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년 5월 24일, 제5차 십자군 (1217 ~ 1221)이 이집트를 향해 아크레에서 출발
제5차 십자군 (1217년 ~ 1221년)은 헝가리 왕 엔드레 2세, 오스트리아 제후 레오폴트가 참가한 기독교의 십자군이었다.
아크레 상륙 후에 그들은 곧 아이유브군과 직면하게 되어, 팔레스티나 탈환을 단념했다.
1218년 5월 24일부터 1219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왕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 군은 아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하고 나일강 어귀의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에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은 화의 (和議)를 제창하고 아울러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의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 시리아 군은 무모하게도 1221년 카이로 진격을 개시했지만 완패했다.

– 제5차 십자군
.날짜: 1213 ~ 1221년
.장소: 레반트, 이집트
.결과: 아이유브 왕조의 승리
.교전국: 십자군 연합 / 아이유브 왕조
.지휘관: 장 드 브리엔 / 알아딜
5차 십자군의 최초 계획은 1208년부터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는 상당히 현실주의적 정치인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 수복은 물론 아이유브 제국 해체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추진했다.
아이유브 제국이 건재하는 한 예루살렘 수복은 설령 성공하더라도 유지는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점령하거나 적어도 아이유브 제국을 해체해야 했다.

1213년 교황은 5 차 십자군의 모집을 선언했다. 그러나 십자군 모집은 지지부진했다. 왜냐면 당시 프랑스에서는 실지왕 존과 필립 2세가 대립하고 있었고 독일 역시 오토 4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16년 인노켄티우스 사망 후에 1217년 호노리오 3세가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실시하였다. 5차 십자군 초기에 가장 특이한 일은 바로 헝가리가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 참전한 일이다. 그것은 엔드레 2세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왕 엔드레 2세, 오스트리아 제후 레오폴트가 참가하였고 아크레 상륙 후에 곧 아이유브군과 직면하게 되어, 팔레스티나 탈환을 단념했다. 1218년부터 1219년에 걸쳐서 예루살렘왕 장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 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하고자 나일강 어귀의 다미에타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그 시점에 아이유브왕조의 술탄이 사망하게 되고 아들 알카밀이 다미에타의 방위에 힘쓰는 사이 카이로에 정변이 일어나 그의 동생을 술탄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알 카밀은 병력을 카이로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십자군과 다른 술탄들, 그리고 이집트 내부의 정적들에 둘러싸인 채로 위험한 소모전을 치루기 보다는 알 카밀은 큰 것을 양보하는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즉 성도 예루살렘을 십자군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기로 한 것이다.
십자군의 명분이 성지 탈환이었으므로 이런 조건을 내건다면 사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5차 십자군이 성지와 주변 지역을 탈환하는 선에서 1219년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은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 펠라기우스
아무래도 5차 십자군에서 신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5차 십자군이 성지 탈환 하나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렇게 일이 쉽게 해결될 순 없었다.
이야기를 다시 알 아딜 사망 직후인 1218년 하반기로 돌리면 당시 알 카밀은 다미에타를 열심히 방어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여러 겹으로 요새화된 다미에타의 외각지역과 해안가의 교두보만을 점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에게는 애석하게도 교황은 이런 십자군을 돕기 위해 5차 십자군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 (Pelagius) 를 십자군의 종교적인 지도자로 파견한 것이다. 이 인물은 1213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는 중대한 과업을 담당했지만 결과적으로 동방 정교회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두터운 신임 때문인지 이번에는 5차 십자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띄고 다미에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성무 이상으로 세속에 관심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이런 인물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그렇지 않아도 지휘권이 통일되지 않은 5차 십자군에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재앙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에 당도하자 마자 예루살렘 국왕 장드 브리엔 보다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하여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지휘권에 일일이 간섭하므로써 십자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갔다.
이와 같이 펠라기우스의 등장이 인재 (人災) 였다면 1218년 10월 이후로 발생한 폭풍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은 그야말로 천재 (天災) 였다. 이 사건은 마치 아크레 포위전의 재판과도 같았는데 엄청난 폭풍과 홍수가 지나간후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1219년에 이르러 이 전쟁을 계속해야 겠다고 믿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 공세를 명령했다. 적지 않은 십자군이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다행히 (?) 이 전염병이 다미에타의 수비군에도 악영향을 미쳤으므로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다미에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사실 알 카밀은 앞서 말한 궁정 음모를 처리하기 위해 카이로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라의 은총이었는지 결국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반대로 알 카밀 역시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1219년의 여름이 찾아오고 다미에타 포위전이 1년이 되가자 알 카밀은 이 의미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일단 자신이 가진것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 (단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는 파괴시킬 작정이었다) 을 맺으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십자군의 시선을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는지 몰랐다.
이와 같은 소식이 십자군 진지에 당도했을 때 이를 강경하게 거절한 것은 바로 펠라기우스 였다. 그는 이집트를 모두 점령하고 말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가 생각하기에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은 (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을 추기경 역시 알고 있었다) 그 만큼 알 카밀이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지금이 공격의 호기라는게 펠라기우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결국 5차 십자군에서는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펠라기우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들은 지원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만한 태도로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는 평화 협상 제의마저 거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된 다미에타의 십자군 가운데는 이탈하는 부대가 속출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왔는데 추기경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미 다미에타 하나만을 점령하는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과연 이집트 정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홀란드 (네덜란드) 의 빌헬름 1세 (William I of Holland) 가 펠라기우스가 평화 협상을 거부한 것을 듣자 마자 먼저 짐을 싸서 고향으로 떠났다. 오스트리아 공작 역시 이 의미없는 소모전에 더 이상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를 향해 귀국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십자군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장 드 브리엔의 뛰어난 지도력과 3대 기사단 (성전, 구호, 튜튼) 이 십자군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끝까지 피를 보겠다는 추기경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은 1219 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다미에타에 당도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 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카이로에서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고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펠라기우스도 뒤늦은 화평제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시기 이루어진 것은 화평이라기 보단 그냥 항복이었으나 자신의 삼촌인 살라딘의 선례를 따랐는지 알 카밀은 매우 관대하게 이들이 살아서 나갈 수 있도록 선처했다. 대신 다미에타는 돌려줘야 하고 8 년간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알 카밀 입장에서는 이들을 모두 살육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평화 협상을 더 갈망했다. 유럽에서 대규모 군대가 새롭게 조직되어 오는 것 보다는 그게 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알 카밀은 하틴 전투에서 상실한 참 십자가를 돌려주기로 약속하므로써 (3차 십자군 때 부터 반환할 것을 십자군 측에서 요구해 왔다) 자신의 큰 배포와 평화를 위한 열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낭패스럽게도 마침 돌려주려고 보니 참 십자가가 어딘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슬람 교도들에겐 전혀 중요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참 십자가의 조각이라고 여겨지는 성 유물들은 꽤 많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의 주요 교회 가운데는 이를 보관하는 곳들이 꽤 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