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10월 모임은 ‘강연과 3차 인문학여행’으로
린필드 목요모임 ‘지옥은 진짜일까? 지옥에 대한 오해와 진실’ 강연과 10월 16일부터 3차 인문학여행 … 다음모임은 11월 6일 (목, 오후 7시)
리드컴 수요모임은 10월 3학기 중간방학 … 다음모임은 11월 12일 (수, 오전 10시), 주강사 홍길복 목사 강연으로 [10월 2일 강연 전문포함]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2025년 10월 모임을 린필드에서 10월 2일 실시했다. 리드컴 수요모임은 10월 중간방학 기간이다.
다음 리드컴 수요모임은 3학기 중간방학후 새벽종소리 명성교회 (리드컴 소재)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주강사로 11월 12일(수) 오전 10시에 모인다.

린필드 목요모임은 10월 2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주경식 교수를 강사로 ‘지옥은 진짜일까? 지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성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주제로 모임을 가졌다.
10월 2일 모임에서 강사로 선 주경식 교수는 ‘지옥은 진짜일까? 지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성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란 주제로 강연하며 서두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때문에 10년, 100년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신앙을 갖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문화적 환경으로 선택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200년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확률은 0.5%가 되지 않는다. 300년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그 확률은 0 % 가 될 것이다. 입장을 바꿔 현대의 아프카니스탄에서 태어났다면 이슬람신앙을 가질 확률은 95%, 역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질 확률은 5%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때 실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보다는 각자가 태어난 시대와 지리적 환경, 국가의 종교나 문화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 개인의 결단이 차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몇 년 혹은 몇 달 살지 못하고 죽음을 경험한 유아들의 경우에도 살았을 때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한번의 종교적인 선택 때문에 또는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 또는 자기의지가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죄 때문에 10년이나 100년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해진다면 이것만큼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에 어울리는 일일까?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까?” 문제제기 후 ‘지옥이란?’ ‘구약의 지옥’ ‘신약의 지옥’ ‘영혼 소멸설’ ‘전통적인 견해’ ‘다양한 현대적 견해’ 등의 순으로 살폈다.

이어 결론부에서 “사실 지옥은 정의할 수 없는 용어다. 랍비 카츠에 따르면 성서의 지옥은 형이상학적인 곳이다. 즉 지옥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지옥을 물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말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는 것이다. 이곳이 나쁜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지옥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성서에서 지옥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관한 이해를 돕는 용어이다. 하지만 지옥을 불타는 공간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죄가 심판받는 것은 분명 하지만 지옥형벌에 대한 어떤 물리적 서술도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에 계속 언급되고 있고, 예수가 12차례 인용한 게헨나 (γέεννα)에 대해 성서는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며 “이 구절에 의하면 지옥은 죽어서 영혼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몸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옥은 악한자의 영혼이 가는 곳이다. 그러나 몇몇 성서 구절의 증언에 의하면 ‘게헨나’는 몸과 영혼이 같이 가는 곳이라는 증언은 당혹스럽다. 성서의 이러한 당혹스러운 증언은 지옥에 대한 개념이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완전히 통일되어 있지도 않고, 여전히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약이후에 ‘지옥’에 대한 개념은 더욱 발전하여 외경 “베드로 묵시록”이나 “바울 묵시록”에서는 죄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그 죄에 대하여 지옥에서 받게 될 형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중세에 와서는 단테의 <신곡>에 이르러, 지옥은 문학을 넘어 중세 문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거대한 개념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한가지는 지옥개념의 발전 전 과정을 아울러 체계적이고 일관된 지옥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지옥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의 반영이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않다. 예수께서 사복음서를 통해 게헨나에 대해 12번을 언급하였지만, 게헨나가 말씀의 주제가 아니었다. 예수는 당시 한창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던 생생한 문화적 요소인 ‘게헨나’를 인용하여, “죄짓지 않도록 조심하라” “정직하게 살라” “약한자를 돌보아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와 같은 교훈을 주시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경고를 위하여 ‘게헨나’를 언급한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게헨나-지옥’을 인용하여 말씀하는 장면은 12번 언급되고 있지만 ‘게헨나-지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없다. 또한 누가복음에 따르면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자로 고백했기 때문에 갔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다 (눅 16: 19-31). 부자도 예수를 안 믿었기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다. 누가복음 기록자의 관점에 의하면 오히려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에 갔고, 부자였기 때문에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구원’ ‘지옥’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그동안 얼마나 신학적으로 오용되어 잘못 사용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의 복음은 우리가 흔히 듣는 천국-지옥의 이분법에 담아낼 수 없다. 예수의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관심은 지금-여기에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며 강연을 마쳤다.

한편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오는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중국으로 ‘3차 인문학 여행’을 떠난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이 주관하는 제3차 인문학여행 ‘중국 편’은 오는 10월 16일 (목)부터 26일(일)까지 9박 11일간 진행된다.
이번 여정에는 인문학교실 회원과 관심회원 등 30명이 참가해 중국의 다섯 도시 (베이징, 항저우, 우시, 소주, 상하이)를 탐방하며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이룬 황하문명의 현장을 인문학의 눈으로 조망한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지난 7년 동안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 다양한 고전을 함께 공부하며 “사유하는 공동체”로 성장해 왔다. 이번 인문학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배움과 성찰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학문적 탐방이자 공동체적 여정이다. 주경식 교수는 “중국은 동서 문명이 교차하며 근대적 자의식을 형성한 현장이다. 이번 여정은 그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 사회, 신앙을 새롭게 성찰하는 인문학적 순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린필드 목요모임은 3차 인문학여행 후 11월 6일 (목) 오후 7시,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에서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은 “우리 시대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그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분들을 초청합니다. 현재 린필드에서는 목요일 (1, 3주 목요일 오후 7시)에, 리드컴에서는 수요일 (2, 4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모임을 합니다”라고 취지를 밝히며 초청했다.
다음 리드컴 수요모임은 3학기 중간방학후 새벽종소리 명성교회 (리드컴 소재)에서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를 주강사로 11월 12일(수) 오전 10시에 모인다.

시드니인문학교실 10월 모임 안내
– 린필드 목요모임
.일시: 10월 2일 (목) 오후 7~9시 *16일 모임은 3차 인문학여행
.2일: 주경식 교수 (주강사), 주제: 지옥은 진짜일까? — 지옥에 대한 오해와 진실- 성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16일: 3차 인문학여행
.장소: 린필드한글사랑도서관 (김동숙 관장, 454 Pacific Hwy, Lindfield)
(대면과 비대면 병행해 모임)
.문의: 주경식 (0401 017 989, drjks709@hotmail.com)
– 리드컴 수요모임은 3학기 방학후 4학기 개강
.4학기 개강일시: 11월 12일 / 11월 26일 (수) 오전 10~12시
.주강사: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장소: 명성교회 새신자 교실 (31 East St, Lidcombe)
.문의: 천옥영 0422 712 235
시드니인문학교실 10월 2일 강연 전문
지옥은 진짜일까? 지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성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

1. 문제제기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때문에 10년, 100년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신앙을 갖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문화적 환경으로 선택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200년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확률은 0.5%가 되지 않는다. 300년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그 확률은 0 % 가 될 것이다. 입장을 바꿔 현대의 아프카니스탄에서 태어났다면 이슬람신앙을 가질 확률은 95%, 역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질 확률은 5%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때 실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보다는 각자가 태어난 시대와 지리적 환경, 국가의 종교나 문화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 개인의 결단이 차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 몇 년 혹은 몇 달 살지 못하고 죽음을 경험한 유아들의 경우에도 살았을 때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한번의 종교적인 선택 때문에 또는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 또는 자기의지가 아니라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죄 때문에 10년이나 100년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해진다면 이것만큼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에 어울리는 일일까?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때문에 기독교를 거부한 사람 중에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있다. 찰스 다윈은 “무한하고 영원한 지옥 징벌을 내리는 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항변한다. 다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지옥’형벌에 처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고발한다.
그래서 그간 기독교 안에서도 영원한 지옥을 받아들이기 난감한 이들이 영혼소멸설, 만인 구원설, 연옥설 등의 신학적 제안들을 해왔다. 그 중에서 연옥설은 개신교에서는 성서적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영혼 소멸설과 만인 구원설은 복음주의 성서학계에서 현재도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다.
영혼소멸론자들은 성서에서 악인의 최후인 영원한 징벌이 바로 존재 자체의 영원한 소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영원한 지옥이 인간의 유한한 죄에 관한 유한한 징벌인가? 아니면 유한한 인간의 죄에 관한 무한한 징벌인가?” 이런 논의도 점점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학계에서는 지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은 현실이다.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에 비해 사후세계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다루지만 충분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 어려움도 있다. 성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어려운 질문이지만, 지옥에 관한 문학작품적 접근으로 이루어진 선입견을 제거하고 성서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지옥이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 – “불신자들이 영원히 불타면서도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통만 당하는 곳” – 은 역사적으로는 중세시대에 처음 신학화 되었다. 동방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에서는 500년 동안 만인구원설 (Universalism)이 득세했지만, 최초의 라틴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us, 160-225?)은 플라톤주의의 영혼불멸설을 수용하면서 “모든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악인에 대한 형벌도 영원하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한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라는 마태복음 5:26을 해석하면서 영혼이 영광의 부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있을 때 지은 죄를 정화 받아야 한다는 연옥교리를 만들었다.
주후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 (Thascius Caecilius Cyprianus)도 저주받은 자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불태워질 것이고 그 고통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옥의 위치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중세시대에 어떤 이들은 지옥이 뜨거운 태양안에 있다고 믿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의 땅밑의 여러 층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이것에 대한 단테의 문학작품 <신곡>은 중세의 민간신앙을 지배해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는 주후 14세기에 쓰여진 단테의 <신곡>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이것은 중세 교회와 정치가 일치되어 있던 시대에서는 민중들을 다스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현대 가톨릭에 와서 수정되었다. 교황 바오로 2세 (1920-2005)는 지옥을 하나님이 죄인을 징벌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자연스럽게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의 장소라고 선포했다.
교황은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지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민중을 겁박하고 교권을 강화한 것에 대한 사과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민간안에는 지옥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 모든 문학작품이든 스토리텔링에 끝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특히 개신교에 와서는 지옥은 부흥사들이 성도들을 참회케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헌금을 동원하는데 단골메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성서에서는 지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3. 구약의 지옥
구약의 주된 관심은 사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익숙한 지옥이란 개념과 이미지를 구약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구약성서에 ‘지옥’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스올 (לואש, Sheol)’이다. 이 ‘스올’의 원래 의미는 무덤, 음부로 번역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성서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스올 (לואש, Sheol)’은 죽은 자들의 거처이다.
이 용어는 수메르와 바벨론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이르칼라’의 히브리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이 사후에 거하는 지하 세계에 대한 믿음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오직 이집트에서는 파라오 같은 최상 위 계급만이 이러한 운명에 얽매이지 않았다. 파라오는 지상을 다스리는 신이었고, 그가 죽으면 신과 연결해 주는 특별한 제의와 함께 미라가 되어 부활을 준비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올 (לואש, Sheol)’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든 자들이 가는 장소다.
구약에서 ‘스올’은 하나님을 신앙하든, 신앙하지 않던, 모든 자들이 가는 장소였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야훼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고 가정할 때 ‘스올 (לואש, Sheol)’은 불의한 자들이던 신실한 자들이건 간에 모든 인간이 죽으면 가는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도 주변 근동 문화를 넘어선 죽음 이후에 대한 발전된 사상은 발견하기 어렵다.
‘스올 (sheol)’은 원래 무덤 (욥 17:13-16, 시 30:3, 49:14, 사14:11), 혹은 죽음의 세계 (왕상 2:6, 9, 시 89:48, 116:3, 잠 5:5, 사 28:15,18, 호 13:14, 합 2:5)를 의미했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의미로 발전하면서 (욥 26:5-6, 사 14:9-10), 모든 인간이 사후에 가야 하는 보편적 운명의 장소로 발전하여 나타난다 (전 9:10).
엄밀하게 말하면, 구약의 스올은 신약의 지옥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스올이 악인에게 사후 징벌, 의인에게 영생의 장소가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임하기에 악인만 가는 장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시 9:17, 31:17, 49:13-14).
이곳은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 (창 37:35, 시 30:3, 사 38:10)도 가고, 왕이나 평민할 것없이 누구나 다가는 장소이다.
구약에서 ‘스올’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곳’이다. 이곳은 캄캄하고 흙먼지 (욥 17: 16)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욥 17:14, 24:19-20, 사 14:11). 이곳에 있는 자는 죽은 자와 같고, 사랑이나 미움, 시기도 없고, 상을 받을 수도 없으며 그저 의식없이 아지랭이 같은 그림자로 침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시 6:5, 31:17, 사 28:18). 그래서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전 9:4)’는 잠언도 전해지고 있다.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전 9:10). 구약시대에는 사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스올은 의인들이라도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 6:5, 사 28:15, 겔 32:17-32).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현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두개파처럼, 사후 세계를 지지하지 않는 유대 분파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70인역 (LXX), 외경 등 헬라어로 쓰인 유대문헌에서 ‘스올’은 ‘하데스 (ἁδης, hades)’로 번역된다.
원래 ‘하데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다. 하데스는 지하세계의 제우스라 할 수 있다. 헬라문화 (그리스문화) 속에서 살았던 초대교회 성서 저자들은 자연스럽게 헬라문화의 개념들을 차용해와 사용했다.
실제로 신화에서 ‘하데스’는 제우스의 형제다. 그런데 “하데스”라는 어휘의 의미는 점차 확장되었고 무덤, 사자, 사자의 세계, 조상 모두를 의미할 수 있었다. 혹은 죽은자의 프쉬케 (ψυχή, 생명), 즉 영혼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헬라 문화에서 ‘하데스’는 악인이 벌을 받는 지옥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프쉬케를 주로 개인 고유의 영혼으로 번역하지만, ‘죽은자의 프쉬케’는 결코 플라톤이 주장한 개인 고유의 영혼으로 볼 수 없다. 프쉬케는 그냥 죽으면 떠다니는 인간의 “생명력”에 가깝다.
죽은자의 프쉬케 (생명력)는 어떤 의식도 없고 돌아올 수 없는 그곳에서 그저 그림 자와 같은 존재로 영원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오디세우스나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처럼 죽은 자의 프쉬케를 잠시 깨울 수는 있지만, 그 또한 결국 허사로 돌아간다.
인간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지만, 외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죽은자를 ‘하데스’로 부터 살려낼 수도 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토비트 13:2, 지혜서 2:1, 16:13, 집회서 48:5). 그러나 여기서도 ‘하데스’는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하데스’는 의식없이 거하는 곳이므로 살아 생전처럼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다 (집회서 17:27, 41:4).
1) 구약의 ‘스올 (לואש, Sheol)’은 무덤, 음부로 번역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성서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스올 (לואש, Sheol)’은 단순히 죽은자들의 거처이다.
2) ‘스올’은 후에 죽은자의 세계, 죽은 자들이 가는 보편적 장소로 점차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3) ‘스올’은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도 가는 장소이고, 왕이나, 평민이나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는 장소이다.
4) ‘스올’은 후에 70인역 (LXX)이나 외경에서 헬라어 ‘하데스 (hades)’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5) ‘하데스 (ἁδης)’라는 어휘는 점차 확장되어 사용되었고 후에 무덤, 사자, 사자의 세계, 조상 모두를 의미했다. 혹은 죽은자의 프쉬케 (ψυχή, 생명), 즉 영혼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기도 했다.
구약성서에서 지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어는 ‘게헨나 (γέεννα)’가 있다. ‘게헨나 (γέεννα)’는 원래 예루살렘 성문 바깥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히브리어 ‘게벤힌놈’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힌놈의 골짜기’ 혹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번역했다 (수 15:8, 18:16).
이곳은 아하스와 므낫세 시대에 몰렉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아하스는 심지어 이곳에서 자녀를 번제로 바쳤다 (왕하 16:3, 대하 28:3, 33:6). 선지자들은 이곳을 하나님의 큰 심판이 임할 대학살과 폐허의 장소로 묘사한다 (렘 7:30-33, 19:1-13, 32:34-35). 나중에 이곳은 장례가 허용되지 않은 ‘부정한’ 시체들을 버리는 곳이 되었다.
구약성경 이외의 문헌에서 ‘게헨나’는 주로 최후 심판의 장소로 묘사된다. 이곳은 불 혹은 흑암 속에서 이를 갈게 되는 곳이다. 선한 이의 영혼은 새로운 몸을 받지만, 악인은 영원한 징벌을 받는다는 암시도 있다.
4. 신약의 지옥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로서 지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에는 ‘게헨나 (γέεννα)’, ‘하데스 (ἁδης)’, ‘타르타로스 (Τάρταρος)’ (벧후 2:4)가 있다. 헬라 문헌에서 ‘타르타로스’는 살아있을 때 신들을 모욕한 왕 탄탈로스와 시시포스와 같은 자들이 영원토록 고문을 당하는,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타르타로스’는 범죄한 천사들이 영원한 징벌을 당하는 곳으로서 (벧후 2:4) 인간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게헨나’와 ‘하데스’만 다루겠다.
‘게헨나’는 신약성경의 12구절에 나온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게헨나’는 시체들을 태우고 태운 재를 버리는 장소로 심판에 관한 이사야의 마지막 환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사 66:24).
예수 당시의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으롯 불쾌한 기운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는 ‘게헨나’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악인이 죽음 이후 징벌로 볼 심판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이 징벌이 얼마나 오래갈 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하데스’는 신약성경의 11구절에 나온다 (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31, 고전 15:55, 계 1:18, 6:8, 20:13-14).
하데스는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 (마 11:23), 음부의 권세를 지닌 교회 (마 16:18), 자비 없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후 반전 (눅 16:23), 예수의 부활 (행 2:27,31),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 15: 55)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또한 하데스는 요한계시록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하데스는 죽음과 짝을 이루는 초자연적인 상징으로서 악인을 징벌하는 곳이다 (계 1:18, 6:8, 20:13,14).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고도의 상징언어를 사용하기에, 하데스에 대한 묘사를 지옥에 대한 직접 묘사로 보기는 어렵다. 누가복음 16:23에서는 사후 징벌에 관한 장소로 하데스가 등장하며 이는 게헨나의 의미와 유사성을 가진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서도 징벌이 얼마동안 지속할 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유대문헌에서는 악인이 징벌 받는 곳을 나타낼 때 하데스보다는 게헨나를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하데스와 게헨나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예수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죽은 자는 하데스에서처럼 게헨나에서도 몸을 가진 채로 있게 되고, 죽은 자가 그곳에서 고통당하는 동안 이 땅의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눅 16:27-31).
물론 이 비유는 교훈을 위한 상징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헨나와 하데스는 모두 미래의 심판을 위해 대기한다 (마 5:22, 11:23, 23:33, 눅 10:15).
요한계시록 (20:14)은 하데스 자체의 종말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바울서신에는 하데스라는 어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헬라인에게 하데스는 유대적인 형벌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바울은 이방인도 이해하기 쉽도록 추상적 개념인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멸망,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롬 1:18, 9:22, 빌 3:19, 살후 1:9, 2:10).
지옥을 묘사하는 표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우선 불은 지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 공통으로 언급되는 요소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벌의 불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만 불은 물건을 파괴하고 다 태우는 경향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불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속에 있으면 다 태워져야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불’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 피조세계나 인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없는 – 어떤 고통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멸망과 징벌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마태복음에 나온다 (마 8:12, 22:13, 25:30).
불과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모두 고통을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지옥의 위치에 관한 사변은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즉 성서에 나타난 지옥에 관한 묘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은유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5. 영혼 소멸설
그간 지옥에 관한 새로운 제안들이 있었지만 그중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지옥 이 영원한 소멸, 혹은 영원한 징벌의 의미인가?’라는 질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복음주의 안에서도 존 스토트와 같은 이는 지옥을 영원한 소멸의 장소로 보는 이들이 있다. 영혼소멸설이 근거로 삼는 주요구절중 하나는 데살로니가후서 1:8-9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8-9).
신약성경의 일부 본문은 ‘소멸한다’와 ‘불탄다’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여 악인들이 사후 불태워져 소멸할 것을 말한다(마7:19, 10:28, 13:40, 42, 50, 요15:6). 이외에도 악인의 최종적인 소멸을 암시하는 구절들로는 마태복음 3:10, 12, 26:24, 빌 1:28, 살후 1:9이 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익숙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묘사는 사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후에 문자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가운데 영원히 징벌을 받는다. 그런데 이는 중세에 유행했던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성경의 ‘하나님의 사후 심판사상’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교리다. 영혼이 불멸하니 하나님의 징벌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멸’이란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으로 피조물에 부여된 것은 아니다. 불멸은 오로지 영광의 부활로 구원받는 자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실 성경은 어디에서도 ‘불멸’과 ‘영혼’을 연결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멸하는 영혼’이란 플라톤주의 혹은 영지주의에 근거한 발상이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소멸론자들은 ‘조건적 불멸설’을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원한 징벌이라는 개념은 헬라 문화의 영혼불멸설을 근거로 탄생한 것으로서 성서적이지 않다. 성서에서 불멸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성품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길은 하나님께 종속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바울서신에서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영혼소멸설”에 힘을 실어준다. 바울은 대신 추상적으로 영원한 파멸,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롬 9:22, 빌 3:19, 살후 1:9, 2:10).
즉 바울의 견해도 불신자의 운명을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영원한 징벌로 보기보다는 영혼의 소멸로 보는 것에 가깝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유한한 죄에 대한 무한한 지옥이라는 징벌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속성에도 맞지 않는다.
이처럼 소멸론자들은 성서가 악인의 멸절을 가르친다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영혼소멸설은 만인구원론과 다르다. 영혼소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만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생의 길임을 천명한다. 그들에게 지옥은 ‘영원한 잃어버림의 상태’ 하나님으로 부터 ‘영원히 분리됨’이라고 소멸론자들은 생각한다.
6. 전통적인 견해
지옥을 아무도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는 영원한 징벌의 장소로 강조한 신학적인 기원은 터툴리안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는 이후 어거스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계승되었고, 최근에는 브레이, 하몬, 포슨, 피터슨 등이 같은 주장을 한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마태복음에서 하데스는 악에 대한 영원한 징벌과 관련되어 있다 (마 5:22, 29-30). 지옥을 설명하는 불 (마 25:41, 유1:7), 징벌 (마 25:46), 멸망 (살후 1:9), 심판 (히 6:2)은 모두 영원한 것으로 묘사되고, 이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고통을 주는 영구적인 징벌을 의미한다.
특히 영생과 영벌을 나란히 언급하는 마태복음 25:46은 피하기 어려운 증거본문이다. 즉 의인이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면 그와 상응하는 악인의 징벌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 죄는 그 크기나 유한성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원인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무한한 심판의 상태를 의미한다.
7. 다양한 현대적 견해
최근 주목받는 신약학자 톰라이트는 지옥에 관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그는 C.S 루이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지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곳 일뿐,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지금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만, 섬기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점점 비인간화되어 결국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들은 자기가 경배하는 우상, 돈, 권력, 섹스 등의 노예로 살아간다. 이 일은 사후에도 일어난다.
그들은 이전에는 사람-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죽음 이후에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더는 사람이 아닌 –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 존재로 변한다.
톰 라이트에게는 지옥은 우상숭배의 극단을 체험하는 곳이다. 악인들도 부활하지만 오로지 탐욕, 즉 자기사랑과 자기 경배에 빠져살게 된다. 결국 지옥은 ‘참 인간됨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 지속해서 있게 될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톰라이트의 견해는 매우 현대적이기는 하지만 성서의 지옥이 정말 그러한가 하는 데에는 의문이 든다. 성서적인 근거가 미약한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 결론
사실 지옥은 정의할 수 없는 용어다. 랍비 카츠에 따르면 성서의 지옥은 형이상학적인 곳이다. 즉 지옥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지옥을 물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말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이 나쁜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지옥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성서에서 지옥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관한 이해를 돕는 용어이다. 하지만 지옥을 불타는 공간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죄가 심판받는 것은 분명 하지만 지옥형벌에 대한 어떤 물리적 서술도 은유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에 계속 언급되고 있고, 예수가 12차례 인용한 게헨나 (γέεννα)에 대해 성서는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서 예수가 인용한 게헨나의 구절들은 설명이 갈라진다.
1) 게헨나가 죽은 자들의 마지막 부활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인지 (연옥개념), 아니면 최종적인 형벌장소의 개념인지 (지옥개념)
2) 게헨나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인지, 아니면 사탄이 다스리는 영역인지
3) 게헨나에서 심판받는 것이 영혼인지, 아니면 육신과 영혼 모두인지
이 중, 마지막 이슈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0:28은 흥미로운 증언을 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 게헨나 (γέεννα)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이 구절에 의하면 지옥은 죽어서 영혼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몸도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옥은 악한자의 영혼이 가는 곳이다. 그러나 몇몇 성서 구절의 증언에 의하면 ‘게헨나’는 몸과 영혼이 같이 가는 곳이라는 증언은 당혹스럽다. 성서의 이러한 당혹스러운 증언은 지옥에 대한 개념이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완전히 통일되어 있지도 않고, 여전히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약이후에 ‘지옥’에 대한 개념은 더욱 발전하여 외경 “베드로 묵시록”이나 “바울 묵시록”에서는 죄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그 죄에 대하여 지옥에서 받게 될 형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중세에 와서는 단테의 <신곡>에 이르러, 지옥은 문학을 넘어 중세 문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거대한 개념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한가지는 지옥개념의 발전 전 과정을 아울러 체계적이고 일관된 지옥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지옥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의 반영이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않다.
예수께서 사복음서를 통해 게헨나에 대해 12번을 언급하였지만, 게헨나가 말씀의 주제가 아니었다. 예수는 당시 한창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던 생생한 문화적 요소인 ‘게헨나’를 인용하여, “죄짓지 않도록 조심하라” “정직하게 살라” “약한자를 돌보아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와 같은 교훈을 주시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경고를 위하여 ‘게헨나’를 언급한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게헨나-지옥’을 인용하여 말씀하는 장면은 12번 언급되고 있지만 ‘게헨나-지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없다.
또한 누가복음에 따르면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자로 고백했기 때문에 갔다고 서술하고 있지 않다 (눅 16: 19-31). 부자도 예수를 안 믿었기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다. 누가복음 기록자의 관점에 의하면 오히려 거지였기 때문에 천국에 갔고, 부자였기 때문에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구원’ ‘지옥’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그동안 얼마나 신학적으로 오용되어 잘못 사용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의 복음은 우리가 흔히 듣는 천국-지옥의 이분법에 담아낼 수 없다. 예수의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관심은 지금-여기에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

주경식 (Ph.D)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