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네루다 시선
파블로 네루다 / 민음사 / 2007.1.30
시인의 나이 열아홉에 세상에 나와서 그의 이름을 남미 전역에 알렸던, 그리고 그간 한국 독자들에게는 단 4편만이 소개되어 아쉬움을 남겼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완역되었다. 1989년에 이 시집의 시편 가운데 네 편을 비롯해 네루다의 시집들에서 몇 편씩을 고른 시선이 『스무 편…』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나온 바 있었는데, 이번에 『스무 편…』의 스물한 편을 모두 번역해 한 권으로 묶어 원래의 제목을 돌려준 것이다.
그 동안 『스무 편…』의 이름을 달고 있었던 시선 35편은 번역을 손질하여 『네루다 시선』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전 세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네루다의 시들이 한국 시단의 거목 정현종 시인의 머리와 손을 거쳐 마치 원래가 한국어로 쓰였던 시인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실려 있다. 시 한 편 한 편이 내뿜는 생명력과 열정, 그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한 아름다운 언어들이 읽는 이의 가슴을 두드린다.

○ 목차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한 여자의 육체
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지상의 거처 I.II.III
죽음만이
산보
동쪽에서의 매장
혼자 사는 신사
소나타와 파괴들
가족 안의 우울
성적(性的)인 물
망각은 없다(소나타)
브뤼셀
모두의 노래
마추픽추 산정 III
칠레의 발견자들
시인
남쪽에서의 굶주림
젊음
독재자들
아메리카여, 나는 헛되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찬가와 귀국
크리스토발 미란다
포도의 가을이었다
파업
카라카스에 있는 미겔 오테로 실비한테 보내는 편지
수수께끼
길 위의 친구들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내 양말을 기리는 노래
수박을 기리는 노래
소금을 기리는 노래
떨어진 밤을 기리는 노래
책에 부치는 노래 I
탐조를 기리는 노래
폭풍우를 기리는 노래
이슬라 네그라 방명록
시
대담 – 양과 솔방울 / 파블로 네루다와 로버트 블라이
해설 – 젊은 날의 초상 / 정현종
옮긴이의 후기

○ 저자소개 :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본명 :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이에스 바소알토)
1904년 칠레 파랄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한 동네에 살던 시인 가브리엘 미스트랄의 서재를 드나들며 재능을 키웠다. 청년 시절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쓰며 지냈고, 1923년 첫 시집 『황혼 일기』를 출간하여 칠레 문학계를 뒤흔들었다. 1924년 소박한 표현과 내면세계를 추구한 연애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27년 외교관이 되어 지금의 미얀마를 시작으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거주하였고, 실존적 고뇌를 담은 『지상의 거처』를 썼다.
1936년 시인 로르카의 죽음과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사회 의식을 각성하고 민중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스무 살 연상의 두 번째 아내 델리아 델 카릴의 격려에 힘입어 정치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고, 1945년 노동자들의 폭넓은 지지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곧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독재자 곤살레스 비델라의 탄압으로 도피와 망명길에 오르지만, 이때 위대한 서사시 『모두의 노래』를 탈고했다. 그에게 시는 민중과 ‘소통의 통로’였고,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민중시인이라는 별칭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었다. 1954년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고,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73년 네루다가 지지했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10여일 후인 9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 역자 : 정현종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서 시 창작 강의를 하였다.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5년에 정년퇴임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오르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쉬임없는 창작열과 언제나 자신의 시세계를 갱신하는 열정으로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다룬 시를 발표하였다. 2008년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 역시 사물의 바깥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복잡한 의미의 얼개를 부여하는 대신, 사물들과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를 갈망하게 된 시인의 태도에, 사물의 있음 그 자체, 움직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 저절로 주목하게 되는 작품집이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그는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 책 속으로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들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별들 총총하고
별들은 푸르고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에 잠겨. [생략] —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중에서
혼자 사는 신사
동성애하는 젊은 사내들과 연애에 미친 아가씨들,
흥분ㅡ착란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많은 과부들,
애 밴 지 서른 시간쯤 되는 젊은 마누라들,
어둠 속에 내 정원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로 울어대는 고양이들,
이러한 것들이, 마치 발정해 발롱거리는 굴의 목걸이처럼,
내 외로운 집을 둘러싸고 있다,
내 영혼에 적대하여 진을 친 적들처럼,
잠옷 입은 음모꾼들처럼,
마음대로 길고 깊은 키스를 주고받으며.
번쩍이는 여름은
살찌고 마르고 즐겁고 슬픈 쌍들로 이루어진
모두 비슷하게 우울한 연인들의 무리를 이끈다;
바다와 달 가까이, 우아한 야자나무 아래로는,
바지들과 스커트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실크 스타킹들을 어루만지는 바스락 소리 들리고,
여자들의 유방들은 눈(眼)처럼 번쩍인다.
하찮은 일을 하는 종업원은, 여러 가지 일이 있은 뒤,
한 주일이 지루하게 지난 뒤, 그리고 잠자리에서는 소설 읽으며
밤을 보낸 뒤
이웃집 여자를 꼭 한 번 꼬셨는데,
인제 그는 그녀를 호위해서
풋내기와 열정적인 거물급이 나오는 슬픈 영화를 보러 가서
담배 냄새 나는 그의 따뜻하고 축축한 손으로
달콤한 솜털에 싸여 있는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진다.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사람의 저녁들과 남편들의 밤이
두 개의 침대보처럼 같이 와서 나를 덮고,
또 저 점심 뒤의 시간ㅡ젊은 남학생들과
젊은 여학생들, 그리고 사제(司祭)들이 수음을 하고,
동물들은 드러내 놓고 올라타고,
벌들은 피 냄새를 풍기고, 파리들은 성이 나서 붕붕거리고,
사촌들은 조카 계집애들하고 이상한 놀이를 하고,
… (중략) …
더구나 간통자들은 바다의 정기선(定期船)처럼 높고 넓은 침대에서
진짜 사랑을 하는 시간,
이 얽히고 숨 쉬는 광대한 숲이
사방에서 나를 확고히 둘러싼다 영원히
입 같기도 하고 치열(齒列) 같기도 한 거대한 꽃들로
그리고 손톱 같기도 하고 구두 같기도 한 검은 뿌리들로. — 본문 중에서
동성애하는 젊은 사내들과 연애에 미친 아가씨들,
흥분 착란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많은 과부들,
애 밴 지 서른 시간쯤 되는 젊은 마누라들,
어둠 속에 내 정원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로 울어대는 고양이들,
이러한 것들이, 마치 발정해 발룽거리는 굴의 목걸이처럼,
내 외로운 집을 둘러싸고 있다.
내 영혼에 적대하여 진을 친 적들처럼,
잠옷 입은 음모꾼들처럼,
마음대로 길고 깊은 키스를 주고받으며..
번쩍이는 여름은살찌고 마르고 즐겁고 슬픈 쌍들로 이루어진모두 비슷하게 우울한 연인들의 무리를 이끈다;바다와 달 가까이, 우아한 야자나무 아래로는,
바지들과 스커트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실크 스타킹들을 어루만지는 바스락 소리 들리고,
여자들의 유방들은 눈(眼]처럼 번쩍인다.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시편들은 내 가장 고통스러운 젊은 날의 열정으로 가득 찬 괴로운 전원시집을 만들어놓고 있는데, 내 나라 남쪽 지방의 황량한 자연이 섞여 있다. 이 책은 내가 사랑하는 책인데, 그 심한 멜랑콜리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산티아고와의 연애이고, 학생들 붐비는 거리, 대학과의 연애이며, 앙갚음과도 같은 사랑의 인동향(忍冬香)이다. _파블로 네루다
이 시집은 우리가 다 겪게 마련인 젊은 시절의 욕망의 혼돈, 특히 성욕의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사귐과 고독, 만남과 헤어짐 따위가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넘친다. 물론 그 소용돌이는 시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서 질서를 얻은 것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_정현종(『스무 편…』의 해설 중에서)
네루다의 시는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이다. 그의 살은 제 살이 아니라 만물의 살이요, 그의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라 만물의 피이며, 그의 몸 안팎의 분비물은 자기의 것이라기보다 만물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네루다는 만물이다. 그의 시를 통해 자신들이 드러날 때 사물은 마침내 희희낙락하는 것 같고, 스스로의 풍부함에 놀라는 것 같다. 그의 시 속에서는 사물의 경계가 지워지고, 안팎의 구별은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그것이 노래하는 사물의 핵심에 이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리고 거기 열리는 세계는 무궁동(無窮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역동 상태에 있다. _정현종(『네루다 시선』의 해설 중에서)
- 사랑에 빠진 이의 심장을 들여다본다면… 열아홉 젊음의 열정의 소용돌이 ―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지금까지 단 4편만이 국내에 번역되었다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스물한 편이 모두 소개된 『스무 편…』의 시편 하나하나에는 장차 큰 시인을 기약하는 한 젊은이의 열광적 호흡이 드러나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의 눈에 사랑하는 여인의 육체는 하나의 “세계”와 같다. 여인의 눈 속에서 “황혼이 떨어지고, 지구가 노래한다”. 그녀의 속에서 “강들이 노래하고” 그의 “영혼은 그 속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그의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이 그녀를 “파 들어가”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터널처럼 외롭”다. 그는 말한다.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젊은 시인에게 연애 (戀愛)하는 이는 곧 세계이고, 또한 세계가 곧 연애하는 이이다. 당혹스러울 만큼 관능적인 언어는 만물을 제각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를 가진 생명력의 존재로 우리의 눈앞에 불러낸다. 그 의미들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네루다의 시어 속에 도사리며 꿈틀대고, 그 수수께끼는 사랑에 빠져본 자만이, 그리고 사랑의 좌절을 겪어본 자만이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낸 이에게 스무 편의 사랑의 시 끝에 나오는 절망의 노래는, 그것이 단 한 편일지라도 아니 한 편뿐이기에, 더더욱 그 치명적인 통증을 기억케 한다.
그건 공격과 키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등대처럼 반짝인 마법의 시간이었다.
조타수의 두려움, 눈먼 잠수부의 격렬함,
사랑의 광포한 취기,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 『절망의 노래』 가운데

-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인… 해방된 자연 그리고 인간의 모습 ― 네루다 시선
이 시선에는 모두 9권의 시집에서 고른 35편의 시가 실려 있다. 1924년 대학을 다니던 열아홉 때 발표한 『스무 편…』부터 시작해, 미얀마, 태국,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지내던 극동 주재 영사 시절의 시들을 모은 『지상의 거처ⅠㆍⅡㆍⅢ』(1933, 1947) , 곤살레스 비델라의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 쫓겨 망명 생활을 하던 시절의 『모두의 노래』(1950), 그가 사랑했던 이슬라 네그라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쓴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1956), 예순 생일을 기념해 출간된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1964) 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집에서 뽑은 시들은 그대로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세계가 거쳐온 변화를 보여준다.
그 속에는 젊은 날의 초상이 있고, 네루다 스스로 가장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절이라고 말한 극동 주재 영사 시절에 바라본 세상의 모습, 독재 정권 아래 노동과 굶주림에 지쳐가는 민중의 모습, 그리고 만물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이슬라 네그라 시절의 시선이 있다.
인생의 각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면모를 보인 시세계는 그러나, 박제화되지 않은 생명 그 자체의 자연을 그리고, 또 노동과 가난에 시달리는 인간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해방된 인간을 꿈꾼다는 면에서, 한결같이 해방된 자연을 구하고 있다. 그 자연은 인간이 대상화한 자연이 아닌 인간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서의 자연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네루다의 시는 고동 소리가 그치지 않고 흘러나오는 하나의 ‘살’이다. 그 살은 “만물의 살이요, 그의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라 만물의 피”라고 옮긴이이자 시인인 정현종은 말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만물이 해방되어 자유로울 수 있기를 소망하는 이 저항 정신 때문에, 네루다의 시는 그의 생전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 한국어로 살아난 네루다의 언어, 시인 정현종의 힘
네루다의 시가 지닌 역동성을 읽고 옮기기 위해서는 옮기는 이의 마음 또한 네루다의 것과 마찬가지로 활짝 열린 “무궁동(無窮動)”의 역동 상태여야만 할 것이다. 이를 한국 시단의 거목 정현종이 고스란히 살려낸 이 시집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이자, 또한 시인 정현종이 읽어낸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대한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비롯해, 『백 편의 사랑 소네트』, 『강의 백일몽』 등을 우리말로 옮겨 네루다를 국내 독자들에게 알렸던 정현종 시인은 2004년 칠레 정부에서 전 세계 100인에게 주는 ‘네루다 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시>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