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눅 3:7-14)
예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그래서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첫 마디가 아마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하는 말 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구역예배에 열심 참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예수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떠드는 것인지 …. 마가복음 1장 23,24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가장 먼저 소리친 자가 나오는데 그는 귀신 들린 자였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렇다! 귀신도 알고 떠드는 이야기가 예수를 믿는 증거일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첫 번째 성경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분께서 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것이 그 첫 번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 자신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오순절 날 불의 혀와 같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그 성령의 첫 번째 사역에 의해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이 같이 서서 소리 높여 외쳤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장).
이 복음을 전해들은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아와 어찌해야할지를 묻기 시작하였다. 그 때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장)고 알려준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첫 번째 시작은 회개로부터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회개가 없는 심령 위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수도 또한 성장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가! 성경이 말하는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에서 옥토의 밭이 나온다. 과연 처음부터 옥토의 밭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회개한 심령의 상태가 바로 옥토의 밭이 아닐까 생각한다.
회개는 한 순간의 후회나 뉘우침이 아니라 그것에 합당한 열매이다.
회개와 후회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다른 의미가 있다. 후회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은 30에 판 가룻 유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후회의 끝은 절망이다. 그러나 회개는 다르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같은 잘못을 저지른 베드로라고 하는 제자가 그 예일 수 있다. 그도 자신의 스승인 예수께서 대제장의 군병들에게 잡혀가시게 되었을 때에 그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며 어떻게 될지 숨어서 지켜보다가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그곳에서 비자와 그곳에 섰던 어떤 자에게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다.’라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 일후 그 역시도 심히 통곡하며 자신의 연약함과 비겁함에 몸부림치며 회개한다. 그러했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후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참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된다.
크리스천의 증거는 교회를 다니는 자가 아니다. 목사나 장로의 직분 또한 크리스천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 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의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삶의 실질적인 열매가 두 가지 있다고 하는 진리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열매가 꼭 있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라고 말하면서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만약 무화과나무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이와 같이 또한 영의 법칙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심령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이 있는지 아니면 맺어가고 있는지를 날마다 농부가 자신의 밭을 돌보듯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보여지는 어떠한 외적인 은사와 능력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나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가 내적인 열매의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외적인 삶의 실질적인 모습을 말한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것이다. 어느 날 세례요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어느 한 무리가 그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7-9)고 전혀 삶의 변화가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천국의 티켓을 이미 가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백성인양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그들을 강하게 질타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말을 들은 그들 가운데 세례요한에게 묻는 자들이 있었다. 과연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는 그들에게, 옷이 두 벌 있는 자는 옷이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또한 그렇게 해야 하며 세리의 직업을 가진 자들은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 것이며 군병들은 사람들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사례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1-14)고 자세히 알려준다.
회개한 심령을 하나님은 만들지 못하신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죄짓지 않는 경건한 유대인이 필요하셨다면 아마 돌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은 만드셨을 것이다.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은 죄짓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회개하는 심령을 원하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집을 떠났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한사람이다. 회개함으로 다시 아버지께 돌아와 죄를 고백하고 또한 용서받은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와 긍휼이 크신 분이신지 비로써 스스로 깨닫고 아마 영원토록 그 아버지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자랑하며 살았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죄 지어보지 못한 탕자의 형은 자신의 아버지가 오히려 공평하지 못한 아버지로 생각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말로만이 아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거듭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용호 목사(시드니달란트교회, 호주나눔선교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