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7월 20일, 예루살렘 포위 공격: 로마 제국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4개 군단과 지원군이 공성병기로 템플 마운트의 북쪽 안토니아 요새 집중공격
1차 유대-로마전쟁 (유대독립전쟁, 66~73년)이 일어나자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은 로마군을 이끌고 70년 9월 7일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함락된 예루살렘 성전은 불태워졌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1차 유대-로마전쟁 (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 독립전쟁(獨立戰爭, 66~73)은 때때로 위대한 반란 (The Great Revolt, 히: מרד הגדול)으로 불리는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의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 중에 첫 번째 전쟁을 말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전쟁의 발발은 66년 카이사레아에서 지역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들과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어를 할 줄 하는 로마 주둔군이 중재를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과 희생을 바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어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하였다는 것이다.
유대 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한 데서 비롯된 폭동은 마침내 66년 6월에 로마 세력을 완전히 유대에서 몰아냈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내부의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에서 가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퍼져 나가서,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평소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장이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진압을 위해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하고 마침 11월이라 케스티우스는 안티오키아로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그 직후 병으로 죽었다.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당시 3개 군단에 6만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 구성원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제5군단 : 도나우 강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로 대부분은 발칸 반도 출신.
.제10군단 : 시리아 주둔군으로 소아시아와 그리스 출신의 보조병이 대다수.

.제15군단 : 제5군단과 같은 구성.
여기에 유대 북동부의 로마 동맹세력인 아그리파 2세가 데리고 있던 유대인 병사를 비롯해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유대 반군과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할 로마군은 각지에서 이동해오는 군단과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령관에 임명되고 반년이 지난 67년 5월에야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유대 전역을 공략하면서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으로 예루살렘으로 접근하여 반란을 진압해 들어갔다. 47일에 걸친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는데 (이때 사망자는 4만 명에 포로는 1,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 장로와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결하는 쪽을 택했고,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요세푸스를 포함한 두 명만이 자발적으로 로마군에게 나와서 항복했다. 갈릴리 지역을 진압한 로마군은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겨 68년까지는 거의 모든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된다.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유대 쪽에서는 시설 보강이나 식량 비축 같은 방어 대책에 전념하면서도, 다가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할 작정인 사람들에게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년처럼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 보내라고 장려하기도 했다) ‘유일신’ 여호와가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의 손에 떨어질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69년 7월 이후, 예루살렘 공략은 재개되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으며, 재개될 유대 전쟁의 모든 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 (유대계)가 그 옆에서 도왔다. 또한 기존의 3개 군단에 앞서 유대에 패하기도 했던 제12군단이 더 추가되고,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다. 한편 예루살렘 안에서는 열심당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결사항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잔인한 내전이 반란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열심당과 시카리오이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암살하였고 거의 모든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전쟁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벽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관례에 따라 ‘숫양 (아리에스)’이 성벽과 부딪치기 전에 (‘숫양’이란 공성무기, 성벽을 깨부술 때 쓰는 추를 가리키는 로마군의 은어이다) 항복한 자는 용서하겠다며 항복을 권고했지만 유대인은 듣지 않았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고 로마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영구진지를 도시 주위에 구축하고 성벽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다.
한편 도시 안에서는 공성전에서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 많은 도시거주인과 군인들이 굶어죽었다. 심지어 누구든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하면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70년 7월 20일, 로마 제국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4개 군단과 지원군은 공성병기로 템플 마운트의 북쪽 안토니아 요새를 집중공격했다.
안토니아 요새 (아 : קצטרא דאנטוניה)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요새로 헤롯의 수호자인 Mark Antony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주요 기능은 두 번째 성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전산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이른바 두 번째 성벽의 동쪽 끝에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