만들어졌다.
홈 경기장 바클리스 센터의 코트도 그의 아트워크를 활용해 꾸미기도 한다. 그래서 코트의 한쪽에 바스키아의 왕관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미디어
1996년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스키아가 만들어졌다. 바스키아 역은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