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9일, 소련 방공군 장교로 핵 전쟁을 막은 군인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Stanislav Petrov, 1939 ~ 2017) 별세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Stanislav Petrov, 러: Станисла́в Евгра́фович Петро́в, 1939년 9월 7일 ~ 2017년 5월 19일)는 소련 방공군의 장교로, 1983년에 햇빛을 미국이 발사한 ICBM으로 오인한 소련 당국이 이에 맞대응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려던 것을 막은 일로 유명한 인물이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었다.

–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Stanislav Petrov)
.본명: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Stanislav Yevgrafovich Petrov)
.출생: 1939년 9월 7일, 소련 러시아 SFSR 블라디보스토크
.사망: 2017년 5월 19일 (77세), 러시아 프랴지노
.국적: 소련 → 러시아
.가족: 배우자, 자녀 2명
.직업: 군인
.최종계급: 중령
.복무: 1972년~1984년
.주요 참전: 1983년 핵무기 신호 오인 사건
.서훈: 1998년 UN 세계 시민상, 2012년 드레스덴상
1983년, 소련의 인공위성이 햇빛을 미국의 ICBM으로 잘못 인식하여, 핵전쟁이 일어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소련 군부에서 마저 핵무기의 발사와 이후에 이어지게 될 전쟁으로의 돌입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중에, 당시 상황을 담당했던 페트로프는 이 신호를 컴퓨터의 오류로 보고 핵전쟁 취소코드를 입력하여 핵전쟁을 막아냈다.
그러나 소련 군부는 이것을 기밀로 부치고 페트로프를 쫓아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인 1998년에 핵무기 오인 사건에 대한 기밀도 해제됐고, 이것이 독일 일간지 <빌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신문에서 페트로프의 이야기를 읽고 감명 받은 칼 슈마허는 러시아로 날아가 모스크바 근교에서 조용히 살던 페트로프를 만났고, 이후 그를 독일로 초대했다. 페트로프가 독일에 머무는 동안 세계 언론들이 그를 찾아 인터뷰했다.
슈마허는 “세계를 핵전쟁에서 구한 이 남자를 위해 뭐든 해야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면서 “지난 수십 년간 핵위협은 실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페트로프의 업적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UN에서는 그에게 세계 시민상을 수여하였다.
페트로프는 1983년의 사건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영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나의 일이었고 나는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2017년 5월 19일, 페트로프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가족 몇명만 참석한채 조용히 치러졌다.
페트로프의 사망 소식은 몇 개월간 알려지지 않다가 슈마허가 9월 7일에 페트로프에게 전화하면서 그의 아들이 사실을 말해준 덕분에 뒤늦게 알려졌다.

○ 생애 및 활동
1939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인 예브그라프는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제2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바 있다.
그는 키예프 항공기술학교를 졸업한 후 1972년에 소련 방공군 장교로 임관한다.
- 전 인류를 구해낸 위대한 판단
1983년, 그 당시 세계는 당장 핵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비판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아주 최악으로 치달았고 9월 1일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NATO는 1983년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골자로 하는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는데 대규모 군사훈련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대규모 핵공격을 기습적으로 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소련 정부는 생각했고, 소련은 그럴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며 맞대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듬해 2월에 사망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당시부터 지병으로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언제라도 지휘체계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 소련 지도부의 신경은 더 날카로웠다.
게다가 서독과 이탈리아에 배치된 미국의 퍼싱 II 준중거리 탄도미사일은 소련 본토를 사정권 안에 넣고 있었고 당연히 소련 군부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3년 9월 26일 0시, 소련의 세르푸호프-15 위성 관제센터에서 느닷없는 비상경보가 울렸다. US-K 오코 대탄도탄 조기경보 인공위성으로부터 “미국이 ICBM 1발을 소련으로 발사했다”는 경보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발사한 ICBM의 숫자는 5발로 늘어났고, 관제센터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소련의 모든 핵 미사일 사일로와 이동식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고, 당시 관제센터의 당직사령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졸지에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떠안게 되었다.
당시 크렘린과의 통신선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지구 최후의 날 기계가 아직 그에게 발사권한까지 주진 않았지만, 그가 스스로 판단한 끝에 발사명령을 내리거나 서기장에게 발사명령지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가 적국의 핵 미사일 발사여부를 감시하는 최신식 탐지용 인공위성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까지도 고려해보면, 반격에 관한 상세한 고찰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겨우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핵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상부는 전적으로 그의 판단을 믿었을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전 인류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경보는 울리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서는 핵전쟁개시 버튼이 깜박거렸다. 그러나 그는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모든 ICBM을 함께 발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컴퓨터가 잡아낸 것은 단지 5개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컴퓨터의 오류이거나 탐지용 인공위성의 판단오류일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핵전쟁 취소 코드를 입력한 다음,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컴퓨터의 오류인 듯합니다. (Кажется, это ошибка компьютера.)”

몇 시간 동안 긴장감에 감싸인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핵 미사일 발사 경보는 인공위성이 햇빛을 ICBM의 발사섬광으로 잘못 인식해서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내린 판단은 정말로 도박성이 짙은 것이었다. 일단 미사일 하나가 탐지된 상황에서, 소련 관제센터는, 관제소는 미사일 하나가 날아온다고 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경보가 오류인지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일이 다섯으로 늘어났고, 지상에 설치된 레이더는 지평선 너머까지 탐지할 수 없으니 미사일이 더 탐지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거기에 몇 개의 미사일만 감지됐다고 하더라도, 미사일 몇 발을 발사하면 나타나는 EMP 효과가 소련 측의 통신망 및 레이더망을 마비시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소위 ‘블랙 아웃’ 작전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페트로프는 핵미사일 탐지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문제가 이미 몇 차례 제기된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약 핵 미사일이 실제로 발사돼서 중앙과의 교신이 두절된다고 해도 알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컴퓨터의 오류로 보고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발적인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으니 영웅으로 칭송받아야만 마땅했을 것 같지만, 페트로프는 사건 직후 오히려 한직으로 내쫓겼다. 1983년 당시는 아직 냉전이 도사리고 있던 시기인지라 핵무기 시스템이 여전히 중요했고, 이 중요 시스템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곧 국가존망과 직관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해당 사건을 숨기기 위해 1급 기밀로 지정하여 페트로프를 표면적으로나마 내쫓은 것이었고, 페트로프는 그 조건을 내걸고 자신의 지위를 바친 셈이다. 물론 페트로프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린 후에 발생했던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고, 어느 쪽으로든 페트로프의 잘못은 없었기에 한직으로 내쫓기면서도 군인연금은 꼬박꼬박 지급되었다.

- 그 후
제대 후 모스크바 근방에서 군인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고 있던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건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후인 1998년이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1급기밀로 취급받던 사건이 1998년에 기밀해제돼 공개적으로 드러나면서 전 세계는 그를 칭송하고 감사했으며, 세계시민상과 유엔의 표창장, 2012년에는 드레스덴 상이 수여되었다.
2004년에 모스크바 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1983년에 자신이 한 일이 영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내 일이었고, 나는 단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2017년 5월 19일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을 영웅시하지 않았던 생전의 행적처럼 조용히 가족들 곁에서 세상을 떠난 탓에 4개월 뒤에야 그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영화 ‘세상을 구한 남자’ (The Man Who Saved The World)
세상을 구한 남자 (The Man Who Saved The World)는 덴마크에서 제작된 피터 안소니 감독의 2014년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 세상을 구한 남자 (The Man Who Saved The World)
.감독: 피터 안소니
.촬영: Kim Hattesen, Anders Löfstedt
.편집: Morten Højbjerg
.음악: Kristian Eidnes Andersen
.개봉: 2013년 4월 27일(Hot Docs)
.시간: 110분
.국가: 덴마크
.언어: 영어, 러시아어
2014년 10월 뉴욕 우드스톡의 우드스톡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
영화는 2가지 이야기를 교차해 소개한다. 첫 번째는 바로 1983년 그날의 상황을 재연하는 상황극, 두 번째는 이후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보내던 페트로프 중령이 늘그막에 자신의 업적이 알려져 뉴욕 UN 본부로 수상 차 방문하는 실제 기록 영상이다. 퇴역 후 불우한 일의 연속으로 주변에선 그저 괴팍한 노인으로 통하던 그의 당시 행적이 알려져 유엔 방문을 준비하는 데서 다큐멘터리는 출발한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미국 땅에 생전 처음으로 발을 디디고 여기저기를 여행한다. 그의 영웅적 행적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배우 케빈 코스트너는 페트로프를 자신의 영화제작 현장으로 초청해 인사하고, 훗날 이 다큐멘터리의 해설을 맡기에 이른다. 뉴욕에서는 로버트 드 니로나 맷 데이먼 등 여러 유명 인사를 만나고 유엔에서 수상소감으로 연설도 갖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날 밤의 선택과 결단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초라한 말년을 맞았다. 그의 영웅적 행보에 비하면 뒤늦은 치하는 너무나 부족할 뿐임을 그가 겪은 불행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
이런 묘사를 통해, 영화는 소외된 영웅의 말년 성공담이 아니라 (그를 좌천하고 탄압한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이 아닌) 평범한 당직군인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나 홀로 분투해야 했던 아이러니를 적절히 풍자한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위대한 일을 해냈지만, 정작 그의 조국에선 터부시당하고 그의 업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미국 여행 중 냉전 당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던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신분을 밝히자 경비하던 군인들은 경의를 담아 기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그곳에서 30년 전 체험했던 그날 밤을 상기한다. 과연 그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를…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는 홀로 은거하던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페트로프의 죽음은 그의 영웅적 결단이 15년 후에야 밝혀진 것처럼 사망한 지 4달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를 제작한 독일 감독이 그의 생일을 맞아 안부전화를 했다가 2017년 5월에 그가 작고했음을 확인하고 외신에서 기사화되었다. 이후 1983년 9월 26일 그날 밤 외에도 지난 냉전 시기 동안에 미국과 소련 양쪽에서 유사한 사건이 수십 차례 일어날 뻔했음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