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변조은 목사 추모예배 설교
(시드니한인연합교회 2026.8.2, 설교자 홍길복 목사)

제목 : 변조은 – 착하고 충성된 종
성경말씀 : 마태복음서 25장 14-23절
변조은 – 착하고 충성된 종 (마태복음서 25장 14-23절)
변조은 목사님은 1933년 9월 24일, Victoria주와 경계하고 있는 South Australia의 작은 농촌 마을 Mount Gambia에서 태어나시어 지난 7월 17일 금요일 오후, 93세를 두어달 앞두고 Canberra에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제 오전 Canberra City Uniting Church에서는 변목사님을 추모하며 그의 삶과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The Thanksgiving Service for the Life and Death of Rev. Dr. John Brown>의 장례예식을 잘 치루었습니다. 하루가 지난 오늘, 우리는 1974년 이곳 시드니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인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초석을 놓으셨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가 두고온 조국과 이곳 한인 이민자들과 한인교회들과 한인사회를 섬겨 오셨던 변조은 목사님을 기리며 함께 자리하여 그분을 회상하고 추억하며 하나님께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사모님 Norma 목사님과 아들 Michael과 두 따님, Alison과 Soon-ja를 비롯한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자리하여 추모하는 변조은 목사님은 저와 우리 모두에게는 참 좋은 선생님이요, 목사님이요, 선교사요, 섬기는 사람이요, 동시에 친구였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분은 착하고 충성된 주님의 종이이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주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니라, John, Well done, you ar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in managing small amounts, I will put you in charge of large amounts. Come on and share my happiness!> 저는 역사의 마지막 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주인이 하셨던 이 성경말씀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로 가신 변조은 목사님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순서지에는 설교라고 쓰여 있지만 저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변목사님은 주님 나라에서 주와 함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호주 이민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네 한국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교인이든 아니든 변조은 목사님으로 부터 현실적이면서도 영적 및 정신적 도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은 대부분 변목사님과 얽힌 삶의 스토리들이 한 두 가지씩은 다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제가 만나고 배우고 함께 했던 변목사님과의 삶의 스토리들 중 한 두 가지를 회고하고 Sharing 하면서 마음속에 새겨 두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저는 1970년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학생으로 처음 변조은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그이는 능숙한 한국어로 히브리어와 구약신학을 강의하셨습니다. 그이는 우리가 한글로 써 낸 시험지나 레포트의 글자나 문장을 일일히 고쳐가며 교정해서 돌려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하셨습니다. 학생 때 목사님과 더불어 얽히고 설킨 에피소드들은 일일히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후 변조은 목사님은 귀국하시어 호주장로교 총회의 세계선교부 총무로 일하셨습니다. 1974년 저와 몇몇 친구들이 당시 한국에서 유신체제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냈다가 긴급조치위반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을 때 변목사님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저희를 석방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보내주셨습니다. 호주로 귀국 하신 후 변목사님은 1974년 7월, 한인들 10여명과 함께 Redfern Community Centre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예배를 시작함으로 시드니한인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1977년 호주교회들이 Uniting Church in Australia로 통합이 되면서 변목사님도 Uniting Church 세계선교부 Director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후 한국에서 정치적 변동이 있은 다음 해 1980년 6월 변목사님은 저와 저희 가족을 호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비행기표 까지 다 목사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당시 시드니 킹스포드 비행장으로 오셔서 외국여행이란 처음이었던 저희들을 자신의 자동차에 태우고 Ashfield로 데리고 오셔서 김상우 목사님과 이상택 목사님을 인사시켜 주시고 함께 점심을 나누었던 추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저희들의 호주에서의 삶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80년대 초엽 저희 아이들이 시드니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늘 ‘차이니즈 칭총 칭총’이라 놀림을 받으며 울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 한번은 변목사님에게 우리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림받으며 많이 힘들어 한다는 이야길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이는 아주 유창한 한국말로 이렇게 맞받았습니다. “야, 쌤통이다! 우리 아들 선태는 경상도 마산에서 맨날 ‘양코쟁이 양코쟁이’ 라고 놀림 받으면서 학교 다녔어!” 물론 우리에게 왜 이 다문화 사회에서의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없었겠습니까만 하여튼 이런 농담섞인 이야기들이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신학생 때 한번은 목사님이랑 같이 왕십리에서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몇몇 젊은 아이들이 구석에서 자기들 끼리 수군댔습니다. “야, 여기 양코쟁이도 시내버스를 다 타네” 가만히 계시던 변목사님은 종로 5가에서 그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가시더니 한국말로 이리 말씀하시고 내렸습니다. “양코쟁이란 나쁜 말입니다. 서양사람이라고 하십시요” 변목사님은 정말 한국어를 잘 하십니다. 어떤 때는 “진짜 웃기네요, 죽여 주네요! 정말 미치겠네요” 같은 말도 하시고 자주 저에게 전화하셔서 자신이 최근에 읽은 한국어 단어의 정확한 뜻을 묻기도 하셨습니다.
80년대 말 저
는 변목사님과 함께 약 1주일에 걸쳐 타이완교회들과 그곳의 오래된 원주민인 고산족마을을 순회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둘은 같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타고 한 호텔, 한 방에서 자고 샤워하고 먹으면서 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변목사님의 조상들의 이야기 -19세기 말 영국 Scotland에서 호주로 이민 오셔서 정착하고 그후 자신이 태어난 이야기, Mount Gambia, Nelson, Hamilton, Melbourne, 그리고 마산, 거제, 서울과 다시 시드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길고 긴 인생 여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농촌 Mount Gambier에서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늘 새벽 같이 일어나 젖소들을 먹이고 우유를 짜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풀을 베고 목초지를 개간하고 뱀을 잡으면서 일하던 소년 시절 이야기와 그후 13살때 Hamilton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가서 마침내 하이스쿨에 들어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한 이야기,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년이었으나 가난으로 인하여 다시 고향 Nelson으로 돌아와 마치 모세가 미디안 숲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Nelson Bush에서 소와 양들을 먹이다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가 된 이야기 등등 끝이 없습니다. Cola라고는 1년에 딱 한번 크리스마스날이나 되어야 마실 수 있었던 가난했던 소년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돌아가실 때 까지도 늘 손가락에 묻은 쨈 까지 쪽쪽 빨아먹는 사람이었고 40년전 옷을 걸치고 40년전 제가 사드린 지갑을 돌아가실 때 까지 넣고 다니는 검소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그이가 2차 대전이 끝나고 40년대 말 마침내 멜보른대학 장학생 시험에 합격이 되어 철학과 고대 중동어, 특히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변목사님은 그 후 계속하여 Ormond College로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던 중 1957년엔 Norma Beer를 만나 결혼하고 졸업후 1958년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빅토리아주 Bairnsdale에 있는 St. Andrew교회에서목회를 하던 중 신학생 때 약속한 대로 6.25 후 폐허가 된 땅 한국으로 선교사가 되어 찾아 갑니다. Norma와 두살 베기 Michael을 데리고 부산 항에 도착한 것은 1960년 9월 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호주 선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경남 지역에서 12년 동안 온갖 잡일들을 하면서 농촌선교에 매진했습니다. 언젠가 변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나는 경상남도 시골과 섬들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는데 내가 맡은 당회장만 해도 52교회였었어! 그래서 한국말 설교는 하나만 준비하면 쉰두교회에서 쉰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 제가 만약 변목사님과 나눈 이야기들을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한 시대, 한 인간의 눈물나게 아름답고 진솔한 모습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변조은, John Brown – 진실로 그이는 한 사람의 직업적 종교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개인이 경험한 시대와 공간을 포용하는 크고 깊은 이상적 인간의 모습과 바람직한 교회의 역활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는 변목사님과 함께 약 1주일에 걸쳐 타이완교회들과 그곳의 오래된 원주민인 고산족마을을 순회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둘은 같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타고 한 호텔, 한 방에서 자고 샤워하고 먹으면서 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변목사님의 조상들의 이야기 -19세기 말 영국 Scotland에서 호주로 이민 오셔서 정착하고 그후 자신이 태어난 이야기, Mount Gambia, Nelson, Hamilton, Melbourne, 그리고 마산, 거제, 서울과 다시 시드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길고 긴 인생 여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농촌 Mount Gambier에서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늘 새벽 같이 일어나 젖소들을 먹이고 우유를 짜고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풀을 베고 목초지를 개간하고 뱀을 잡으면서 일하던 소년 시절 이야기와 그후 13살때 Hamilton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가서 마침내 하이스쿨에 들어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한 이야기,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년이었으나 가난으로 인하여 다시 고향 Nelson으로 돌아와 마치 모세가 미디안 숲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Nelson Bush에서 소와 양들을 먹이다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가 된 이야기 등등 끝이 없습니다. Cola라고는 1년에 딱 한번 크리스마스날이나 되어야 마실 수 있었던 가난했던 소년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돌아가실 때 까지도 늘 손가락에 묻은 쨈 까지 쪽쪽 빨아먹는 사람이었고 40년전 옷을 걸치고 40년전 제가 사드린 지갑을 돌아가실 때 까지 넣고 다니는 검소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그이가 2차 대전이 끝나고 40년대 말 마침내 멜보른대학 장학생 시험에 합격이 되어 철학과 고대 중동어, 특히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변목사님은 그 후 계속하여 Ormond College로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던 중 1957년엔 Norma Beer를 만나 결혼하고 졸업후 1958년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빅토리아주 Bairnsdale에 있는 St. Andrew교회에서목회를 하던 중 신학생 때 약속한 대로 6.25 후 폐허가 된 땅 한국으로 선교사가 되어 찾아 갑니다. Norma와 두살 베기 Michael을 데리고 부산 항에 도착한 것은 1960년 9월 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호주 선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경남 지역에서 12년 동안 온갖 잡일들을 하면서 농촌선교에 매진했습니다. 언젠가 변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 나는 경상남도 시골과 섬들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았는데 내가 맡은 당회장만 해도 52교회였었어! 그래서 한국말 설교는 하나만 준비하면 쉰두교회에서 쉰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 제가 만약 변목사님과 나눈 이야기들을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한 시대, 한 인간의 눈물나게 아름답고 진솔한 모습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변조은, John Brown – 진실로 그이는 한 사람의 직업적 종교인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개인이 경험한 시대와 공간을 포용하는 크고 깊은 이상적 인간의 모습과 바람직한 교회의 역활을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한국에서의 선교사 사역을 마감하신 후 호주로 돌아오신 변목사님은 그 기력이 다하기 까지 온힘을 다하여, 자신의 자리를 넘어서, 총회 선교의 여러 기관과 ACC와 WCC를 포함한 에큐메니칼 영역에서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합문화 사회를 섬겨 오셨습니다. 비교적 분파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한인교회 사회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인들 까지도 함께하는 에큐메니칼적인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도록 주도하셨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통합을 단순히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지경이나 교단 차원의 일치와 통합으로만 보시지 않고 지구촌 모든 나라와 민족과 언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해 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변목사님은 호주 Uniting Church를 만들어 가는데 크게 한몫을 감당하셨으며, The Uniting Church is A Multicultural Church라는 믿음 속에서 온 힘을 다하여 일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목사님은 The Uniting Aboriginal and Islander Christian Congress에 깊은 애정과 관심과 미안한 마음을 갖고 은퇴 후 까지도 크게 기여 하셨습니다. 사실 이 땅엔 변목사님 같은 분이 계셨기에 호주 원주민들을 향한 Sorry Day 같은 날이 만들어 질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인권과 정의, 복합문화와 다양성, 원주민들에 대한 책임과 사죄를 포함하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앞장 서서 이끌어 오셨던 목사님이 참 많이 그리워집니다.
1998년 말, 저는 이곳 시드니에서 18년 동안 목회하던 한 교회에서 사임하고 침울하게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주말 아침 일찍 변목사님이 저의 집으로 오셨습니다. 성경도 읽어 주시고 기도도 드리고 차도 마시면서 이런 저런 흘러간 옛 이야기들을 나누며 점심식사 후 자리를 뜨시면서 목사님은 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홍목사님, 참 미안해요. 10여년 전 목사님이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을 때, 그 때 내가 보내드리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이번에 그 교회를 떠나게 된 것도 다 내가 잘못해서 그리 된 일이야요. 내가 홍목사님의 선생이고 친구이고 인생길의 동반자 잖아요. 그런데, 목사님이 한국에서든, 호주에서든, 정말로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하지 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목사님, 사랑해요. 죽을 때 까지 몸은 함께 하지못해도 마음만은 늘 목사님과 함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희 집 문을 나서셨습니다. 모든 일시적 이별은 우리를 더 깊은 우정과 사랑, 더 아름다운 추억과 연대와 교훈으로 묶어줍니다.
우리 아이들 셋을 다 결혼주례해 주셨고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늘 곁에 계셔 주셨던 변조은 목사님에 대한 회고담은 끝도 없고 한도 없을 것 같아서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 아시다 싶이 변조은 목사님의 영어 이름은 J.O.H.N. – John입니다. John을 그냥 짧게 ‘존’이라하지 말고 좀 길게 ‘존-‘이라 발음 하면 ‘조은’이 됩니다. 변조은의 한국 이름 ‘조은’은 영어의 John을 늘려서 부르면 나오는 소리 입니다. <John – 조은> <좋은 사람 변조은, 좋은 사람 John Brown> 참 기가 막히게 잘 지은 이름입니다. 함께 여행 하던 중 한번은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영어 이름 John을 한국어로 ‘조은’ 이라고 지으신 것, 진짜로 작품입니다. 정말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으셨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맞 받았습니다. <이름만 좋으면 뭐합니까? 내 이름은 ‘조은’이지만 난 그리 좋은 사람이 못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그의 천부적 겸손을 넘어서서 목사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면서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John Brown, 변조은 –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진짜로 좋은 사람입니다. 변조은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목사, 좋은 선교사,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입니다. John is Good husband, good father, good pastor, good missionary, good friend and good neighbor. John, He is Really Good and Faithful Servant. 변조은 – <He is a great teacher, loving helper, kind leader and wonderful enabler in my whole life. He is a great model of our ministry and serving others. Above all he is a good man, really good man. I will keep in my mind all the time ‘John is good man, really good man. 변조은 선생님! 선생님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키케로의 말대로 돌아가신 이에 대한 인간 최대의 존경과 찬사는 사후에 훈장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고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 임을 새기면서 <선생님, 부디 주안에서 안식하시옵소서. Rest in Peace of Our Lord. Amen>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