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왜곡과 진실
차종환, 김인철 / 프라미스 / 2020.5.25
차종환, 김인철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유신체제 붕괴의 전주곡〉, 〈전두환의 등장〉, 〈5ㆍ18 전주곡〉, 〈10일간의 5ㆍ18항쟁 진행〉, 〈5ㆍ18과 미주 동포〉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목차
제1장 유신체제 붕괴의 전주곡
제2장 전두환의 등장
제3장 5.18 전주곡
제4장 10일간의 5.18항쟁 진행
제5장 5.18과 미주 동포
제6장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계엄군 책임자 처벌
제7장 지만원의 ‘5.18 분석 최종보고서’를 보고
제8장 전두환 회고록의 문제점
제9장 53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
○ 저자소개 : 차종환, 김인철
– 저자: 차종환
한국에서 동국대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미국에서 UCLA대학원 Post Doctoral 과정을 3년간 이수했다. 원예대학장, UCLA 연구교수로 22년간 근무했으며 민주평동 LA회장을 역임하였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인권운동, 우리영토 수호회복운동을 약 반세기동안 하고 있으며, 사재로 장학사업을 27년째 계속하고 있다. 국민훈장 등 150여개를 수상하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국대학교 대학원
한미인권연구소 중앙이사장
민주평통 L.A지역협의회장
세계한인민주회의 상임고문
남북한의 다름과 이해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5·18민주화 운동 이야기
이 외에 300여권의 책과 학술논문 200여편 저술함.
– 저자: 김인철
광주광역시 1954년 1월 10일생으로 1977년 12월 공군 병장 전역(253기), 1980년 2월 조선대학교 졸업 후 1980년 2월 기독교 광주방송 근무, 1986년 6월 도미, 1990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고위정책결정자과정 수료), 2015년 2월 남가주 호남향우회(35대 이사장 역임), 2015년 8월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을 수상했다. 비즈포스트그룹 부회장, 남가주 호남향우회 부회장, 18기 남가주평통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광주광역시 1954년 1월 10일생
1977년 12월 공군 병장 전역(253기)
1980년 2월 조선대학교 졸업
1980년 2월 기독교 광주방송 근무
1986년 6월 도미
1990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고위정책결정자과정 수료)
2015년 2월 남가주 호남향우회(35대 이사장 역임)
2015년 8월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 수상
현 비즈포스트그룹 부회장
남가주 호남향우회 부회장
18기 남가주평통 자문위원 역임함.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개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 · 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인민봉기 (光州人民蜂起)”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등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 의의와 평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50년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이었으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사건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집권세력에 대항해 최초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 저항 운동의 수준과 한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뚜렷한 지도부와 이념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비조직적 군중의 자연발생적인 자구행위였으며, 방어적이고 대중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식 반독재시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항쟁의 주체들은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진압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이전의 친미적인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988년 여름 대한민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윌리엄 글라이스턴 당시 주한미국대사와 전 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의 증언을 요구하자 미 국무부는 그들의 증언을 거부하는 대신 광주특위의 서면 질문에 국무부가 동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 결과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미국정부의 성명서」가 1989년 6월 19일에 작성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 한국 당국은 1980년 5월 18일 0시 1분에 시작된 전국계엄령 선포를 불과 2시간 여 앞둔 전날 21시 30분 경에 미국에 통보하였으며, 광주의 관영 라디오 방송이 한국 특전사의 광주파견에 대해 미국이 승인하였다고 방송했지만 이는 거짓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 계엄사가 광주에 동원한 특전사나 20사단은 광주 투입 당시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광주에 동원된 것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광주에서 행한 것에 대하여 미국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판단했으므로 특전사의 작전에 대한 사전 승인에 대하여 강력하게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압력이 꼭 법적인 근거에 의해서만 행해지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광주사건을 방조하고 사후 승인한 책임을 면하기 위한 성명으로 볼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등은 당시 전두환 장군을 방문하여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하면서 종용과 설득, 압력이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미국은 극히 미미한 영향밖에 미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더 이상 혼란에 빠져 반미적인 국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군인들의 진압행위를 결과적으로는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단기적으로는 광주에서의 특전사를 20사단으로 대체하는데 마지못해 동의하는 등 병력의 출동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행사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1년 전에 김대중을 만난 사실이 있었던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미국은 김대중이 체포된 다음 날인 1980년 5월 18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미국 대사관은 미국 관리가 김대중의 재판에 방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이를 불쾌하게 여겼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재판 후 김대중에 대한 기소내용은 억지 (far-fetched)라고 발표하였고,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뒤 레이건 정부가 출범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의 감형과 자신의 방미를 연계시켰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