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
들어가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아마도 이 구절은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사랑받고 애용(?)되는 구절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교인들의 일터를 찾게 될 때면 액자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성구이다.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성공과 희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욥기에서 이 구절이 쓰였던 문맥을 살펴보면 성공과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말은 욥의 친구들 중 하나인 빌닷이 욥을 정죄하기 위해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전체 문맥을 이해하지 않은 채, 좋아하고 은혜되는 구절만 쏙 빼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 뿐만 아니라 모든 책을 독서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책의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한 문장이나 단어에 집착하는 것보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는 편이 저자의 의도와 내용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수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언론계에서도 비등한 문제가 일어난다. 위와 같이 특정 한 구절만 의도적으로 편집해서 보도하게 되면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는 달리 왜곡된 보도로 독자들을 혼동시킬 수 있다.
말씀을 보는 새로운 눈
교회라고 이러한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만약 설교 가운데서 성경의 문맥을 무시한 채 교인들에게 전해진다면 성경의 본래 뜻과 달리 오해가 발생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음을 고민해보자.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터넷의 발전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역사의 흐름이 역동적으로 진보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왜 오늘 날 설교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중세시대 강단에서 전해졌던 메세지와 별반 차이점이 없고,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채로 반복 재생산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원인은 무엇인지를 말이다. 사람들의 삶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채, 설교자들이 원하는 메세지만 전하고 시대정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메세지는 허공에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물론 설교 가운데 시대가 지나도 사랑, 생명, 평화와 같이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설교 자체는 시공간을 초월해 그 자체가 불변의 진리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교는 작성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성자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시대의 아들이며 동시에 그 시대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여러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설교저자와 성경의 주인공들이 어떤 삶에 자리(Sitz im Leben)에 있는지에, 어느 역사적 흐름에 있었는지에 따라서 같은 본문의 말씀도 여러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림에서 작품으로
예전에 미술학도인 지인과 함께 루벤스의 작품 ‘Simon and Pero’라는 그림을 본적이 있다. 물론 유명한 그림이어서 눈에 익숙하였지만 그림이 난해하였기에 그냥 지나치곤 했다. 언뜻보면 한 노인이 젊은 여성의 가슴을 입에 대고 있어 성적으로 문란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필자는 미술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기에 그림이 민망하여 당황하고 있었던 찰나에 지인이 설명해주었다.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성의 아버지로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으며 독재정권이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음식물을 주지 않고 굶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그의 딸이 해산한지 얼마 안되어 힘든 몸을 이끌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려 찾아 갔다. 아버지를 대면한 딸은 처참한 몰골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딸은 수치심과 부끄럼을 잊은채 자신의 가슴을 열어 아버지의 입에 물렸던 것이다. 그리고 곧 아버지는 숨을 걷게 된다.
자! 이 맥락을 이해했다면 루벤스의 작품을 다시 살펴보라. 필자가 처음 대했을 때의 민망한 그림에서 전혀 다른 작품이 되지 않았는가. 그림에 대해 전후 맥락과 배경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림’에서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이야기 역시 문자 그대로 읽고 한 가지 해석만 유추하게 되면 성경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는 많은 위인들, 지도자, 평범한 사람과 다양한 사건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물과 사건들 안에는 무궁무진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여러 이야기들을 마치 깔대기 안에 넣어 한가지 메세지만 접하게 되는 좁은 시각이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는 결과만 가지고 만나게 되면 그는 언제나 믿음의 사람으로 읽히게 된다. 그의 삶의 여정에는 자기가 살기 위해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소인배의 모습도 있고, 자식이 없는 할아버지의 고뇌도 있으며 하나님이 자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녀와 동침해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믿음의 조상이니 괜찮아”하는 결과론적인 시각으로는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다가갈 수 없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우리는 어떻게 그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의 가족’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면서
얼마 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인순이의 무대를 본적이 있다. ‘아버지’라는 곡을 부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많은 청중과 시청자들이 눈물과 감동의 무대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인순이는 노래를 잘 하는 가수이다. 그러나 단순히 노래만 잘 한다고 해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혼혈로서 받아온 편견과 고난을 이겨낸 삶의 궤적을 모두와 공유했고 그것을 노래로 담아냈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삶의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삶의 노래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역사 속에서 고뇌하고 실수하면서도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아낸 믿음의 이야기들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의 책이 되는 것이며 믿음의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와 공유되지 않으면 성경은 나와는 상관없는 ‘무거운 책’이 되고 만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글에서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성경인물들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 희망하기는 그동안 위대하게만 바라보았던 성경 인물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웃었으며, 아파했고 울기도 했던 역사의 인물들이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하며,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 정직함과 용기를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광현 목사
wisdom0405@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