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26)
로버트 달링 왓슨 목사(1886. 10.25-1942. 2. 4)
한국명: 왕대선(王大善) 목사, 마산 1910-13; 통영 1913-28
로버트 왓슨은 빅토리아의 일레인(Elaine)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발라랏의 에벤에저 교회 주일학교에서 벨레 멘지스의 학생이었다. 그가 선교사가 되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멘지스의 영향력 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다가 국내선교사로 일했고 후에는 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 Theological Hall)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목회자 양성 신학교로 1866년에 설립되었다). 그는 1910년 11월 10일 발라랏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아미 비어드 양(Miss Amy Beard)와 약혼을 하였고, 그녀는 1년 후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갔다.
왓슨은 1910년 12월 21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즉시 마산으로 갔고, 이듬해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 선생과 함께 지역 회중들을 방문했다. 그해 왓슨은 자기 약혼자를 포함해서 한국으로 오고 있는 일군의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상해로 여행을 했고, 그들은 1911년 10월 26일 매클라렌의 주례로 상해해서 결혼했다. 그들은 11월 11일 부산에 도착했다. 왓슨 부부는 마산에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엥겔 목사 가정에서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러나 왓슨 부인은 부산에서 장티푸스성 열병에 걸렸다.
왓슨은 1912년 중반까지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칠암을 두 번 방문하였고 진해와 고성에 대해서도 목회심방을 하였다. 선교회는 그에게 칠암(통영)에 새 선교지부를 개척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그해 9월, 새 선교지부는 개척되고 있었으나 왓슨은 여전히 마산에 살고 있었다. 1913년 2월 13일 그의 아들 존이 태어났다.
그들은 1913년 3월 27일 칠암으로 이주했고, 두 번의 호주 휴가를 제외하고는 통영, 고성, 거재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사역에 완전히 헌신했다.
왓슨은 보트, 도보, 혹은 무슨 운송수단이든지 가능한 대로 교회들을 순회했다. 그는 각 주요 중심지역에 있는 조사들을 감독했고, 각각의 작은 모임들을 일 년에 두 번 방문하면서 학습문답을 원하거나 세례를 원하는 사람들을 점검했고, 설교하고 성만찬을 집례했다. 그는 민감한 전도자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와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주요 중심지역들에서 주간 학습반들을 운영했고, 주변 마을로부터 사람들은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고,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왓슨은 1920-23년과 1926-28년 선교회의 총무로 탁월하게 일했다. 선교회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모아내고 표현하는 그의 능력은 그의 동료들과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위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왓슨은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의 후원을 받았다. 1918년 그는 휴가 기간 중에 많은 청년연합회 지부들을 방문하여 연설하는 일 외에도 군목으로 지원한 해외선교위원회 총무 프랭크 패튼(Rev F H L Paton)을 대신해서 대리 총무직을 수행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