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실력’이라는 단어에 비친 사고의 결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심히 사용하는 단어 하나에는 그 언어를 품고 살아온 이들의 사고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최근 한국어의 ‘실력’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그 궤적을 짚어보며, 두 언어가 가진 속성과 사유의 차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어에서는 뭉뚱그려 ‘실력’ 하나로 통용되는 개념이, 영어권에서는 상황과 맥락, 획득 방식에 따라 대단히 세분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실력,이라는 단어가 한 분야에서 훈련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나 솜씨는 스킬 (Skill), 타고나거나 전반적으로 갖춘 능력은 어빌리티 (Ability), 언어나 특정 학문에서의 숙달도는 프로피션시 (Proficiency), 그리고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역량은 컴피턴스 (Competence)로 불립니다. 이처럼 영어는 ‘실력’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쪼개고 분류합니다. 대상을 세밀하게 해체하여 각기 다른 이름표를 붙이는 이들의 언어 습관을 보면,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얼마나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구조화하려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분석적 특징이 한국어의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두 문화권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거울입니다. 영어가 대상을 해부하여 각각의 구성 요소에 정밀한 단어를 부여하는 언어라면, 한국어는 상황과 관계, 그리고 발화자의 의도를 포괄적으로 엮어내는 융합적 언어입니다. 기능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그 사람 참 실력 있어”라는 단 한 문장 안에, 그 사람의 타고난 재능, 후천적인 노력, 직업적 성취, 심지어 인격적인 신뢰도까지 모두 녹여냅니다. 한국어의 ‘실력’은 단순히 기능적인 척도가 아니라, 한 인간이 삶 속에서 빚어낸 총체적인 무게감을 담아내는 그릇인 셈입니다.
언어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곧 타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내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자각 (Awareness)의 과정입니다. 영어의 세밀한 렌즈를 통해 현상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진단해 보는 분석력을 취하는 동시에, 한국어의 넉넉한 품 안에서 대상의 총체적인 가치를 통찰하는 시선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고는 한층 더 깊어질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잠언 16:23)
세상의 언어들이 가진 각기 다른 속성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우리의 내면을 지혜롭게 가꾸는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두 언어의 차이를 자각하고 그 안에 담긴 다채로운 사고의 결을 온전히 품어낼 때, 우리의 언어와 삶은 비로소 더 깊은 통찰과 지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감정의 창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위기나 갈등을 마주할 때, 어떤 이는 쉽게 무너지고 어떤 이는 꿋꿋하게 버텨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마련된 ‘감정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 잔고가 채워져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적인 관계 전문가 존 가트맨 (John Gottman) 박사는 인간의 감정이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5대 1의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 1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칭찬, 인정, 격려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무려 5배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평온한 일상을 보낼 때 긍정적인 정서를 미리 감정의 창고에 넉넉히 쌓아두어야만, 위기의 순간에 관계와 마음이 파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이 원리는 나 자신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상대방의 텅 빈 감정 창고에 귀한 자본을 저축해 주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타인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일에 서투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고 쉽게 비난하며 깎아내리려는 타락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버려 두면 잡초가 무성해지는 정원처럼, 우리의 마음은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정적인 감정을 나누는 일은 처음부터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의도’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색하고 힘이 들더라도, 의도적으로 상대의 장점을 찾고 격려의 말을 건네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감정의 창고’가 단순한 비유에 그치지 않고, 우리 뇌와 몸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생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뇌과학과 신경생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를 건넬 때 뇌에서는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옥시토신’ 같은 긍정 호르몬이 분비되어 생리적 회복력을 높여줍니다. 또한 “신경세포들은 함께 점화할 때 함께 연결된다”는 신경가소성의 원리처럼,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나눌 때 우리의 뇌 신경 회로 자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물리적 구조를 바꾸게 됩니다. 즉,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은 비유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 뇌와 몸에 스트레스 방어선을 구축하는 매우 과학적이고 실재적인 ‘저축’인 셈입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수천 년 전 기록된 성경의 지혜와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6:24)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의도적으로 건네는 칭찬과 격려는 상대방의 마음 (감정)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뼈 (육체)까지 살리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도 완벽하게 적용됩니다. 영혼의 호흡이라 불리는 기도는 곧 ‘영적인 창고’에 자본을 쌓는 일과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평소에 꾸준히 기도의 분량을 쌓아두면, 그 기도는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창고에 차곡차곡 쌓였던 기도는 내 삶에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영적 가뭄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능력이 되어 나를 살리는 생수로 다시 꺼내어 쓸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창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따뜻한 말로 채워지는 감정의 창고이고, 다른 하나는 무릎으로 채워지는 영적인 창고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누군가에게 의도적인 칭찬과 격려를 건네어 그의 감정 창고를 채워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내 영혼의 창고에 기도를 저축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리 채워둔 이 보물들이 언젠가 나와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세속적 이기주의와 거룩한 이기주의
테레사 수녀의 숭고한 헌신과 주식 시장에서 이윤을 좇는 트레이더의 치열함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겉보기에는 극단적인 이타심과 이기심의 대척점처럼 보이지만, 인간 행동의 가장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다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인간은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 움직이는 철저한 이기주의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심리학과 세속 학문이 바라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세속적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자 만고불변의 진리다. 진화심리학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을 빌려, 인간의 모든 행동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정교한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타인을 돕는 이타적인 행동조차도 집단 내에서 자신의 평판을 높이거나 상호 호혜적 이익을 기대하는 ‘계산된 본능’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은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로 규정한다. 인간은 언제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다. 심리학의 ‘심리적 이기주의 (Psychological Egoism)’ 역시 궤를 같이한다. 우리가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할 때 느끼는 뿌듯함, 즉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내면의 평안이라는 ‘심리적 보상’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결국 세속적인 잣대에서 볼 때, 선행은 타인의 필요와 나의 도덕적 만족감이 교환되는 고도의 이기적 거래인 셈이다.
신학이 말하는 원죄, 그리고 ‘거룩한 이기주의’
신학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이 이기주의의 뿌리는 태초의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근원적 동기는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 즉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피조물의 ‘교만과 자기애’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버린 상태 (Incurvatus in se)’라고 칭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의 시선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하게 된 것,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십자가의 길, 자기희생, 심지어 순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순교의 끝에 영원한 천국과 하나님의 상급이 아닌, 끔찍한 지옥만이 기다리고 있다면 과연 기꺼이 목숨을 던질 자가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거룩한 이기주의’라는 역설적인 개념과 마주한다. 성경조차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 11:6)고 말하며 인간의 보상 심리를 긍정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을 견딘 것은 그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영광과 영원한 유익’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 같은 신학자는 이를 ‘기독교 희락주의’라 부르며,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거룩한 본성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종교적 희생 역시, 세속적 쾌락 대신 영원한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베팅하는 ‘거룩한 이기주의’의 발로인 것이다.
무엇을 나의 유익으로 삼을 것인가
결국 인간은 세속적 이기주의의 노예이든, 거룩한 이기주의의 순례자이든, 자신의 궁극적인 만족과 유익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존재임이 틀림없다. 모든 동기의 출발점에는 ‘나’라는 굳건한 성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사실은 결코 인간을 깎아내리거나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얄팍한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우리의 민낯을 겸허히 직시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기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무엇을 나의 가장 큰 유익으로 삼고 있는가?”이다.
찰나의 권력과 물질에서 유익을 찾는 ‘세속적 이기주의’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이웃을 향한 섬김과 영원한 가치 속에서 나의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하는 ‘거룩한 이기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선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김병근 목사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