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선종한 로마 교황들 – 23대 교황 스테파노 1세 (Stephanus I, 257년), 71대 교황 세베리노 (Severinus PP, 640년), 82대 교황 요한 5세 (686년)
8월 2일 선종한 로마 교황으로 23대 교황 스테파노 1세 (Stephanus I, 257년), 71대 교황 세베리노 (Severinus PP, 640년), 82대 교황 요한 5세 (Ioannes PP. V, 686년)가 있다.

○ 23대 교황 스테파노 1세 (Stephanus I, ? ~ 257)
스테파노 1세 (라: Stephanus I, 이: Stefano I, ? ~ 257년 8월 2일)는 제23대 교황 (재위: 254년 5월 12일 ~ 257년 8월 2일)이다. 그리스 혈통이었지만, 로마에서 태어났다. 교황 루치오 1세의 수석부제로 봉사하다가 그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아 교황직을 위임받았다. 사후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2일이다.
250년에서 251년에 걸친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끝난 후, 배교했다가 회개한 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서 교회 내에서 서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리옹의 주교 파우스티노는 스테파노 1세에게 배교했다가 회개한 신자들에 대한 용서 및 교회로의 복귀를 거부한 아를의 주교 마르치안을 고발하였다. 파우스티노는 마르치안이 이단으로 단죄받은 노바시아노주의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 단호하게 조치할 것을 스테파노 1세에게 촉구하였다.
스테파노 1세와 치프리아노 사이에 이교(離敎)에서 집전한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스테파노 1세는 이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보편 교회로 회심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치프리아노와 아프리카 및 소아시아의 다른 로마 속주의 주교들은 이교의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회심한 이들이 보편 교회의 성찬례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55년 평신도 마그누스의 요청에 따라 치프리아노가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논증하자 255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이를 지지하였다. 이에 치프리아노는 256년 71명의 주교가 참석한 회의의 결과를 로마에 보냈다. 그러나 치프리아노의 사절단이 홀대받자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는 대립하게 되었다.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각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주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테파노 1세도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자 치프리아노는 256년 9월 1일에 소집된 주교 87명의 지지를 얻어 카파도키아 지역 카에사리아의 주교 피르밀리아노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황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하였다. 피르밀리아노가 보낸 편지는 스테파노 1세를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교에서 거행한 세례를 인정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스테파노 1세가 이들을 파문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주교가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자를 조절하였다. 결국 스테파노 1세의 주장이 승리하여 교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이교에서 회심한 이들은 안수로써 죄 사함을 받고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파노 1세는 또한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레온의 주교 미르시알과 아스토르가의 주교 바실리데스가 이방 종교의 신에게 제물을 봉헌하였다고 하여 주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바실리데스가 개인적으로 스테파노 1세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였다. 이에 스테파노 1세는 미르시알과 바실리데스를 용서해주고 그들을 주교로 복직시켰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으며, 스테파노 1세가 교황직에 올라 257년 8월 2일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354년 작성된 《주교 사망록》 (Depositio episcoporum)에는 스테파노 1세 교황을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교회 역시 순교자로 기념하고 있지 않다. 스테파노 1세가 앉았다고 전해지는 주교좌는 18세기까지 피로 얼룩진 상태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 71대 교황 세베리노 (Severinus, ? ~ 640)
교황 세베리노 (라: Severinus PP, 이: Papa Severino, ? ~ 640년 8월 2일)는 제71대 교황 (재위: 640년 5월 28일 – 640년 8월 2일)이다.
– 교황 선출과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대립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세베리노는 로마 태생으로 아비에누스의 아들이라고 한다. 부친의 이름으로 보건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아비에누스는 501년 로마의 콘술을 재임하였다.
세베리노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한 지 사흘 만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638년 10월 세베리노는 자신의 교황 선출에 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세베리노가 단의설의 신앙고백인 《에크테시스》 (Ecthesis)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교황 선출을 인준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교황의 사절단은 《에크테시스》에 서명해주면 교황 선출을 인준해주겠다는 헤라클리우스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로마 교황좌가 무한정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했다. 고민 끝에 그들은 세베리노에게 헤라클리우스의 요구사항을 전달한 후 어떻게 해결한 것인지 그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는 죽기 전에 단의설을 비판한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의 서신에 대한 대답으로 《에크테시스》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교황 호노리오 1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로 하여금 648년 12월 《에크테시스》를 칙령으로 발표하여 동로마 제국 전역에 널리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군 사령관 (magister militum) 에우스타키우스에게 《에크테시스》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받아내라는 특명을 내린 후에 그를 라벤나 총독 이사아키우스에게 보냈다.
그러나 세베리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의지 (意志)를 가지고 있다는 단의설의 주장이 담긴 《에크테시스》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라벤나 총독 이사아키우스는 황제의 뜻에 따라 세베리노의 교황 선출을 인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18개월 넘게 지속되었다. 그동안 이사아키우스는 황제로부터 받은 명령을 달성시키고자 수석비서관 (chartoularios) 마우리키우스에게 교황의 관저인 라테라노 궁전을 약탈하여 강제로라도 그가 에크테시스에 동의하게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마우리키우스는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지역 귀족들을 끌어들여 지역 로마군 병사들에게 접근하였다. 마우리키우스와 그와 동참한 지역 귀족들은 병사들에게 교황이 그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성난 그들은 폭도로 돌변하여 라테라노 궁전을 향해 들이닥쳤다.
세베리노는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라테라노 궁전을 지켜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마우리키우스는 곧바로 전략을 수정해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로마 판관들과 함께 사흘만에 라테라노 궁전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마우리키우스는 교회 재산 창고를 즉시 개방하고, 라벤나 총독에게 라테라노 궁전에 와서 교회 재산을 마음껏 가져가도 된다는 전언을 보냈다. 마우리키우스가 라테라노 궁전을 점거했다는 소식에 이사아키우스는 속히 라테라노 궁전에 와서 기독교 성직자들을 모조리 추방시키고 8일 동안 교회 재산을 약탈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약탈한 교회 재산의 일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에게도 보냈다.
– 황제의 교황 선출 승인
한편 교황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속 체류하면서 세베리노의 교황 선출 승인을 줄기차게 요청하였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세베리노가 에크테시스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그의 선출을 승인해줄 수 없다면서 계속 거부하였다. 세월이 흘러 헤라클리우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서서히 죽어갔으며, 교황의 사절단은 여전히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마지막으로 단의설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헤라클리우스는 세베리노의 강력한 저항에 좌절하여 단의설을 인정하라는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게 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교황 사절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베리노의 교황 선출을 승인하였다. 교황 사절단은 그 즉시 로마로 돌아가서 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세베리노는 마침내 640년 5월 28일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이사아키우스는 서둘러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 교황으로서의 활동과 죽음
세베리노는 교황으로서 《에크테시스》를 거부하고 단죄하였다. 시노드를 소집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神性)과 인성 (人性)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에 치중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훼손된 모자이크들을 복구하도록 지시하였다. 안타깝게도 세베리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미 나이가 많았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고작 2개월에 불과하였다. 세베리노는 640년 8월 2일에 선종하였다.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친절하고 관대하며 온화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던 세베리노는 성직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다고 한다.

○ 82대 교황 요한 5세 (Ioannes PP. V, 635 ~ 686)
교황 요한 5세 (라: Ioannes PP. V, 이: Papa Giovanni V, 635년 ~ 686년 8월 2일)는 제82대 교황(재위: 685년 7월 12일 ~ 686년 8월 2일)이다. 교황 펠라지오 1세 이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 없이 기독교의 주교 성성 (成聖)이 된 첫 번째 교황인 동시에 동로마 제국 출신으로 연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열 명의 교황들 가운데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 관계를 조정하는데 주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생애 초기
요한은 아시리아인으로 안티오키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리스어에 능통하였던 그는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 교황 선출
요한 5세는 교황 펠라지오 1세 이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 없이 주교 성성이 된 첫 번째 교황이다.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는 요한 5세의 전임자인 교황 베네딕토 2세 재임 중에 새로 선출된 교황은 황제의 승인을 받고 나서 주교 성성이 되는 관례를 폐지하고 선출 즉시 지체하지 말고 바로 주교 성성이 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자고 제안하였다. 초대 교회 시절의 관례대로 요한 5세는 일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5세는 685년 7월에 선출되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로마의 성직자들과 백성들이 충분히 동방화가 되었다고 받아들였으며, 그의 생각처럼 이후 열 명의 교황 모두 동방 출신이 선출되었다.
– 교황
요한 5세는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로마 황제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에 있는 교황의 재산에 부과한 세금을 크게 줄였으며, 근년에는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받았던 곡물에 부과한 부가세 등을 폐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요한 5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외교관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들이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문헌을 읽고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하며 어떠한 변조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였다. 황제는 ‘로마 시의 교황 요한’에게 보낸다고 서신에 명시하였지만, 그의 서신이 로마에 당도했을 당시 요한 5세는 이미 선종하고 그의 후임자인 교황 코논이 대신 받아 읽었다.
요한 5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로마 관구에 속한 모든 교구와 자치수도원구의 성직자들에게 금화 1,900솔리디를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 사후
교황 요한 5세가 짧은 기간 동안의 재위를 마치고 선종하고, 그의 후임자로 코논이 선출되었다. 686년 8월 요한 5세가 선종한 후에 후임 교황 자리를 두고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수석사제 페트로스를 지지하였지만, 군부 측은 테오도로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사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성직자들은 라테라노 대성전 밖에 모여 군인들이 대성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다. 이에 군부 측은 인근의 성 스테파노 성당에 모여 테오도로스를 새 교황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결국 성직자들은 페트로스가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타협안으로 그리스계 시칠리아 사람인 코논을 내세웠다. 코논은 이미 고령이어서 건강도 좋지 못하였으나, 점잖고 단순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만장일치로 코논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5세는 사후 옛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있는 교황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문에는 그가 단의설에 맞서 싸운 것을 칭송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당신 (요한 5세)은 신앙의 이름 아래 매사에 경계하고, 사악한 늑대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양들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짓밟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단결시키셨습니다.” 864년 사라센족의 로마 약탈 때 요한 5세의 무덤은 파괴되었으며, 16세기와 17세기에는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붕괴하면서 요한 5세의 무덤 인근이 모조리 무너져 버렸다.

23대 교황 스테파노 1세, 71대 교황 세베리노, 82대 교황 요한 5세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