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어떤 분과 이야기 하는 가운데, “변화를 해야 하는 데 쉽지가 않네요”,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변화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굳게 다짐했던 결심이 실제 행동으로 까지 가지 못하고, 매번 제자리걸음으로 끝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 해답은 우리의 뇌 과학 속에 숨어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우리 뇌의 시상 (Thalamus) 에 도달하면, 이는 곧바로 변연계로 전달됩니다. 이때부터 진짜 변화를 향한 치열한 관문이 시작됩니다. 변연계에는 감정을 통제하는 편도체(Amygdala) 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Hippocampus) 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로막힌 변화의 관문: 두려움과 상처
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 앞에서 편도체는 종종 두려움과 염려라는 요란한 경보 알람을 울립니다. “이건 안 될 거야”, “또 실패하면 어떡해?”라며 우리를 주저앉힙니다. 성경이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사41:10)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해마는 과거의 쓰라렸던 실패나 상처받은 기억들을 드라마틱하게 소환해 냅니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 오버랩되면서 우리의 행동은 꽁꽁 얼어붙고 맙니다.
결국 이 두려움과 상처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뇌의 최고 경영자 (CEO)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 (Prefrontal Cortex) 으로 정보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전전두엽이 활성화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고 행동을 명령하여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겪는 모든 변화의 장애물은 결국 ‘감정과 기억’이라는 내면의 장벽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알람을 끄고 내면을 잠잠케 하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편도체와 해마의 요란한 알람을 켜지 않고 잠잠하게 달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과 따뜻한 일상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성찰과 묵상의 시간: 깊은 자기 성찰, 즉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로 나아가는 시간은 요동치는 뇌의 불안을 안정시키는 가장 확실한 과정입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 변치 않는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편도체의 두려움은 평안으로 바뀝니다.
있는 그대로를 품어주는 관계: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무비판적인 수용,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은 해마의 아픈 기억을 덮어주는 강력한 치유제가 됩니다.
유쾌한 웃음과 유머: 거울을 보며 피식 웃어보는 엉뚱함이나, 곁에 있는 사람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크게 한 번 웃는 일도 얼어붙은 뇌를 녹이는 마법 같은 열쇠입니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보지 뭐!” 하는 유쾌한 배짱이 우리를 변화의 문턱으로 가볍게 넘겨주기도 하니까요.
결국 삶의 모든 진정한 치료법은 불안한 감정과 아픈 기억의 부분들을 고요하게 잠재우는 것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 때, 비로소 새로운 행동이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려고 너무 애쓰기보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혹은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이렇게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를 건네보면 어떨까요?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도 주님 품 안에서 나의 복잡한 감정과 기억들이 잠잠해지는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풍랑이 고요해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오늘도 삶을 새롭게 빚어내는 놀라운 ‘변화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6-7절)
알약의 여정이 들려주는 생명의 신비
나는 최근에 달리면서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조그마한 통증 및 염증 치료알약 하나 먹고 통증이 가라 앉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생각이 하나 떠 올랐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삼키는 작은 알약 하나가 몸속 깊은 곳의 통증을 찾아내 가라앉히는 과정은, 단순히 의학적 효능을 넘어 생명에 깃든 경이로운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물질이 광활한 우주와도 같은 인체 내부를 항해하여 정확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생물학적 경이로움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향한 놀라운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치유의 시작은 약이 아니라 ‘상처의 신호’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몸에 염증이나 상처가 생기면, 세포들은 침묵하지 않고 살기 위해 격렬한 화학적 구조 신호 (SOS)를 혈관이라는 고속도로로 뿜어냅니다.
혈액을 타고 온몸을 순환하던 약 성분은 이 신호에 이끌려 상처 부위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세포 표면에 있는 특정한 ‘수용체’라는 자물쇠에 약 성분이라는 ‘열쇠’가 정확히 맞물릴 때 비로소 통증이 멎고 치유가 시작됩니다. 상처 난 곳이 살려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을 때, 몸 전체를 흐르던 치유의 성분이 그곳에 집중적으로 임하여 회복을 이루어내는 생명의 법칙입니다.
이 놀라운 신체의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임하는 방식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은 성령 안에서 온 우주 공간에, 그리고 우리 삶의 매 순간에 공기처럼 충만하게 편만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한한 은혜가 우리의 멍들고 아픈 삶의 자리에 구체적인 기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영적인 ‘구조 신호’가 필요합니다. 상처 난 세포가 신호를 뿜어내듯,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결핍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비로소 그 충만한 은혜가 우리의 구체적인 아픔 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갈급함’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내 삶의 상처 부위에 정확히 맞물리게 하는 영적 ‘수용체 (자물쇠)’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영적 치유와 응답의 원리를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상처가 화학 물질을 내뿜어 약을 끌어당기듯, 우리가 고난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정확하게 응답하시며 치유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편 147편 3절)
마치 약 성분이 온몸을 돌다가도 가장 아프고 찢어진 곳을 찾아가 세포를 감싸 안듯, 편만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상심하고 부서진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찾아와 싸매어 주십니다.
결국, 육체의 상처가 낫기 위해 몸부림치는 세포의 신호가 필요하듯, 영혼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 상처를 안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절한 심령을 향해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자리
세상에는 백 마디의 언어보다 더 깊은 진실을 담아내는 한 방울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어김없이 4일간의 집중 강의를 이어가던 중, 제 눈시울은 뜨겁게 붉어졌습니다. 미리 밝혀두건대, 이 눈물은 결코 회한이나 슬픔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벅찬 감격이자, 지난 세월의 모든 수고를 덮고도 남을 의미와 보람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오전 강의 시작 전, 엠마오 상담대학을 먼저 졸업한 제자들에게 지난 3년의 학창 시절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제 가슴을 깊게 울렸습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오랜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고, 이 상담학 공부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결단이자 선택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 자신의 아픔을 넘어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넉넉히 품어내고 치유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불과 몇 명의 학생과 함께 개교했던 그 작은 시작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는 말씀처럼, 지난 11년 동안 오직 학사 과정 하나만을 붙들고 묵묵히 걸어온 인고의 시간은 오늘이라는 때를 만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열매로 피어났습니다. 어느덧 48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는 “상담학 석사 과정 (Master of Counseling)” 까지 새롭게 열리며 학교는 또 다른 은혜의 도약을 맞이했습니다. 일상과 전문 상담의 영역에서 활약하며 제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제자들 앞에서, 저는 이 모든 걸음이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절감했습니다.
저는 이 학교를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닌 저의 목회 현장이라 여겨왔습니다. 학생들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늘 곁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지금도 매일 새벽 1시, 혹은 2시에 일어나서 학생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불러가면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저를 향해 ‘목자처럼 보이는 학장’이라 불러주었을 때, 그 지난 훈련과 인내의 세월이 얼마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간증을 들으며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남은 생애를 향한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게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그 어떤 통증을 느끼는 아픔이 와도, 저의 모든 열정을 다해 상처 입은 세상을 치유할 이 아름다운 기독교 상담가들을 끝없이 배출해 내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선택
인간의 영혼을 깊이 응시했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지금 뇌라는 미지의 우주를 정밀하게 해부하는 신경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오랜 여정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두 개의 등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 ‘신경가소성’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깊은 곳에서 하나의 거대한 진실을 향해 맞닿아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이 만 5세 이전, 어쩌면 우리가 말조차 배우지 못했던 까마득한 유년 시절의 기억과 상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의 수면 아래 가라앉은 무의식은 기계적인 법칙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고, 평생토록 반복되는 감정의 폭풍과 방어 기제를 만들어냅니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거절당했던 기억, 두려움 속에 움츠러들었던 그늘은 뇌의 깊은 변연계에 새겨져 위기의 순간마다 자동 항법 장치처럼 작동합니다.
현대 뇌과학의 언어로 이것은 마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처음 설치할 때 제조사가 미리 설정해 둔 ‘디폴트 모드 (Default Mode System, 기본값)’와도 같습니다. 생후 60개월까지의 유년 시절, 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 이성적인 방어벽이나 논리적 필터를 갖추지 못했을 때 외부의 충격과 두려움은 우리의 하드웨어 깊은 곳에 ‘초기 설정값’으로 단단히 입력됩니다. 이후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삶의 위기를 마주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 오래된 디폴트 모드를 가동합니다. 거절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 무조건 도망치거나 방어하는 반응은, 내 마음의 프로그램이 그 옛날에 세팅된 기본값대로 자동 실행되는 것에 다름아니니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곧 너의 운명이다”라는 프로이트적 결정론의 과학적 실체는 바로 이 굳어진 디폴트 시스템인 셈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뇌과학이 열어젖힌 현미경 속 세계는 전혀 다른 찬란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뇌는 고정된 조각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각해 나가는 유연한 생명체입니다. 뉴런과 뉴런 사이의 시냅스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새로운 길을 내기도 하고, 쓰이지 않는 낡은 회로를 끊어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경가소성이 건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컴퓨터에서 디폴트 모드에만 갇혀 살지 않고 언제든 시스템 설정을 바꾸거나 수동 모드로 전환할 수 있듯, 우리에게는 ‘알아차림 (Awareness)’이라는 관리자 권한이 있습니다. 삶이 자꾸 오류를 일으킬 때 멈춰 서서 “아, 내 안에서 또 그 오래된 디폴트 프로그램이 자동 실행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동 반응을 멈추고 전두엽을 켜서 새로운 결단과 행동이라는 수동 조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어떤 낡은 설계도를 쥐어주었을지라도,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내리는 의식적인 결단과 새로운 선택은 낡은 디폴트 값을 완전히 새로운 상위 버전으로 업데이트해 나갑니다.
이 놀라운 마음의 재설계와 회복의 비밀은 이미 수천 년 전 성경의 가르침 속에도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유년 시절의 상처와 얽매인 무의식을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죄의 관성과 견고한 진 (옛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상처와 두려움의 자동 반응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이 낡은 디폴트 값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만으로는 쉽게 해체되지 않는 견고한 성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에 머물지 않고, 은혜를 통한 ‘거듭남과 마음의 새롭게 됨 (로마서 12장 2절)’을 선언합니다. 신경가소성이 우리가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 뇌의 시냅스를 재조직하듯,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라고 말씀하며 영혼과 생각의 회로가 완전히 새롭게 빚어질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상담에서 말하는 ‘자각’은 곧 성경이 말하는 ‘깨어 기도함’의 영적 각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낡은 디폴트 프로그램이 고개를 들 때 멈춰 서서 그것을 직면하고, 성령의 빛 아래에서 새로운 선택을 고백하는 것—그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깊은 차원의 마음의 재설계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모순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낡은 디폴트 시스템은 뇌가 지나온 ‘지나간 역사’이자, 우리가 넘어서야 할 1차적인 신경의 관성일 뿐입니다. 우리는 유년 시절의 상처가 남긴 기본값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 기억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둘지 말지는 전적으로 현재를 사는 우리의 자각과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오랜 세월 길을 걸어오며 수많은 마음의 상처와 마주하고, 또 스스로를 단련해 온 이들에게 이 사실은 눈물겹도록 다행스러운 소식입니다. 과거의 무의식이 우리를 낡은 디폴트 모드에 가두려 할 때, 우리는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날의 자동 반응인가, 아니면 내가 오늘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내리는 결단인가.”
우리는 단 한 번도 완성된 채로 방치된 적이 없는, 스스로 프로그래밍 가능한 위대한 뇌와 거듭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두운 무의식의 지하 창고에 갇혀 있던 기억의 조각들도, 현재의 따스한 알아차림과 새로운 선택이라는 햇살이 비칠 때 비로소 치유의 에너지가 됩니다. 과거라는 무거운 뗏목을 기꺼이 품에 안으면서도, 오늘 이 순간 새로운 운영체제를 실행하며 바다를 향해 키를 잡는 것—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눈부신 의식과 영혼의 진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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