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레베카 솔닛 / 창비 / 2015.5.15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과 재치 넘치는 글쓰기를 선보여 환영받아온 리베카 솔닛의 신작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전세계에서 공감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신조어 ‘맨스플레인’의 발단이 된 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비롯해 여성의 존재를 침묵시키려는 힘을 고찰한 9편의 산문을 묶었다.

잘난 척하며 가르치기를 일삼는 일부 남성들의 우스꽝스런 일화에서 출발해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성별 (남녀), 경제 (남북), 인종 (흑백), 권력 (식민-피식민)으로 양분된 세계의 모습을 단숨에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늘 마주하는 일상의 작은 폭력이 실은 이 양분된 세계의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씨앗임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넓은 지식과 힘있는 사유로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의 문학,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사진, 프란시스꼬 데 쑤르바란의 그림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성 대 남성으로 나뉘어 대결하는 세계의 화해와 대화의 희망까지 이야기하는 대담하고도 날카로운 에세이다.
– 뭐든지 설명하고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에게 보내는 통쾌한 한방!
2010년 《뉴욕 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바 있는 ‘맨스플레인 (mansplain, man+explain)’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는 태도로 설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합성어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전세계에서 공감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신조어 ‘맨스플레인’의 발단이 된 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비롯해 여성의 존재를 침묵시키려는 힘을 고찰한 9편의 산문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환경 · 반핵 · 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잘난 척하며 가르치기를 일삼는 일부 남성들의 우스꽝스런 일화에서 출발해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성별, 경제, 인종, 권력으로 양분된 세계의 모습을 단숨에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작은 폭력이 실은 이 양분된 세계의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씨앗임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성과 남성의 세계의 화해와 대화의 희망까지 이야기하는 대담함과 날카로움이 엿보인다.
○ 목차
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2 가장 긴 전쟁
3 호화로운 스위트룸에서 충돌한 두 세계
: IMF, 지구적 불공정, 열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 대한 몇가지 생각
4 위협을 칭송하며: 평등결혼의 진정한 의미
5 거미 할머니
6 울프의 어둠
: 불가해한 것을 끌어안기
7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
8 #여자들은다겪는다
: 페미니스트들, 이야기를 다시 쓰다
9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
옮긴이의 말

○ 저자소개 :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한국내에 소개된 『멀고도 가까운』 『걷기의 인문학』 『길 잃기 안내서』 『마음의 발걸음』 『그림자의 강』 『이 폐허를 응시하라』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등을 포함해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
– 역자 : 김명남
카이스트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환경 정책을 공부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편집팀장을 지냈고,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경험 수집가의 여행』 『비커밍』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면역에 관하여』 『틀리지 않는 법』 『지상 최대의 쇼』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첫문장
쌜리와 내가 왜 애스펀 너머 숲 속에서 열린 그 파티에 구태여 참석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P.14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p.14
나는 이런 종류의 사견을 좋아한다. 모호한 힘들이 카펫에 떨어진 코끼리 똥처럼 우리 눈에 뻔히 들어오고야 마는 순간을.
p.19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P.20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
P.24~25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오늘날은 예전보다 좀 사정이 낫지만, 그래도 이 전쟁은 내 생애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지만, 할 말이 있는 모든 젊은 여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p.31
우리가 여성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한다.
P.31~32
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협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P.37
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p.41
폭력의 유행병은 늘 젠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된다.(예로 술, 정신적 문제 등에 의한 충동적 행동 등으로)
p.45
폭력은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p.52
(성폭행의)예방의 책임을 전적으로 잠재적 피해자에게만 지움으로 폭력을 기정사실화한다는 점이다.
p56. 강간이 욕정의 범좌라는 말은 그만하라. 이런 강간은 계산된 기회주의적 범죄다.
P.61
가능하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은 갖가지 만연한 폭력에 시달리고, 진을 빼고, 그러다가 가끔은 인생을 마감하기까지 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해보라. 윌가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중요한 일들에 쏟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저널리스트 중 한면은 우리 동네에서 밤중에 걸러서 귀가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비슷한 이유에서 스스로 혹은 강제로 일을 그만뒀겠는가? 온라인에서 가해지는 터무니없는 성희롱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아예 발언과 글쓰기를 그만두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P.104
당신의 어머니를 지우고, 두 할머니를 지우고, 네 증조 할머니를 지우라. 몇세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백명이, 나중에는 수천명이 사라진다.
P.124~125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잇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메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P.131
우리 행동의 효과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심지어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P.134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가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이른바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에서 생겨날 수 있다.
P.136
언젠가 하와이의 어느 식물학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새로운 종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밝힌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경험이 지식을 압도하도록 허락하는 것, 계획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P.154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현들을 동시에.
P.155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말하자면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P.168~169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면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P.193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P.196
가정폭력, 맨스플레인, 강간문화, 성적 권리의식 등은 많은 여성들이 매일 접하는 세상을 재정의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나갈 방법을 열어주는 언어도구들이다.
P.197~198
6년 전에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가르치려 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협오의 당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P.221
여성은 영원한 주제(subject)다. 이때 주제란 종속, 혹은 예속, 심지어는 속국과도 거의 같은 말이다(`subject`에는 `종속시키다`라는 뜻도 있다). 그에 비해 남자들이 행복한지 아닌지, 왜 남자들도 결혼에 실채하는지, 심지어 영화배우라도 남자들의 몸이 얼마나 멋지거나 그렇지 않은지 말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적다. 남성은 범죄의 대부분을, 특히 폭력적 범되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성이고 자살도 더 많이 한다. 미국 남성은 대학 입학 비율에서 여성에 뒤처지고 있고, 현재의 경제침체에서 여성보다 더 많이 고전하고 있다. 그러니 남성이야말로 흥미로운 탐구 주체라고 생각할 법도 하다. 나는 미래에는 더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논의가 앞으로 남성에 대한 더 깊은 탐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P.221~222
벌써 많은 남자들이 이 사업에 가담했으나, 이 사업이 어떻게 남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현재의 상태가 어떻게 남자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고민이 가능하다. 폭력, 위협, 증우의 대부분을 저지르는 남자들-이들은 자원경찰의 기동대 격이다-에 대한 탐구도 그렇고, 그들을 부추기는 문화에 대한 탐구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탐구는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P.232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현재에 필요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 용어를 되찾겠다(reclaim)는 뜻이다. 용어가 문제적 현상을 호명함으로써 변화를 돕는 도구라고 할 때, 날이 너무 무뎌서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도구는 쓸모가 없다. 휴머니즘이나 평등주의라는 대체 후보 용어의 경우가 그렇다. 젠더의 문제를 다룰 때 젠더를 빼고 말할 순 없다. 내부 지형이 복잡하고 다층적이라고 해서 그보다 더 거시적인 패턴을 없는 셈 칠 순 없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아직껏 꼭 필요한 도구인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되찾으려는 것이다.

○ 편집장의 선택
“왜 여자는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나”
신조어 맨스플레인이 화제다.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미국에서는 2010년 <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단어로 꼽혔고,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실리기도 했다. 신조어라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시집살이하려면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해야 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오랜 세월 여러 문화권에서 미풍양속으로 통용된 모습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그들의 앎이 인정받을 권리를 주지 않는 이런 행태는 역사에서 여성이 사람으로 등장하면서 잘못된 관행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리베카 솔닛은 많은 이가 잠시 멈춰 웃고 지나갈 법한 이런 장면 뒤에 가려진 차별과 억압을 드러내며, 오늘날 여성이, 그러니까 인류의 절반이, 당연히 인류 모두가 처한 권력과 위계의 거미줄을 걷어낸다. 거미줄에 얽혀 침묵할 수밖에 없던, 실종된 것처럼 여겨지던, 숨 죽이며 삭제되어가던 여성의 현실이 오늘날, 아니 지금도 벌어지는 숱한 폭력과 사건에 얽혀 하나 둘 드러난다. 솔닛은 고발과 해석을 넘어 앞선 거미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펼칠 거미줄의 가능성을 전한다. 페미니즘이란 말이 열어젖힌 세계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다시 닫히지 않을 것이며, 그 길에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보다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 거란 희망이다. 물론 희망이 쉽게 현실이 되리란 장밋빛 전망은 아니다. 이 책에 담긴 아홉 편의 이야기는 “발전을 음미하면서도 안주하지 않는 것은 섬세한 작업”이라는 걸 잘 안다. 동시에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된 세계는 없다는 것 역시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에게는 모두 자유인이 되거나 모두 노예가 되는 선택 뿐이다. 정답은 이미 나왔다. – 사회과학 MD 박태근 (2015.05.15)

○ 출판사 서평
– 뭐든 잘난 체 가르치려 드는 남자의 탄생기
구글에서 단어 ‘맨스플레인’을 검색하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는 태도로 설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합성어’ (http://en.wikipedia.org/wiki/Mansplaining)라는 정의를 볼 수 있다. 솔닛의 글에서 비롯했고, 2010년 『뉴욕 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단어’에 올랐다는 등 이 말의 역사도 함께 보여준다. 1장이 바로 그 글이다. 지난 2008년 솔닛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가 최근 그가 접한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 거드름 피우며 장광설을 늘어놓았다(알고 보니 책이 아니라 서평을 읽은 것이었다). 듣다 못한 솔닛과 친구가 그 ‘아주 중요한 책’이 바로 솔닛이 쓴 책이란 걸 밝힘으로써(물론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난 일화가 바탕이 되었다.
누구나 한번쯤 겪는 흔하디흔한 일화를 다루었을 뿐인 이 글은 순식간에 온라인을 달구며 세계로 퍼져나갔다. 칭찬과 공감, 비난이 난무했다. 이러한 화제 속에서 ‘맨스플레인’은 옥스포드 온라인 사전에 올랐고 곧 주류 정치매체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이 단어와 에세이가 얻어낸 전세계적인 공감이 시사하는 것은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는 태도로 남자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남자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남자는 남자들도 가르치려 든다’는 등의 반론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역시 이 책의 출간 이전부터 SNS에서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뜨거운 화제에 올랐다. ‘김치녀’ ‘된장녀’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는 IS보다 위험하다’는 한 팝 칼럼니스트의 기고, ‘여자들은 멍청해서 남자한테 머리가 안 돼’라는 개그맨의 여성 비하 발언 등 일련의 논란들과 더불어 공감을 얻은 것이다.
‘맨스플레인’의 핵심은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며’이다. 솔닛은 여성인 상대방은 (당연히) 해당 주제에 대해서 무지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 한순간의 태도가 사회에 널리 퍼진 여성혐오와 비하,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맞닿게 됨을 드러낸다. 그러한 남성들에게 이 태도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침묵시키고 그 존재를 지워버리는 권력에서 나오며, 남자에게는 열려 있지만 여자에게는 닫힌 공간, 발언하고 경청되며 존중받고 권리를 가지고 참여할 공간을 제거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 말할 권리, 귀기울여 들릴 권리
여성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는 종종 사실임에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DDT의 폐해를 최초로 고발한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은 ‘과학자들은 카슨 양의 지나치게 히스테릭하고 감정적인 토로에 우려한다’는 평을 받았다. 엄연히 카슨 자신이 과학자였음에도 카슨 ‘양’이었기 때문에 받은 비난들이다(「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
솔닛은 여성의 발언과 관련된 이런 반응들에 나타나는 패턴에 주목한다. 말함으로써 추방당하고 억압받을 것 같은 여성의 두려움, 이를 뚫고 기어이 말하고자 나선 사람을 (죽임도 무릅쓰는 폭력으로) 어떻게든 침묵시키려는 세력,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세력이라는 구조의 패턴이다. 특히 성범죄에 대해서 여성이 증언할 때 이 구조는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페미니즘이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되려는 싸움”인 이유이다(179면).
이 책에 거론된 여성 혐오와 폭력의 예는 크기도 지역도 시기도 다양하다. 통계적으로 보면 미국에서는 6.2분마다 한번씩 강간이 경찰에 신고되고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일생에 한번 이상 강간을 당하며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한국의 현실이라고 나을 리 없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사례가 언론에 보도된 것만 3일에 한명이었으며, 한 연구에 따르면 1997~2006년 사이 여성 살인사건의 37.5%가 현재 혹은 과거의 배우자나 애인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즉,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가장 긴 전쟁」) 이런 사건들을 통해 솔닛이 이야기하는 요지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이다.
솔닛의 의도는 남성들을 뭉뚱그려 폭력적이거나 오만하다고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스꽝스런 해프닝이든 심각한 범죄든 여성과 관련한 문제는 모두, 의식적이든 아니든 여성의 존재를 말소하고 여성의 말을 침묵시키려는 힘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폭력사건들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진다. 여성을 겨냥한 총기난사에서 여성 혐오를 빼고 총기 허용/규제와 사회적 일탈과 정신질환에 대해서만 논의하는 것이 그렇다. 경기가 나빠서, 신분격차 때문에, 반사회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서 등등 여성을 향한 각종 범죄를 설명하는 이유에서 유일하게 빠져 있는 한가지 역시 그것이다. 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범죄의 90%를 저지르는가, 왜 그것이 여성을 향하는가, 즉 여성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 대한 관점 말이다.

– 존재를 드러내고 낯선 곳으로 나아갈 자유
환경·인권 운동에 헌신해온 이력에 종종 가려지지만 솔닛은 유려한 산문가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섬세한 감성과 명확한 관점이 어우러져 산문가로서 솔닛의 매력을 흠뻑 느끼게 해줄 글들도 실려 있다. 5장 「거미 할머니」와 6장 「울프의 어둠」이다.
예술비평가로서의 아름다운 필치를 보여주는 글인 「거미 할머니」에서는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 (Ana Teresa Fernandez)와 몇몇 화가들의 그림에 보이는 여성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말소하려는 오래된 힘에 대해 성찰한다.
솔닛은 내다 너는 빨래에 휘감겨 어렴풋한 윤곽만 드러난 한 여자의 모습에서 ‘시트처럼, 수의처럼, 장막처럼’ 그 존재를 지우려 하는 힘을 생각한다. 또한 비교적 최근까지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써야 했던 영어권 국가들의 관행을, 할머니도 어머니도 누구도 여자라곤 존재하지 않는 가계도 (우리나라의 족보와 닮았다)를 생각한다. 그리고 빨래를 너는 행위에서 빛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을 보고, 내걸린 빨래에서는 무수한 기도의 깃발과 거기 담긴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한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118면)
6장 「울프의 어둠」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과 솔닛 자신의 문장과 생각이 만나고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뛰어난 사유의 창조자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에게서 솔닛은 모든 창조의 출발은 미지의 것, 불확정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솔닛은 여성에게는 제한되었던 미지로 나아갈 자유, 한밤 낯선 거리를 헤맬 권리를 생각한다. 깊은 어둠으로의 여행에 불쑥 깃드는 창조성에 대한 갈망과 함께, 용감하게 자신도 몰랐던 자아 깊숙이 나아감으로써 버지니아 울프가 보여준 해방의 세계가 펼쳐진다.
뜻없이 거리를 걷는 발걸음에 실려 생각이 걸어가듯 이어지는 문장과 내용이 어울려 읽는 이에게 울림을 증폭한다.

–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것들
ILO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77%에 불과하고,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현실의 차이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은 끝난 운동이라고 여기는 시각이 있다.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해야 하나, 남자만 잘못인가, 이만하면 좋아지지 않았나 하는 흔히 듣는 반문에 담긴 시각들이다. 솔닛은 ‘계속 얘기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약간의 변화는 겨우 40, 50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것들을 바꾸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에세이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에서 솔닛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번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는 두번 다시 무지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듯이, 한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힘들은 다시는 상자로 돌아갈 수 없다. 미국에서 1973년에 합법화되었던 낙태가 다시금 불법화될 수는 있어도 여성에게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이 있다는 생각은 없앨 수 없다. 때로 헤매고 모순에 빠지고 역행하기도 하겠지만 크게 보아 이 움직임은 결코 예전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솔닛이 찾아낸 희망의 근거다.
솔닛은 “페미니즘은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는 때에, 페미니즘에 대해 새로이 관심을 가지게 된 독자들에게 솔닛의 유려하고 재치 넘치는 에세이는 통쾌하고도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한쪽만 나서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페미니즘의 기획은 남성에 대한 깊은 탐구와 대화를 통해 더 넓은 지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과 함께 그 대화는 시작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