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민족시인 김소월 (金素月, 1902 ~ 1934)의 시 모음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뜨리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나겠지요?
○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첫치마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해 다 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도 감은 첫 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봄 바람
바람아, 봄에 부는 바람아,
산에, 들에, 불고 가는 바람아,
돌고 돌아 – 다시 이곳, 조선 사람에
한 사람인 나의 염통을 불어준다
오 – 바람아 봄바람아, 봄에 봄에 불고 가는 바람아,
쨍쨍히 비치는 햇볕을 따라,
인제 얼마 있으면?
인제 얼마 있으면
오지 꽃도 피겠지! 복숭아도 피겠지! 살구꽃도 피겠지!
○ 무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 저기,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 시인 김소월 (金素月)
시인 김소월 (金素月, 1902년 9월 7일 / 음력 8월 6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公州)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병사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한테도 천시를 받았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3세였다.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아편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