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조선여성 첫 세계일주기
나혜석 / 가갸날 / 2018.1.30
- 이 책은 조선 여성이 남긴 최초의 세계일주기이다
지금부터 90년 전 서양화가 나혜석은 20개월에 걸쳐 세계를 일주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했던 시절에 그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주유한 것도 놀랍거니와, 그 궤적이 완벽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나혜석의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화제가 되었고, 귀국 후에 신문과 잡지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를 온전히 묶어낸 책은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이 책은 나혜석이 남긴 모든 기행문을 집대성해 여행 순서를 따라 구성한 것이다.
나혜석의 여행기는 근대적 개인으로 탈각해 가는 신여성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90년 전의 기록이지만 최근의 여행기라 하여도 될 만큼 모던하고 생생하다.
○ 목차
소비에트 러시아를 가다 9
파리에서 스위스로 45
서양 예술과 나체미 : 벨기에와 네덜란드 65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77
베를린의 그 새벽 113
이탈리아 미술을 찾아 125
도버 해협을 건너다 157
정열의 스페인행 171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187
태평양 물결이 뱃머리를 치다 215
○ 저자소개 : 나혜석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 (晶月 羅蕙錫, 1896 ∼ 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 (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 (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 (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 (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 (天后宮)」이 특선, 「지나정 (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 (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 책 속으로
“여류 화가 나혜석 씨는 예술의 왕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동서양 각국의 그림을 시찰하고자 오는 22일 밤 10시 5분 차로 경성역을 떠나 1년 반 동안 세계를 일주할 예정으로, 오늘 오전 7시 45분 경부선 열차로 동래 자택을 출발하여 경성에 도착 지금 조선 호텔에 체재중인바, 여사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먼저 노농 勞農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인 적색 러시아를 거쳐 장차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터키, 페르시아, 체코, 태국, 그리스, 미국 등을 순회할 터이라 하며…” — p. 14
나는 지금 유명한 바이칼 호반을 통과하는 중이다. 듣던 바 이상의 경승지다. … 지평선이 푸른 하늘과 닿은 듯한 황무지에는 은방울꽃이 반짝이고, 양떼와 소떼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그윽한 이 한 폭의 그림은 네가 항상 말하던 집터를 연상하게 한다. 이곳에서 모든 벗들과 한잔의 술을 나누고 춤이나 추어보았으면… — p. 29
하루는 물랭루주에 구경 갔다. 나체의 여자 하나가 은색과 청록색 의상을 입고 뛰어나와 경쾌하게 춤을 추고, 날개옷을 두르고 붉은 새털을 머리에 꽂고 금색 구슬을 번쩍이는 여신 군상들이 좌우 2인씩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 부르면서 나온다. 7색, 5색의 금빛, 은빛 의상이 황홀한데, 웃옷은 얼굴을 파묻고 바지는 땅을 덮는다. 길게 늘인 털 부채 장난감 같은 조그마한 우산을 휘두르며 좌우에 갈라서 있는 군상은 이내 방울 달린 작은 북을 흔들며 춤을 춘다. 동시에 중앙의 여신은 타조털을 휘두르며 근육적이요 진기한 예술적인 춤을 춘다. 나는 이 그리스 식 육체미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이 시대 동판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원근법과 색채, 초점을 취한 구도법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 p. 83
고야는 만년에 시력이 쇠약해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궁핍하였다. 판화를 그리려고 조국을 떠나 멀리 적막한 남프랑스 보르도에 우거하였다가 1828년 4월에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그의 묘를 보고 아울러 그의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또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이 생각 들었다. 내 발길은 좀체 떨어지지를 아니하였다. 내가 이같이 감흥해 보기는 일찍이 없었다. — p. 180
워싱턴을 떠나 도중에 필라델피아에서 내렸다. 서재필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로 시외 한적한 곳에 위치한 병원을 찾아갔다.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니 강건한 모습의 중노인 서박사가 나와 반가이 악수하여 준다. 우리는 잠깐 동안 조선 문제에 대하여 토론한 후, 병원 구경을 하고 거기를 떠났다. — p. 199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 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텅 빈 나는 미래로 나가자. — p. 227
시베리아 통과
만주리에서 여권 검사를 받고 기차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창망한 광야를 질주하는 동안 곳곳에 낙타의 무리, 브리야트인의 작은 집이 차창으로 보인다. 오논강을 건너니 여기서부터 궤도는 복선으로 되어 있다.
치타 Chita 역에 도착하니 정오가 되었다. 소낙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는데 러시아 농민 여자들이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쓰고 아이를 안고 서서 승객들이 나와 거니는 것을 유심히 구경하고 있다. 이곳은 농산물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13시간 동안 가서 공장이 많은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착하였다.
지금부터 유명한 바이칼호 호반으로 기차는 질주한다. 물은 언제 보던지 반갑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근한 맛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하물며 망막한 대평야에 있는 바이칼 호수의 경색이랴. 지리해 못 견디던 승객은 차창에 모여 섰다.
크라스노야르스크 Krasnoyarsk에 이르려 할 때 반가운 것은 송림 사이로 은은히 보이는 교회 첨탑이었다. 시베리아의 아테네라고 하는 톰스크와 정치경제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옴스크에 도착하였다. 이 부근에는 쓰러진 오두막집과 부서진 차량이 많이 있어 혁명 당시 참극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흙빛이 점점 흑색으로 변하여가고, 식물 파는 여자들의 복장이 차차 깨끗해진다.
여기는 스베르들로프스크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곳이니, 니콜라이 일족은 죽기 전에 이 부근을 소요하였을 것이다.
지평선과 푸른 하늘이 맞닿은 황망한 들판에 푸른 잔디가 끝없이 깔려 있고, 비단실로 수놓은 듯한 흰 은방울꽃과 붉은 장미꽃이 섞여 있었다. 뭉툭 잘린 자작나무 고목, 한숨에 뻗쳐오른 적송은 무한히 많다. 흰빛 검은빛이 섞인 얼룩소 떼는 목을 늘여 한가스럽다. 이곳이 겨울이 되어 백설이 희디 흰 대평야에서 시베리아인이 썰매를 타고 질주할 것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로라
자작나무 삼림 위에는 석양이 냉랭했다. 온 하늘빗이 황색이 되었다가 진홍색으로 바뀌더니 청회색으로 변한다. 하늘은 확실히 둥근 형상이 보이고, 밤낮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은 거울같이 투명하고 어지러이 빛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갖은 형상이 다 보였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던 오로라다. 우리는 익히 알던 노래 〈오로라〉를 불렀다.
갈까 보다 말까 보다
오로라의 아래로
러시아는 북쪽 나라
끝이 없어라
서쪽 하늘엔 석양이 타고
동쪽 하늘엔 밤이 샌다
종소리 들리누나
중천으로부터
오려니 너무 밝고
가려니 어둡다
멀리서 불빛이
반짝반짝해
섰거라, 헌 마차여
쉬어라, 백마여
내일 갈길이
없는 바 아니나
나는 나는 뜬 수풀
바람 부는 그대로
흐르고 흘러서
한없이 흘러
낮에는 길 걷고
밤엔 밤새껏 춤추어
말년엔 어디서
끝을 마치든
어느 곳에 이르면 하의를 넓게 껴입고 붉은 수건을 머리에 써 늘어뜨린 집단농장 여자들의 무리가 늘어서 있고, 어느 곳에 이르면 몽골인의 무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이 서 있다.
정거장마다 그곳 농민 여자들이 계란, 우유, 새끼돼지 훈제를 들고 판매점에서 여객에게 사가기를 청하고, 소녀들은 들판에 피어 있는 향기 높은 꽃 다발을 가지고 여객에게 권하는 특수한 정취를 맛보게 된다. 기차 보이가 갖다 주는 꽃을 먹고 남은 통조림 통에 꽂아놓고, 구매한 음식을 탁자 위에 벌여놓고 부부가 마주앉아 먹을 때, 우리 살림살이는 풍부하였고 재미스러웠다.
모스크바에 가까이 다가가자 농촌은 온통 감자로 깔렸다. 선로 주변에는 걸인이 많고, 정거장 대합실 바닥에는 병자, 노인, 어린이, 부녀들이 신음하고, 울고, 졸고, 혹은 두 팔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거나 담요를 두르고 바랑을 옆에 끼고 있는 참상이니,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이러할 줄 어찌 가히 상상하였으랴. 러시아라면 혁명을 연상하고 혁명이라면 러시아를 기억할 만큼,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는 무엇인지 모르게 피비린내 공기가 충만하였다.
모스크바 CCCP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는 페테르부르크였지만, 1917년 대혁명이 있은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 공화국은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모스크바는 지리상 위치로 보더라도 서구와 동아시아 나라를 이어주는 세계적인 큰길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찻속 생활을 하다가 여기서 내리니 심신이 상쾌하였다. 러시아 통과는 비교적 편리하나, 입국해 머무는 데는 엄중한 제한이 있어서 집행위원회 외국여권과에 가서 거주권을 받아야 하므로, 여행객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당일 통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여기서 3일간 체재하였다. 호텔 숙식료며 물가가 높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와 택시는 개인 소유가 없이 모두 국유인데다 얼마 되지도 않아서, 거리가 멀건 가깝건 꼭 걸어다니게 되었다.
모스크바 정거장에 내리면 조선인 박씨가 있어서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안내를 청한다. 박씨는 전에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로 있던 사람인데, 지금은 안내 영업으로 생활을 유지하여간다. 이 박씨는 일본인을 안내하고, 우리는 일본인 러시아 유학생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우선 나서는 길로 푸시킨 미술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근대 프랑스 미술관, 모로조프 박물관과 혁명박물관을 언뜻언뜻 보았다.
러시아 미술은 역사상으로 보면 조금도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러시아 문화의 중심이 변동함에 따라 예술가들은 중단되었던 예술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러시아 예술은 외국 여러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본래 가진 특질은 의연히 보전하였다. 러시아 현대미술은 대략 3개 파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보수파로 혁명 전의 전통을 보수하려는, 기술보다 구상을 중요시하는 파요, 두 번째는 동서양 미술의 장점을 취하여 자기화하려는 비교적 진보한 파요, 세 번째는 극히 소수이니 구성파 예술을 민중화하려는 일파이다. 그 외 모스크바파며 레닌그라드파며 각 지방파도 많이 있다. 그 중에도 예술 중심지인 모스크바에는 혁명러시아미술가협회, 사과四科협회, 미술잡지기자조합이 있어 해마다 전람회가 왕성하다.
푸시킨과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푸시킨과 트레티야코프 개인이 수집한 유럽 각국의 유명한 그림이 많았다. 근대 프랑스 미술관에는 근대 프랑스 화단에 유명한 그림은 거의 다 있었다. 무엇보다 모스크바 미술관의 진열 방법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다는 세평이 있다.
크렘린 궁전
높은 성벽이 있고 십자가 옥상이 보이는 크렘린 궁전 주위를 돌아서 바실리 사원을 들어가 으리으리한 장식을 정신 놓고 보다가 나와서, 나폴레옹 전쟁 기념공원을 보고 다시 나와 국영 백화점 속을 휘돌아서 맑게 흐르는 모스크바 강을 건너 흰 돌로 지은 노동궁 앞을 지나서 참새 언덕으로 갔다. 언덕에 올라서니 모스크바 전경이 눈앞에 나열한 중에 돔 지붕 교회당 옥상의 금색이 태양에 번쩍거려 가관이었다.
다시 내려와서 러시아 현 정부당국들의 클럽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에레와 공원에서 거닐다가 돌아왔다. 아침에 사방 교회당으로부터 종소리가 울려 들어온다. 나는 궁금증이 나서 나아가 사람들 뒤를 따라 가까운 큰 교회당으로 같다. 마침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관 뚜껑을 열고 꽃 속에 싸인 시체를 공개한다. 누구든지 들어가서 한 번씩 들여다보고 기도를 올리고 또 옆에 있는 예수 초상에 입을 맞추고 나온다.
시가지 어느 교회당 정문에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써 붙였다. 군중은 그것을 보면서 그곁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나온다.
모스크바 시가는 너절하다. 그리고 무슨 폭풍우나 지나간 듯하여 수습할 길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모두 실컷 매 맞은 것같이 늘씬하고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염세적 기분이 보인다. 남자들은 와이셔츠 바람으로 다니고, 여자들은 모자를 쓰지 않고 발 벗고 다닌다. 내용을 듣건대 비참한 일이 많으며, 외국 물건이 없어서 국내산으로만 생활하게 되므로 물가가 비싸고 불편한 점이 많다 한다.
오후에는 레닌 Vladimir Lenin 묘를 구경 갔다. 공개하는 시간 전부터 구경꾼이 줄을 섰다. 좌우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사이로 엄숙히 발자국을 가볍게 하여 들어갔다. 지하 층계로 내려서서 유리 관 주위를 돌며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드러누운 레닌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 혁명가 레닌의 시체에 대하여 실물이니 아니니 세평이 자자하나 하여간 보게 된 것이 광영이었다. 광장 앞에서 나팔 소리, 북소리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광장에는 적색 깃발이 수만 개 나부꼈다. 무려 수만 군중 속에서 청춘남녀들이 적색 모자를 쓰고 적색 넥타이를 메고 마차 위 혹은 자동차 속에서 팔을 뻗치고 발을 굴러 활기있는 소리로 합창이나 독창을 하여 북적북적하고 와글와글해졌다. 영국과의 국교 단절 시위운동이라고 한다.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떠날 길이 바빠 돌아섰다.
오후 5시에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목적지인 프랑스로 향하였다.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 세관에서 일일이 짐을 가지고 내려가 조사를 받게 되어 퍽 거북하였다. — 본문 중에서
○ 출판사 서평
- 글과 그림으로 복원한 조선 여성의 첫 세계일주
나혜석은 신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땅 최초의 여성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다. 김명순과 선후를 다투는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기도 하다.
신여성들에게 세상은 거대한 벽이었다. 식민지 체제, 봉건사상, 남성중심주의라는 억압적 질서는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선각자로서의 자의식이 클수록 아픔은 배가되었다. 김명순은 정신이상자가 되어, 윤심덕은 자살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라며 사회를 바꾸려 했던 나혜석은 첫 사랑을 병마로 떠나보낸 뒤, ‘자기의 예술을 살리고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하지만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여전히 신기루일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꿈도 꾸어보기 어려운 세계일주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의 포상 휴가 덕이었다. 젖먹이를 포함한 세 아이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떠나기로 결정한다.
한 달여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것으로 여정은 시작된다. 파리에 1년 2개월 머물면서 유럽 각지를 여행한다. 이어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 각지를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하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으로 1년 9개월에 이르는 여정이 마무리된다.
실로 놀랍다. 1927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주유한 것도 놀랍거니와, 그 궤적이 완벽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나혜석 이전에 세계일주라 이름할 만한 여행은 1883년 조선 정부가 파견한 보빙사 일행과 나혜석에 한 해 앞선 허헌 정도가 있다. 나혜석의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화제가 되었고, 귀국 후에 《동아일보》와 《삼천리》에 여행기가 연재되었다.
여행중 나혜석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채찍질하고 되묻는다. 미술 기행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또 하나의 화두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여성인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모든 물정이 여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았다.”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나혜석의 여행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근대적 개인으로 탈각해 가는 신여성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의 기행기는 서너 편이 단편적으로 소개되거나 전집 속에 접근도 읽기도 어려운 형태로 옹송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나혜석이 남긴 모든 기행문을 집대성한 것이다. 《삼천리》에 실린 글을 근간으로 삼되, 다른 매체에 발표된 새로운 내용을 찾아 보탬으로써 내용을 풍성히 하였다. 단편적인 기행문 조각까지 찾아내 박스 형태로 관련되는 부분에 수록하였다. 모두 23편의 글(2편은 신문 기사)이 이 책의 피와 살이 되었다. 또한 여행 순서대로 내용을 배열하였다.
나혜석은 여행중 그림 작업을 계속하였다. 나혜석의 그림 가운데 세계 여행과 관련되는 작품을 골라 함께 수록한다. 일부 나혜석의 그림이 아닌 작품은 기행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들이다.
이로써 90년 전 이 땅의 여성 가운데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돈 나혜석의 여행은 글과 그림으로 온전히 복원되었다.
- 떠나기 전의 말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더욱이 나의 견식, 나의 경험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돌연히 동경되고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 화단 畵壇을 동경하고, 구미 歐美 여자의 활동이 보고 싶었고, 구미인의 생활을 맛보고 싶었다.
나는 실로 미련이 많았다. 그만큼 동경하던 곳이라 가게 된 것이 무한히 기쁘련마는 내 환경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젖먹이 어린애까지 세 아이가 있고,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70 노모가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심기일전의 파동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일가족을 위하여, 내 자신을 위하여, 내 자식을 위하여, 드디어 떠나기를 결정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