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죄인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기도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나열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기도했고, 세리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상한 심령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 죄인이 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의인이 된다. 바리새인은 출현은 마카비 혁명과 관계가 있다. 셀루쿠스 왕조 때 안티오쿠스 4세의 강력한 헬라정책에 반기를 들고, BC 167년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주체는 ‘하스몬가’ 사람들이었다. 경건한 그룹인 ‘하시딤’이 연합하여 혁명에 성공하였다. 마카비 1서 2:42에, “이스라엘의 힘센 전사들인 ‘하시디안’들의 일개 중대가 그들과 연합하였다”는 언급이 나온다. 마카비혁명이 성공하고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다. 하스몬 왕조는 정치적인 통수권은 가질 수 있으나, 사독계열이 아니라 대사장직은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스몬 왕조가 대사장직까지 차지하자, 이것에 반발한 하시딤이 하스몬 왕조와 ‘분리’하면서 출현한 분파가 ‘바리새인’이다. 사두개인은 하스몬 왕조를 지지하고 성전중심으로 활동한 현실주의자였고, 바리새인은 회당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율법주의자이다.
1. 바리새인의 기도(11-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란 말은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시험 기간을 거친 뒤에 십일조 및 결례규정을 아주 엄격히 지키기로 약속하는 사람들만 자기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형식적인 법조항에 얽매였다.
2. 세리의 기도(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세리들은 원래 세금 이상의 액수를 거두어 그 차액을 자신이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로 비유하자면 세리는 ‘친일파’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 창기,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여 배척하고 비난하였다. 제자였던 마태는 가버나훔의 세리였다. 마태복음 9장에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묻자, 예수께서 들으시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세리를 정죄해야 할 죄인이 아니라, 치료 받아야할 환자로 보았다. 죄란 병균으로 감염된 인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치료받을 수 있다.
3. 예수님의 판단(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세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자기의’가 아니다. 칭의(稱義)란 말이 있다. 칭의란 의로운 분이 의롭다고 칭할 때 비로소 의로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한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고, 세리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도했다. 예수님은 세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성도와 함께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다. 관계가 단절될 때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유사한 말인 것 같지만 상반된 의미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상태이고,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태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한 말이다’라고 했다. 외로움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고독은 내가 선택할 때 존재한다. 현대인은 고독을 잃었기에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임마누엘이란 단어는 이사야서 7장 14절과 마태복음 1:23절에 등장한다. ‘임마누엘’은 두 개의 말, ‘임마누’ 와 ‘엘’을 조합한 이름으로,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영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다. 우리는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성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다.
1. 성경과 함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구세군에는 ‘한손에는 성경, 한손에는 빵’이란 모토가 있다. 성경만 가지고 가면 전도이고, 빵만 가지고 가면 구제지만 두 손으로 가면 선교이다. 성경 없는 구제가 영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돈으로 교육하려는 사람은 자식의 인생을 망치고, 돈으로 선교하려는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피폐 시킨다. 마태복음 9:35절에 예수님의 3대 사역은 ‘Preaching and Teaching and Healing’이다.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5:16) 영혼육의 구원이다.
2. 성령과 함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을 받으면 다양한 은사가 임한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성령께서는 우리의 위로자, 돕는자, 상담자 그리고 대언자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3. 성도와 함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하는 증인이다. 권능은 영어로 ‘power’이고, ‘헬라어’로 ‘듀나미스’이다.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왔다. 증인(witness)’이란 단어인 헬라어 ‘마르투스’는 영어의 ‘순교자'(martyr)이다. 인성은 혼의 성품이고 영성은 영의 성품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인성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영성으로 산다. 최고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다. 육은 죽고 영으로 사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란 말이 있다. 시너지라는 용어는 “함께 일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synergos’에서 나왔다. 두 개 이상의 것이 하나가 되어, 독립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내는 효과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혼자 하는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출18장) 사도행전 6장에 7집사를 세운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그리고 성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이다.
자존감 (Self-Esteem)이란 무엇인가?
자존감 (Self-Esteem)이란 ‘자아존중감’ (自我尊重感)의 줄인 말로서,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마음이다. 자존감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가치'(Self Worth)를 아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자존심'(Pride)과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모두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타인과 비교하여 얻는 긍정이고,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타인과 비교한 긍정은 교만이고, 있는 그대로의 긍정은 겸손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수직적 대화’를 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수평적 대화’를 한다. 인간은 ‘자존감’이 낮아질 때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로 ‘자존심(自尊心)’을 사용한다. 그래서 더 있는 척, 더 아는 척, 더 힘센 척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아래의 3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충실하기 보다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눈치를 본다.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통해 인정 받으려고 노력한다. 식당에 가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다. 서로 미루다, 한 사람이 선택하면 보통 같은 것을 시킨다. 특별히 질문이 많은 호주 식당에 가면 더 그렇다. 한 사람이 총대를 메면 다른 사람은 다 같이 “Me Too”이다.기분 좋게 먹으러 왔다가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집에 가면 짜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항상 고민한다. 그러다 같이 온 사람이 비싼 음식을 시키면 기분이 나빠진다.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나도 비싼 음식을 시킨다. 가끔 옆 사람의 주머니 형편을 생각해서 “아무거나 먹지”라고 한다. 물론 식당에는 “아무거나”라는 음식은 없다. 좋게 보면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배려는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지, 타인의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다.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합리화’이다. 인간과 동물의 여러 차이점 중 하나는 동물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인간은 ‘환경을 지배’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환경을 다스리는 것이다. 물론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이 흙수저보다 세상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끝에서 시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죽음에서 삶을 바라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땅을 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과연 누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을까? 환경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 아니할 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닌가! 받은 달란트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산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산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여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와 비교된 내가 아니라,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했다. 오랜 영적 방황을 끝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창조자를 알지 못하는 피조물은 결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내 카톡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예수가 정답이다.” 원래 나는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내가 정답이다”라고 썼다. 실존적인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에 ‘내’ 대신 ‘예수’라고 바꾸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벧전2:9) 우리는 내가 누구임을 알고, 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삶은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