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터키, 한국 방문기 (3)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2일~11월 1일 (그리스·터키, 10박 12일), 11월 2일~4일 (한국 강진 다산 유배지와 안동 퇴계 유적지, 2박 3일)에 ‘2019 인문학여행’을 26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이에 방문지인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한국 일정중의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고린도와 올림피아, 그리고 파트라스
10월 26일, 아침이 되어 눈뜨니 페리는 밤새 달려 고린도에 와 있었다. 짐들을 챙겨 하선하고 우리 일행은 아침식사를 나눴다.
오늘은 고린도와 올림피아 일대를 둘러본다. 고린도에서는 고린도운하,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 유적지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등을 방문하고, 이어 올림피아로 이동해 최초의 올림픽을 시작한 곳, 성화채화 터, 김나시오, 올림픽 대경기장과 신전터 등을 둘러본다. 그리고 파트라스 인근에서 1박한다.

고린도
밤새 페리로 달려 크레타섬에서 나와 그리스 남쪽 고린도에 이르렀다.
.고린도 (코린토스) 개관
고린도 / 코린토스 (Κόρινθος)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이자 현대의 도시이다.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로부터 78킬로미터 남서쪽이고 사로니코스 만과 코린토스만을 가르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다. 고대에는 이 지협의 해안을 따라 험준한 암초를 피해 선박이 돌아갔으나 지금은 코린토스 운하가 놓여있다.
한글 성서에서는 코린트를 고린토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 고린도 (개역한글성서/대한성서공회), 코린토 (천주교 ‘성경’/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로 음역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문화인류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이희수 한양대교수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트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며, 전도 기간 동안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작성하였다. 사도 바울은 2년간의 연금 생활을 마치고 로마, 고린토, 테살로니카 등에 세운 그의 교회들을 돌아본 것으로 추정된다.

.고린도 운하
고린도 입구에서 길이 6.34Km의 고린도운하를 만났다. 고린도만과 살로닉만을 연결하는 운하로 줄리어스 시저, 칼리큘라 황제 등이 계획을 세웠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네로 황제도 공사를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한다. 운하가 완성되기 전에는 배를 통나무에 끌어올려 육지위로 이동하는 육지운하 (디올코스) 방식이었다.


.고린도 박물관
고린도박물관의 유적들은 매우 역사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문명은 그리스의 것인데 유물은 로마 때의 것이 많아 보였다. 고린도박물관은 4개의 방과 회랑, 앞마당으로 나뉜다. 1전시실은 선사기대 유적들, 2전시실은 아르카이크 시대와 고전의 중요유물 전시, 3전시실은 로마, 비잔틴, 프랑크시대의 동상들과 모자이크 등 전시, 4실은 회당으로 AD 2세기경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앞마당은 로마시대 목없는 동상들이 전시되어있다.

.고린도 유적
고린도는 고대 고린도 (Old Corinth)와 현대 고린도 (New Corinth)로 구분된다. 옛 고린도는 주후 1858년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폐허로 유적만 남아 있다. 옛 고린도에서 북서쪽 5.6km지점 고린트만 기슭에 새로운 고린도를 건설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코린트 (Corinth)라고 부른다.
성경의 기록에는 옛 고린도에 관련된 내용이다.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약 80km지점,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길목에 자리하여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국제적 상업의 중심지였다.
고린도는 호메로스시대 부터 항구도시가 아니면서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두 바다를 연결 짓는 서항 (西港)의 레기움과 동항 (東港)의 겐그리아의 두 항구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국제 무역의 상업 중심지로 번창했다.
고린도 유적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남은 유적만으로도 그 화려함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고린도 유적지 중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은 비마터와 아고라가 있는 로마유적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고린도 언덕
일찍이 헬라문화에서 로마문화로 이어진 혼합된 문화의 도시였다.
주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 (Mummius) 장군은 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후 주민들을 추방했다. 그리하여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후 100년 동안 재건되지 못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주전 44년 쥴리어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는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상업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여 고린도를 재건하고자 자유민으로 구성된 식민이민단 (Colony)을 끌어 들였다. 이때 상인들인 그리스인, 로마 제국의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고린도는 부흥, 발전하면서 과거와 다름없는 번영된 도시가 되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2차에 걸쳐 일시적으로 추방하는 칙령 (주전 41년과 19년)에 의해 고린도에 들어와 유대인이 증가되어 공동체를 이루었다.
주전 27년 고린도는 로마속령 아가야 (Achaia)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Claudius)때 갈리오 (Gallio, 주후 51-52년)가 주후 51년 7월 아가야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후 고린도에 주재하여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혼자서 고린도를 방문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온 실라, 디모데와 얼마후에 합류했다 (행 18:5).
이 지역에 해발 600m의 아크로코린투스 (Acrocorinthus, 고린도언덕)라고 부르는 바위산이 평지에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그 정상에는 어느정도 커다란 도시가 세워지기에 족한 넓이의 분지로 형성된 곳에 고린도가 위치했었다.
고린도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아테네를 압도했으며 호화스러운 도시였다. 고린도의 아크로코린투스에 비너스 (Venus, 아프로디테) 신전이 세워져 그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졌으며 산성에 무녀가 무려 1,000명이나 되고 부도덕한 행위가 성행하여 “고린도인”이라고 하면 곧 음행과 방탕의 대명사가 되었다.
코린토스 고대 유적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곳은 시지프스의 신화가 깃들어 있는 산이다.
시지프스가 지하의 신 하데스의 말을 안듣고 살아났으나 결국 형벌을 받았다.
이 산의 꼭대기로 바위를 끌어 올리고 그것이 내려가면 다시 올리고, 지금도 반복을 하고 있다는 전설이 어린 산이다.
알베르 까뮈는 이 신화에 착안하여 시지프스신화에 대한 단편을 썼다.

올림피아
고린도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고린도 유적지를 나오며 단체사진을 찍고 유적지 인근에 위치한 그리스 식당에서 점심을 나눴다. 점심식사 후 우리 일행은 올림피아로 향했다.
.올림피아 개관
올림피아 (Ὀλυμπία)는 그리스 서그리스 주 엘리스 현 아르혜아 올림비아 (Αρχαία Ολυμπία)에 있는 유적지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776년 이래 기원후 349년 폐지되기까지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있었던 제우스 신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으며, 고대 올림픽 자체가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사의 일환이었다. 올림픽의 발상지였으므로 근대 올림픽의 성화 (聖火)도 바로 이 곳에서 채화된다.
올림피아 (Ολυμπία)는 엘리스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성소로, 고전기에 델포이의 피티아 경기에 비견되던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두 경기는 4년마다 한번씩 열렸으며, 올림피아 경기의 기원은 기원전 77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후 349년, 1170년 만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올림피아 경기를 이교의 잔재로 여겨 폐지를 명하였다.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그리스 문명의 산실인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올림피아는 무려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임에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스 내에선 최대 규모의 유적일 것이다.
올림피아는 원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신중의 신’인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의 부인인 헤라신전도 있다.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신전으로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 중 가장 오래되었다.
지금 올림피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헤라신전일 것이다. 헤라 신전 앞 광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4년마다 한번씩 채화한다.
그래도 올림피아의 중심은 단연 제우스 신전이다. 올림픽 자체가 원래는 제우스신을 숭배하는 올림피아 사람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벌였던 행사였다.
비록 지금은 수많은 돌덩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지만 제우스 신전의 원래 크기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만 하다.

.올림피아 경기장
처음에 올림픽은 달리기만 있었다. 192.3m를 빨리 달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리스의 폴리스 대부분이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에 올림피아엔 선수들의 숙박시설도 대폭 건설되었다.
고대 올림픽의 특징은 지금의 개막식, 폐막식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올린 뒤에 5개의 종목을 3일에 걸쳐서 실시된다. 개최 기간은 제우스 신에 대한 기념제, 감사제를 포함한 5일 간이다.

시간이 지나며 종목수도 늘고 보상금도 늘어났다.
각 종목별 우승자에게는 월계수로 만든 관이 수여되며 보상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승자에 대한 지나친 보상으로 인해, 올림픽은 세월이 흐를수록 타락해갔다.
특히 고대 올림픽 후반에는 선수, 심지어 국왕마저도 뇌물과 반칙을 주로 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의 하나로서 참가가 허용되었지만, 후에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도 올림픽은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서기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식 선포하면서, 이교도의 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경기를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고대 올림픽도 금지되었다.
마지막 293회 고대 올림픽은 다음해인 393년에 개최되었다.
이후 로마의 이교도 신전 파괴령에 의해 고대 올림픽 경기장을 파괴하였고, 기록을 지워버렸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고대 올림픽은 369년에 열린 287회 고대 올림픽으로, 그 해의 우승자만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올림피아는 벽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일행은 고대 올림픽 경기장을 뛰며 고대 올림픽 참가자들의 모습을 재현해 보았다.



파트라스
고린도와 올림피아를 돌아보고 뛰다보니 어수룩한 밤이 되었고 우리 일행은 파트라스 근처의 호텔로 이동해 저녁을 나누고 1박했다.

.파트라이 개관
파트라이는 펠로폰네소스반도 북쪽 기슭의 이오니아해 (海)와 코리트만 (灣)을 연결해 주는 파트라스만 (灣)에 접해 있는 항만도시이다. 그리스 최대 도시 중 하나이며, 상업·제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식품가공·조선·섬유·벽돌·타일 등의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주요 수출품은 커런트 (건포도의 일종), 담배, 올리브, 올리브유, 무화과과, 감귤류, 포도주, 브랜디, 양가죽 등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기원전 3세기 제2 아카이아동맹의 12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파트라이는 악티움해전 (BC 31) 이후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상업 활동이 활발한 항구로 발전했다. 15세기에는 단기간 동안 베네치아인 이 점령했으며, 베네치아인 들과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우다가, 후에 투르크인들이 통치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인의 2차 점령기간인 1687∼1715년을 제하고는 그리스독립전쟁 말인 1828년까지 투르크인들이 통치하였다. 독립전쟁 때 도시는 투르크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그 후 직사각형 구획의 현대도시로 재건되었다.
철도로 코린토스 (코린트), 아테네, 칼라마이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와 이탈리아 동부 해안 사이를 오가는 카페리가 통과한다. 파트라이대학교 (1964)가 이곳에 있다.

.파트라스와 예수의 처음 제자 안드레
파트라스 인근에는 예수의 처음제자 안드레의 순교지도 있다.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의 영향력으로 인해 안드레는 로마 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이남 지역인 아카이아 (오늘날 그리스 전역)의 주파트라스 시에서 체포되어 에게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X자형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로 부르게 되었다.
파트라스에는 안드레 순교성당 (Saint Andrew Church)이 있다.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프스 (Josephos, Flavius 37/38 ~ 100)에 의하면 안드레는 에베소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런데 가롯 유다 대신 제자로 뽑힌 맛디아가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를 구하려고 항해를 하여 흑해 연안 코가스 산맥이 있는 스구디아 (南 러시아)에 도착한다. 기적으로 맛디아를 구출하고, 식인종도 거의 다 교화 시킨다. 그래서 스구디아와 비잔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그 후에 그의 전도 공헌은 위경인 ‘안드레 행전’에 의해 알게 된다. 멕 버니의 기록에 의하면 “거룩한 전승에 안드레가 코카서스 산 속 (러시아 조지아)에 가까운 스구디아족에게 전도하며 흑해 북편까지 갔다가 비잔티움 (이스탄불)에 돌아와 스라키스 감독에게 안수했다. 시노페에서는 식인종들이 잡아먹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안드레는 사도의 직분을 계속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제들과 감독들에게 안수했다. 비잔티움에서 그는 중요한 전도지인 그리스, 가드레이스, 마케도니아, 고린도만을 지나 파트라스에 이르렀다. 안드레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후로 전했다. 파트라스 총독이 안드레의 전도에 격노해서 기독교 신앙을 말살하고자 안드레를 체포하고 법정에 세웠다. 그가 법정에서 그 부당성을 항의하자 총독을 안드레에게 십자가형을 명했다.
파트라스에는 안드레의 순교지, 파트라스 안드레아대성당 등이 있으며 안드레아스대성당에는 사도 안드레의 순교화가 있다. 안드레가 아가야 지방 파트라스에서 전도할 때에 치유의 기적이 많았다. 총독 에제아테스의 아내 막시밀라가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을 안수 기도로 고쳐 주었다. 이로 그녀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또한 에제아테스의 형제 스트라토클레스의 하인이 중병에 걸리자 하인의 병도 고쳐주었다. 이 기적으로 스트라토클레스의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본래 기독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에제아테스는 식구들이 기독교인이 되자 분통을 터트려 안드레를 옥에 가두고 십자가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안드레에게 감동을 받은 이들이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안드레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순교 하였다. 안드레는 네로황제 재위 60년 11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안드레 순교화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파트라스 인근 호텔에 묵으면서 침대에서 빡빡한 일정속에 보낸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고린도는 나름 많이 공부가 된 지역이라 자신했는데 현장에서 유적을 보니 규모가 생각이상이다. 고린도 입구에서 만난 고린도 운하를 통해 고린도 지역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유용한 곳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박물관의 유적들은 매우 역사적이었고, 시대별로 전시해 이해하기가 좋았다. 문명은 그리스의 것인데 유물은 로마 때의 것이 많아 보였다. 앞마당에 누군가의 얼굴상을 붙이려 준비된 로마시대 목없는 동상들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남기려는 욕심은 과거나 현재에도 변함없음을 느꼈다. 고린도 유적을 둘러보니 유적들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남은 유적만으로도 그 화려함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올림피아에서는 현대 스포츠 정신보다는 종교성을 더 느꼈다. 그리스의 수니온곶 끝자락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은 가지 못해 바이런의 낙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테네에서 에게해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70㎞를 가면 수니온 곶에 이른다. 그 언덕 위에 15개의 도리스식 기둥만이 남아 있는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그 무너진 신전 기둥의 하나에 바이런의 낙서가 쓰여 있다고 한다. 그 낙서의 내용은 ‘나는 결코 비겁하게 살지 않는다. 백조같이 살다 죽겠다’는 말이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