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6일, 독일의 제6대 연방총리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 (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 2017) 별세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 (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년 4월 3일 ~ 2017년 6월 16일)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의 총리와 (1982 ~ 90년은 서독, 1990 ~ 98년은 통일 독일의 총리)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의 총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일 총리이기도 하다. 탁월한 국제정치감각을 바탕으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가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단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총리. 이른바 ‘통일 재상 (Kanzler der Einheit)’이라고도 불렸다.

– 헬무트 콜 (Helmut Kohl)
.출생: 1930년 4월 3일, 바이마르 공화국 루트비히스하펜
.사망: 2017년 6월 16일 (87세), 독일 라인란트팔츠주 루트비히스하펜
.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정당: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배우자: 한네로레 콜 (2001년 사망), 마이케 리히터 (2008년 이래)
.자녀: 2명
.종교: 로마 가톨릭
*독일의 연방총리
.임기: 1982년 10월 1일 ~ 1998년 10월 27일
.전임: 헬무트 슈미트 / 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라인란트팔츠의 총리
.임기: 1969년 5월 19일 ~ 1976년 12월 2일
.전임: 페터 알트마이어 / 후임: 베른하르트 포겔
콜의 16년 남짓을 달하는 총리 임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고, 전 세계 어디에도 민주적인 투표로 당선된 정부수반들 중 그보다 오래 재임한 사람은 없다.
특히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감독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업적은 널리 칭송 받고 있다.
또한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같이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초석을 다져 유럽 연합을 만든 인물로 여겨진다.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빌 클린턴은 콜을 “20세기 중, 후반의 가장 위대한 유럽 지도자”라고 표현하였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1930년 4월 5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스하펜 (Ludwigshafen)에서 경찰관의 삼남으로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집안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 이후에도 가톨릭 중앙당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아있었다.
그의 형 중 한 명은 2차 대전 당시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헬무트 콜 본인 역시도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면서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로 군 경력을 마감하게 됐다.
– 정치 입문
1946년 기민당의 설립 시기부터 청년 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 콜은 연방하원과 같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은 전임 총리들과는 달리, 고향인 라인란트팔츠의 주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쌓기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39세의 나이로 라인란트팔츠의 주지사로 당선되는데,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역대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다.
1973년에는 기민당의 총재 자리에도 오른 콜은 야심만만하게 1976년의 총선에서 당시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실제 선거에서도 전체 정원에서 49%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원내 제 1당 자리를 되찾았지만 독일 사회민주당과 자민당이 연정을 연장하는데 합의하면서 총리에 오르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 직후 콜에게는 정치 인생상 최초의 고난이 닥친다. 바로 당 내 라이벌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총리 후보 자리를 뺏기고 만 것이다.

– 총리로의 길
하지만 고난이 기회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0년의 총선에서 슈미트에게 도전했던 슈트라우스는 1976년 콜이 얻었던 의석수에서 무려 20석을 잃는 대패를 당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제 기민당 내에서 라이벌은 사라지게 된 것. 그리고 1982년이 되자 부자증세와 노동시장에 대한 정책을 놓고 연정파트너였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격하게 충돌했다.
콜은 기민당과의 새 연정 정부 구성 협상에 진지하게 임한다. 자민당의 후원을 손에 얻은 기민당은 1982년 10월 1일의 불신임 선거에서 여유롭게 헬무트 슈미트 내각을 붕괴시키고 사흘 뒤 새 기민-자민당 연정 내각의 총리로 콜을 선출한다.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렇게 불신임을 통해 상대방을 낙마시키고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당시 독일내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자민당은 불과 한 달 전의 신임선거에서는 슈미트에게 지지를 던졌다가 한 달만에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독일 내에서는 이러한 집권 과정이 합법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사민당 일부에서는 헌법 재판소에 이러한 행위가 위헌이라고 제소까지 하기도 했다.

– 서독의 총리로서 (1982 ~ 1990)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를 자처했던 만큼 그는 당연히 아데나워의 외교노선을 선호했고, 이는 그가 미국과 영국보다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위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가 지스카르 데스탱과 평생에 걸쳐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콜은 프랑수아 미테랑과 정치적으로 동반자 관계였다.
특히나 1984년 베르됭에서 베르됭 전투의 전몰자들을 기리면서 미테랑과 콜이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은 단순히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초석을 닦은 장면으로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고 아데나워의 외교노선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어서 1987년에는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정상회담을 갖으며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계승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시기 콜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는데 바로 ‘늦게 태어난 자의 은혜’ (Gnade der späten Geburt)가 그것이다. 설명하자면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세대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이 발언은 당연히 제3제국 시기 적극적인 반나치활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비난받았고 서독 내부에서 총리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을 뿜었었다.
어쨌든 콜은 무난무난하게 1983년의 선거와 198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선 총리가 됐지만 5년 뒤 빌 클린턴의 선거문구가 보여주었듯이 대중들은 화려한 외교적 행보보다는 자신들의 지갑에 더 관심이 있는 법이었고, 대중적으로나 당내에서나 콜의 인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자매정당인 기사연과 연정 파트너 자민당도 콜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9년에는 당 내의 반대파들이 콜 대신에 새로운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 시기 콜이 무력하게 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했다면 그는 그저그런 총리로 역사속에 남았겠지만, 하늘은 콜의 편이었던지 거대한 역사적인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독일의 재통일 (Wiedervereinigung)이었다.
– 통일 독일의 첫 총리 (1990 ~ 1998)
1990년 3월에 동독에서 자유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예상 외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민당에 비해 조속한 통일과 화폐통합을 내세운 콜의 공약이 결국엔 판세를 뒤엎어버리는데 성공, 기민당과 자민당이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통일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그 영향으로 5월에 치러진 동독 지방선거에서는 기민당이 부진했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동서독 1:1 마르크 교환정책을 펼치면서 동독 지역주민들의 재산을 보전시킴과 동시에 외교적으로도 강대한 독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과 폴란드를 구 영토에 대한 영유권 완전 포기선언으로 설득에 성공하면서 통일에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마침내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통일후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동서독 통일에 따라 독일 총리관저인 연방총리청를 신축하게 되었는데, 헬무트 콜은 당시 독일 국내의 반발을 물리치고 유리궁전 양식으로 지었다.

–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정계 은퇴
그러나 급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콜 총리는 빠른 속도로 동독과 서독 양 측에서 인기를 잃어나가기 시작했다.
동구권이 체제 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금리인상과 긴축정책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 복지정책이 후퇴하는 상황이 겹치고 구매력이 이전보다 더욱 더 떨어지면서 동독 물건이 잘 팔려나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소련마저도 붕괴되는 바람에 동독 물건을 팔 만한 수출시장 자체가 꽉 막히다시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독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서독이나 타 서유럽 국가에서 잘 팔리지도 않았고, 거기다 동서간 인건비 격차도 줄어나가는 바람에 동독이 가지고 있던 값싼 인건비라는 장점도 급속히 상실되면서 버티기 힘들어졌다.
결국 경쟁력을 상실한 동독 지역 기업들은 줄이어 파산하고 민영화와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동독 지역 실업률은 30%대에 이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마침 통일 직후 공공요금 현실화라는 명목아래 공공요금이 서독 수준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겹치던 참이었다.
동독인들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며 분노했고, 서독인들은 서독인대로 통일에 대한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채 세금만 올라가면서 불만에 가득찬 상황이 되며 동서간의 심리적 거리는 통일 전보다도 훨씬 벌어졌고 헬무트 콜의 지지율도 급속히 하향세를 타게 된다.
그럼에도 1994년 총선에서 간신히 4선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사민당이 연방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콜의 정치적 운신에는 엄청난 제약이 걸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선에 도전한 1998년 총선에서 결국 콜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참패,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끝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통일과정에서 기민당이 막대한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조달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 시기 헬무트 콜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이 시기 당대표가 된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을 ‘나의 소녀(mein Mädchen)’라 부를 정도로 총애했던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인 콜을 아주 냉정하게 당에서 사실상 쫓아낸다.

– 이후의 삶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한 콜은 뇌졸중으로 투병했다. 2015년 11월 10일 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가 타계하면서 생존한 전임 독일 총리로는 최고령자가 되었다.
2017년 6월 16일(현지시각), 자택에서 사망했다.
7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 의사당에서 유럽연합장(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후 라인강을 따라 그의 고향인 독일 슈파이어로 옮겨져 장례 미사를 치렀고,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 정치적 견해
콜은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을 통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또, 그는 독일 통일을 위한 노력도 함께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 민주주의 전임자의 동방 정책을 계속 이어가긴 했지만, 소련을 약화시키기 위해 레이건의 보다 공격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 대중의 인식
콜은 서독 정치에서 완고한 반대에 직면하였고, 또한 자신의 출신지와 실제 키, 단순한 언어에 대해 조롱당했다. 루이 필립의 역사적인 프랑스 만화와 유사하게, 한스 트락슬러 (Hans Traxler)는 좌익 풍자 저널에서 콜을 타이타닉의 배로 묘사했다.
독일어 단어 “Birne” (“배”)가 콜 총리에 대한 별명과 상징이 되었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콜 수상을 언급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 분배구조와 복지개혁에 주력하며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 명예 총리
헬무트 콜은 수많은 상과 찬사뿐만 아니라, 박사 학위 및 국적 (시민권) 명예 타이틀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그는 독일과 프랑스의 우정과 유럽 연합 (EU)에 대한 기여에 대해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샤를마뉴 상을 받은 공동수상자였다.
1996년, 콜은 스페인의 펠리페에서 국제 협력에 대한 아스트리우스 왕자 상을 받았다.
1998년 콜은 유럽 통합과 협력에 대한 그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 받아 유럽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다.
○ 저서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콜총리 회고록, 해냄출판사, 1998.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