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년 6월 20일, 카탈로니아 평원에서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가 훈족의 아틸라와 싸우는 카탈라우눔 전투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발발
카탈라우눔 전투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또는 샬롱 전투는 451년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 1세가 이끄는 서로마 제국과 포이데라티의 연합군과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그 동맹군 사이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주요 군사작전이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서고트족 국왕 테오도리쿠스 1세가 전사하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훈족의 서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 카탈라우눔 전투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훈족의 갈리아 침공의 일부
.날짜: 451년 6월 20일
.장소: 카탈로니아 평원 – 대략 오늘날 프랑스 북동부의 샹파뉴아르덴 지역
.결과: 훈족의 갈리아 철수
.교전국: 서로마 제국, 서고트족, 살리족, 부르군트족, 작센족, 아르모리카인, 알란족, 올리보르네스족 / 훈족 제국, 아말계 고트족, 루기이족, 스키리이족, 튀링겐족, 프랑크족, 게피다이족, 부르군트족, 에룰리족
.지휘관: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 외 / 아틸라 외
역사의 기록은 분명히 과장되었고 따라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 측의 병력 규모는 추측으로만 알 수 있다. 6세기의 로마 역사가 요르다네스 (Jordanes)는 당시 전장에 50만 명의 병사가 있다고도 했다. 군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의 병참 기술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많더라도 양 쪽에 약 5만에서 6만 정도의 군인들이 있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마 더욱 더 적었을 것이다. 로마 군대의 경우에는 그 수를 더 잘 추정할 수 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그 군대의 절반가량은 포이데라티 (foederati, 로마 제국 내의 영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병력 제공의 의무를 진 이민족들)라고 불린 서고트족들인데, 그들은 전성기에도 전장에 2만 명 이상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니 (Alani)족을 고려한다고 해도 서로마 황제 휘하 군대는 결코 45000명을 훨씬 넘지 않았을 것이다. 아틸라의 군대는 크지는 않은 수적 우세를 가졌다. 그러므로 약 최대 5만 명의 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추측에 따르면 양 편의 군대는 약 3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것이 5세기와 6세기 시절 고대 후기 군대의 보통 규모와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틸라의 군대는 절반 정도만 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속국 병사들로 채워졌다. 이 병력들을 크기 순서대로 나열하면, 발라미르가 이끄는 동고트족, 아르다리쿠스가 이끄는 게피다이 (Gepidae)족과, 라인강 우변에 사는 프랑크족 및 마인 강가에 사는 부족의 일족인 부르고뉴 (부르군트)족이 특히 중요하다.
또한 헤룰리 (Heruli)족, 스키리 (Scirii)족, 랑고바르디 (Langobardi)족 등이 소규모 병력으로 수백 명부터 2천 명까지 있었다. 동고트족이 속국 병력의 약 절반을 차지했던 것은 확인되었다. 훈족 병사들은 평소대로 말을 탄 채 창, 곤봉, 고리형 끈과 가장 중요한 무기인 특수 제작된 기병용 활로 무장했다. 그들은 보통은 어떤 갑옷도 착용하지 않았고 단지 작은 원형 가죽방패만 방어용으로 사용하였다. 게르만족 쪽의 속국 병력의 경우에는 달랐다. 동고트족의 병력 중 1/3은 기병이었는데, 다른 족들은 모두가 보병이었다. 동고트족 기병은 중무장 기병으로 분류될 수 있다. 당시에 그들은 찌르기용 창과 날이 넓은 검 (broadsword, 독: Breitschwert)을 사용했으며, 최소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지만 때로 쇠사슬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으며, 방패를 구비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고대 후기에는 아직 등자 (말을 탈 때 발을 받쳐주는 도구)가 없었다. 보병들은 프랑크족을 제외하면 추측컨대 대개 갑옷없이 창, 날이 넓은 검 또는 장검을 가지고, 일부는 가벼운 방패도 가지고 출전했을 것이다. 게르만족은 원거리 무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동고트족만은 궁수 부대가 있었다. 프랑크족은 ‘프란치스카 (Franzisca)’라는 일회용 원거리 무기, 즉 휘어진 모양의 투척용 도끼를 병사들의 충돌 직전에 사용했다. 그와 상관없이 프랑크족 병사들은 날이 넓은 검과 나무방패로 무장했다.

아에티우스의 군대는 절반가량이 로마 정규군 부대 및 프랑크족과 부르고뉴족의 포이데라티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서고트족의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수천 명의 알라니족이 함께했다.
로마군, 프랑크군, 부르고뉴군은 중무장 보병대를 형성했다. 그 때에는 로마 후기의 병사들은 더 이상 로마 제정 초기 시절의 군단 (legio)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원형 방패, 조임쇠가 달린 투구, 양날의 긴 검 (spatha), 당시 로마군에게 항상 상당한 전투력을 안겨준 동양식 복합형 활을 가지고 다녔으며, 팔다리를 더 이상 가리지 않는 쇠사슬갑옷을 입었다. 그 부대의 일부는 아직 ‘군단’이라 불렸으나 1천 명에서 2천 명 사이의 병력만을 통솔했다. 아에티우스가 소집했던 많은 군인들은 리미타네이 (limitanei, 국경지역 병사들)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대체로 주둔지 근처의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기동성을 줄이지만 바로 그들 자신의 공동체와 가족을 지키려는 까닭에, 이 부대의 사기는 그만큼 높다. 황제 근위대인 코미타텐세스 (comitatenses)는 5세기 중엽 서로마에서 더 이상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 정예군 아래 끝없는 안팎의 분쟁이 높은 손실을 끼쳤고, 텅 빈 국고 때문에 이 부대를 예전과 같이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에티우스는 코미타텐세스도 포함하여 아직 지휘권이 있는 로마 군대 모두를 아틸라에게 대항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이 기병이었다.
라인강 변에 사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은 아마 위에 언급된 라인강 오른쪽에 사는 프랑크족과 똑같이 무장하였을 것이다. 양 측 군대에 다 있는 부르고뉴족은 단지 장검만으로 싸웠음이 명백하다. 서고트족 병사들은 378년의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래로, 알라니족 기병대의 명백한 본보기를 통해 보병에서 점점 더 많이 기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서고트 징집병의 2/3는 기병이었다. 그들은 쇠사슬갑옷과 찌르기용 창으로 무장한 귀족 기병대와, 일반 민중 출신의 경무장 기병대로 나뉜다. 후자의 기병대는 대개 갑옷이 없었으나, 투창, 날이 넓은 검, 그리고 아마도 나무나 여러 겹의 가죽으로 된 작은 기병용 방패는 있었다. 보병들에게는 창, 날이 넓은 검, 방패가 아주 널리 퍼졌으며 극히 드물지만 단순형 활도 있었고, 갑옷은 없었다. 알라니족의 무장과 싸우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훈족을 아주 많이 닮았다.

○ 전투
역사가 요르다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아에티우스 편의 프랑크족 분대가 아틸라 편의 게피드족의 분대와 싸움을 벌여 1만 5천여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서술하나 이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관습대로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점쳤고 점을 친 결과[4] 훈족이 끔찍한 피해를 입을 것이지만 그 대가로 적의 수괴가 죽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훈족이 끔찍한 피해를 입는다는 점은 불길한 점괘이긴 하였으나 아틸라는 전사한다는 적의 수괴를 아에티우스로 생각하였으므로 서로마 제국군과 맞붙기로 결정한다.
이후 회전을 진행하는 고대의 관습대로 군대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눠 각각 적과 맞붙게 하였다. 카탈라우눔 평야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었기에 언덕을 점거한 쪽이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높은 지형에 진영의 한쪽 날개를 두고 낮은 지형에는 다른 쪽 날개를 둔 상태로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마-서고트 연합 측은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서고트족 – 우익(지형상 경사가 높은 곳에 포진)
.아에티우스의 서로마군 – 좌익(지형상 낮은 경사 부분에 포진)
.알라니족 왕 상기반의 군 – 중앙
상기반에게 중앙을 맡긴 것은 서로마군과 서고트족 모두 상기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어느 한쪽 날개를 맡기면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아틸라는 자신의 좌익은 동고트족에게 맡겨 서고트족과 상대케 하고 우익은 게피드 족과 나머지 게르만족에게 맡겨 아에티우스의 로마군과 대적케 했다. 그리고 최정예인 훈족은 중앙에 포진,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다.
이렇게 배치하는 동안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의 꼭대기를 점거했는데 여기서 양측의 전략은 갈렸다. 아에티우스는 양쪽 날개에 정예 병력을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그와 반대로 정예 병력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양측 군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다. 두 군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아틸라는 급작스럽게 자신의 중앙군을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양쪽 날개가 서로 맞붙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군 병력 간 교전이 시작된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서고트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동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고 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테오도릭의 전사 이후 서고트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동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한다. 이 덕분에 서고트족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한편 좌익에 포진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은 공격하지 않고 그 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우익의 게피드 족 역시 로마군에게 덤비지 못한 채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서로 마주보게 된다. 이렇게 대치하는 동안 중앙의 훈족은 알라니족을 뒤로 계속 밀어붙였고 시간이 지나자 훈족은 로마군에게 후미를 노출시키게 된다.
이를 본 아에티우스가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시켰고 갑작스러운 후미의 공격에 무너진 훈족의 군대는 패주하여 달아난다. 한편 서고트족과의 싸움에서 밀려나던 동고트족의 군대와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좌익의 게피드 족 군대도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진형을 무너뜨리며 퇴각하였다. 로마군과 서고트족의 군대, 그리고 중앙의 상기반의 군대가 이들을 추격하였고 아틸라의 군대는 진영으로 들어가 그곳을 사수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미처 진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잔존병력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서로마-서고트 연합군은 이들을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추적하면서 살해하였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연합군 측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는데 이 와중에 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가 실수로 아틸라 진영으로 들어가 부상을 입고 간신히 빠져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아에티우스도 날이 어두웠으므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서고트족의 진영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연합군 측은 무너져버린 아틸라 군의 진영을 포위하였고 아틸라가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안장을 얹어놓아 패배하면 안장에 앉아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을 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 전투 이후
하지만 결국 아틸라는 살아 돌아갈 수 있었는데,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릭의 유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분노한 토리스먼드가 부왕의 원한을 갚기 위해 아틸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에티우스가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토리스먼드에게 빨리 서고트의 수도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의 자리를 강탈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결국 그를 그의 군대와 함께 돌려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실상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살려두어 서고트족을 견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아에티우스는 그동안 훈족을 상대하기 위해 빌린 병력을 꾸준히 주력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훈족의 소멸은 그가 앞으로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서고트족이 먼저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뒤이어 아에티우스의 로마군도 철수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틸라는 위 연합군이 철수하는 것이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한동안 진에서 나가지 않다가 정찰병을 통해 이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 뒤 갈리아에서 철수, 라인강을 넘어 자신의 본거지로 도주하였다.
이는 후일 아에티우스의 판단착오로 밝혀지게 되는데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틸라가 일년 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훈족은 아에티우스의 예상을 넘어선 회복력을 보였고 결국 갈리아 주둔 로마군은 병력부족으로 훈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 평가
전통적으로 이 전투는 역사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그 반대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와해시킬 결정적인 기회를 가지고도 이를 수행하지 않았고, 결국 북이탈리아 초토화를 초래함과 동시에 황제의 의심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입지마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갈리아는 훈족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훈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 서유럽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한 페이지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J.B. Bury의 경우 당시 훈족은 수많은 종족들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종족은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한 처지였고 아틸라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 없이는 와해되기 쉬운 조직으로 훈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훈족의 통치는 얼마가지 못할 공산이 크므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후세의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제쳐두더라도 아에티우스가 이 전투에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는 점에 대해선 많은 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에티우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기반족 군대와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알라니족을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고 알라니족과 훈족의 전투력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훈족이 알라니족을 밀어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될 것인가를 예측하여 시기적절한 후방 협공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싸움에서 아에티우스는 토리스먼드에게 기병으로 언덕을 점령하게 한 뒤 전투가 무르익자 좌측을 협공하는 기동전술을 짰고 이러한 기동은 지형활용에 대한 뛰어난 지식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아군과 적군의 장단점을 정확히 고려한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 전투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싸움이었다 평가할 만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