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년 3월 12일, 신라 (新羅) 20대 왕 자비 마립간 (慈悲麻立干, ? ~ 479) 타계
자비 마립간 (慈悲 麻立干, ? ~ 479년 3월 12일 / 음력 2월 3일; 재위 458년 ~ 479년 3월 12일)은 신라의 제20대 임금이다.
성은 김씨이며, 눌지마립간 (訥祗痲立干)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실성마립간 (實聖麻立干)의 딸 김씨이다. 왕비는 내물마립간 (奈勿麻立干)의 아들이었던 미사흔 (未斯欣)의 딸 김씨인데, 461년 (자비마립간 4)에 맞아들였다. 눌지마립간 재위시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해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 자비 마립간 (慈悲 麻立干)
.출생: 미상, 신라
.사망: 479년 3월 12일 (자비마립간 22)
.본관: 경주
.주요 관직: 신라 제20대 국왕(재위: 458∼479)
.관련 사건: 고구려의 백제 한성 침공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왕비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로, 재위 4년째인 461년 부인으로 맞았다.
459년 음력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쌌다.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음력 5월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1천여를 생포했다.
이듬해인 463년 음력 2월 또다시 쳐들어와 삽량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음력 7월에 군을 사열하였으며,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다.
468년 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이해 음력 9월 하슬라 주민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마립간은 이후 방위체계 확립에 주력, 469년 음력 4월의 수해 복구를 위해 음력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했으며, 470년 삼년산성을, 471년 모로성을 쌓고, 473년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474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475년 음력 7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이미 살해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신라본기에는 47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모두 47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본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476년 음력 6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마립간이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음력 5월에 또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 생애 및 활동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 (族制的)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 (六部)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469년에는 왕경 (王京)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해 방리명 (坊里名)을 확정하였다. 이로써 왕경은 족제적 성격을 탈피하고 행정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 되었다. 방 (坊)과 리 (里)는 6부의 하부 행정구역으로, 전성기의 신라 서울은 1,360방 혹은 360방, 55리로 되어 있었다. 방과 리의 관계는 방을 리보다 상위 행정구역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리가 방보다 큰 행정구역으로 부 (部)-리 (里)-방 (坊)의 계통체계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 (南進政策)에 대비해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 (攻守同盟)을 보다 강화하였다.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 (長壽王)이 백제를 공격하자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 (蓋鹵王)이 아들 문주 (文周)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동수동맹에 입각해 백제에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병이 백제에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 (漢山城: 漢城)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자비마립간 11년 (468년) 말갈 (靺鞨)의 1만 군사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 (悉直城: 강원도 삼척)을 침략한 후 동해안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신라 북변을 공략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해 니하 (泥河) · 삼년산성 (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 모로성 (芼老城) · 일모성 (一牟城) · 사시성 (沙尸城) · 광석성 (廣石城) · 답달성 (沓達城) · 구례성 (仇禮城) · 좌라성 (坐羅城)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하였다. 이들 지역은 주로 신라 서북변의 소백산맥 일대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방비하고, 아울러 이미 확보한 점령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한편 몇 차례에 걸쳐 왜 (倭)가 침입했는데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463년에는 삽랑성 (歃良城: 지금의 梁山)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 (倭兵)을 크게 격파하였다. 왕은 왜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았고,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해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 가계
부왕 : 눌지 마립간 (訥祗 麻立干)
모후 : 아로부인 김씨 (阿孝夫人 金氏)
왕후 : 파호부인 김씨 (巴胡夫人 金氏), 미사흔의 딸
장남 : 미상
차남 : 미상
아들 : 소지 마립간 (炤知 麻立干)
딸: 준명공주 김씨 (俊明公主 金氏)
후비 : 김씨, 김물력 (金勿力)의 딸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