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8월 29일, 백제 (百濟, BC 18 ~ AD 660) 멸망
백제 (百濟)는 한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로, 신라, 고구려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BC 18년 온조왕을 시조로 이어오다 의자왕 (義慈王, 599년 ~ 660년, 재위 : 641년 ~ 660년) 제위기 나·당연합군에 의해 AD 660년 7월 18일(음력)에 멸망한다.
백제의 시조는 부여·고구려에서 피난한 온조왕으로 전해지며,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십제국으로 시작해 6세기경 마한을 병합했다.
이복지간인 고구려 건국 세력에 밀려 부여권 일대에서 해상으로 피난한 온조 부족이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십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한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다.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초창기에는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부여 계통의 온조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제국 (十濟國)이 마한에서 세력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십제국은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며 4세기부터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4세기 중엽에는 전라도 부족국가 일부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굴복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538년 성왕 시절에는 수도를 웅진 (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 (南扶余)로 변경하였으며,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았으나 신라의 전술로 인해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고 결국 성왕은 관산성에서 사망하였다. 국력이 계속 약화되며 영토가 수축하다가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그 후 부흥운동이 일어나 왜국의 인질이었던 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며 투쟁을 이어갔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 내분이 발생하면서 3년 만에 전멸하였다.

○ 국호
기록상 백제는 나라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 (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 (溫祚王)이 형인 비류 (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한편 중국 측의 역사서인 『수서 (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 (戶)가 바다를 건너 [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 16년,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 (南扶餘)로 바꿨다. 다만 남부여라는 국호가 멸망 때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1995년에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백제창왕 (百濟昌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했음에도 바로 다음 왕인 창왕, 즉 위덕왕대에 와서 다시 백제 (百濟)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별칭으로는 응, 응준, 응유가 있으며, 예군 묘지명에 나타나는 일본이 백제를 가리킨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 역사
백제 (百濟)는 한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로, 신라, 고구려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BC 18년 온조왕을 시조로 이어오다 의자왕 (義慈王, 599년 ~ 660년, 재위 : 641년 ~ 660년) 제위기 나·당연합군에 의해 AD 660년 7월 18일(음력)에 멸망한다.
– 초기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에 실린 온조 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에 부여 계통의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주몽왕과 소서노의 아들이며, 최초의 이름은 십제였다. 철기 문화를 보유한 부여 부족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으로 피난한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비류가 자살하자 주민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겼으므로 비로소 십제 (十濟)가 건국되었다. 혹은 구태가 건국 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진다.
당시 한강 지역은 직산-천안을 중심으로 한 목지국이 다스리던 마한의 영토로서, 100리의 땅을 할애받아 십제를 세우고 미추홀과 연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설령 부여에서 한 부족이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했더라도 인구의 주축이 토착계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강유역의 재래 집단에 고구려계, 부여계, 옥저계, 예계 부족이 합류하였을 수 있지만, 신라계, 가야계, 중국계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왜인들이 목포, 그리고 광주와 전주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도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기원은 부여계 뿐만이 아니었다.
246년에 진한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대방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한은 대방태수 (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참패하였고 이로 인해 목지국 (目支國)이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서 백제는 기존의 마한 54개 부족연맹체의 우두머리였던 목지국을 제압하게 된다. 3세기 중엽에서야 백제 고이왕은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이후 중국과의 무역로를 확보하며 중국 문물들을 받아들인 결과, 16관등, 공복, 6좌평과 상좌평을 제정하는 등 권력 체계를 확대하여 독재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고이왕 이후 낙랑과 계속되는 싸움에서 298년에는 책계왕이 살해되었고, 304년에는 분서왕이 살해되었다.

– 정치적 성과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한의 일부 국가를 병합하여 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에까지도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평양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자주 침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비교적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재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일방적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독자 권력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군사 활동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을 일부 제압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랴오시, 산둥, 큐슈 등과 무역을 시작했다. 양서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랴오둥 일대를 점령한 시기 (397년 이후)에 백제가 랴오시로 진출하여 대륙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무척 어려운 상황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사망하였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 (475년)를 옮기면서 영토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중국과 왜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간 내분이 발생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투쟁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내분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편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 (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대륙사관론자들은 이를 백제가 뤄양을 정복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마한 전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여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와 다툼이 발생하면서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무왕은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기회주의를 펼쳤다. 이와 더불어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 (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성을 중수했으며 고향인 전라도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 (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 (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 사택씨 (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 (彌勒寺)를 창건했다.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존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佐平) 사택적덕 (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회복되어,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숙청을 통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 멸망
고당전쟁 당시 보인 백제의 태도 때문이었다. 백제는 618년 당나라 건국 직후부터 대당 외교에 대단히 공을 들였으며, 이것이 고구려를 견제하려던 당의 의도와 맞아떨어져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전 작업 아래 643년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의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당태종의 경고에 따라 의자왕은 스스로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그리고 645년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백제와 신라 양쪽 모두에 고구려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기서 신라는 당의 요청에 원군 3만을 보냈지만, 백제는 원군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여 644년 김유신에게 빼앗긴 7개 성을 되찾는다. 이후 백제를 사방에서 압박하고 있던 신라에 의해 백제의 대당 외교가 실패했고 당고종이 즉위한 후인 650년이 되어서야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당은 김춘추의 언변에 화답해 외교 파트너를 백제에서 신라로 완전히 교체하고 651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화친의 조건은 ‘신라에게서 뺏은 대야성과 포로들을 모두 돌려줘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백제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고, 의자왕은 당과의 회복노선에 최선을 다하는 듯 하면서, 고구려를 도와 말갈과 함께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신라의 한강 지역 33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백제는 당나라와의 외교 노선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버렸다. 거기에 백제의 내홍이 발생하는데, 642년 의자왕이 백제의 귀족들을 대거 쳐내며, 자신의 아들들에게 고위직을 물려주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여기에 불만을 가진 백제의 귀족 세력들이 대거 신라에게 붙는 상황이 되었다. 655년 10월 김유신이 사비성 근처인 도비천성을 함락시키자 좌평 임자와 내통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또한 당 고종 역시 신라와 함께 협공할 것을 계산하고, 백제에게는 관계 정상화를 두고 계속해서 거짓정보를 흘렸는데, 이 상황에서도 상황판단을 잘못하며, 자아도취한 의자왕은 결국 성충의 충언을 무시하고 아사시키는 잘못을 했다. 백제는 신라와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돌궐-고구려-백제-왜 와, 당-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고종은 마침내 660년 3월 소정방을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하였고 신라 또한 김유신과 5만 군사를 보내 동서로 협공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군대를 끌고 오는 것을 의자왕이 파악할 때쯤, 한강 유역과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의 주력군을 소집하고, 왜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해서, 계백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지연전을 펼치도록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매국노 예식진의 배반으로 결국 660년 7월 18일 (음력) 항복으로 멸망을 선언한다. 당군은 의자왕을 포함해 부여씨 왕족, 귀족, 일반 백성 등 포로 13만 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이후 백제는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이 시작되어 약 3년간 항쟁하였으나 부흥군과 파병된 왜군 연합군이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몰살당하며, 백제의 잔여 세력까지 완전히 몰락한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