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12월 10일, 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Leopold I, 1790 ~ 1865) 타계
레오폴 1세 (Leopold I, 1790년 12월 16일 ~ 1865년 12월 10일)은 벨기에의 초대 국왕 (재위: 1831년 7월 21일 ~ 1865년 12월 10일)이다.

– 레오폴드 1세 (Leopold I)
.출생: 1790년 12월 16일, 독일 코부르크 Ehrenburg Palace
.사망: 1865년 12월 10일, 독일 라켄
.폐위일: 1865년 12월 10일
.부모: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형제자매: 에른스트 1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배우자: 루이즈 도를레앙 (1832 ~ 1850년), 웨일스 공녀 샬럿 (1816 ~ 1817년)
.자녀: 레오폴 2세, 샤를로트 드 벨지크, 필리프 드 벨지크 등
.손주: 알베르 1세, Prince Leopold, Duke of Brabant, Princess Louise of Belgium 등
벨기에 왕국의 초대 국왕이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삼촌이자 그녀의 남편 앨버트 공의 삼촌이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 생애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과 그의 아내인 아우구스테 로이스 추 에베르스도르프 백작부인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에 동맹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였다.
1816년 웨일스 공녀 샬럿 오거스타와 결혼하지만, 이듬해에 그녀가 사망하고 만다. 레오폴은 계속 영국에 머물렀다가, 그리스 국왕으로 추대받았지만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로 갔다.
- 벨기에의 왕이 되다
귀국 후에 벨기에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국왕에 오르자마자, 벨기에의 군대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보조와 함께 벨기에를 독립 왕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네덜란드의 빌럼 1세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웠다.
1839년까지 레오폴드는 국가의 교육 제도를 넓히는 자유-가톨릭 연립 내각을 지속하는 도움을 주었다.
1836년 큰 도시들과 시골 지역들에 더욱 큰 정치적 자치제를 승인하였다.
1839년 연립 내각이 빌럼 1세의 벨기에 왕국의 독립 인정을 통하여 네덜란드의 압력을 퇴거시키면서 끝났다.
레오폴은 프로이센(1844)과 프랑스(1846)과 함께 상업적 조약을 맺었고, 중립적 외교 정책을 지속하였다.
그의 왕좌는 1848년 혁명 동안에 심각히 기피되지 않았다.
1852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 아래 적대 정권의 접근 후, 안트베르펜 지역의 방어 공사(1868년 완공)에 후원하였다.
가끔 “유럽의 네스토르”로 주목된 그는 유럽의 외교술에서 높게 영향력 있었고, 자신의 결혼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제휴를 강화하는 데 썼다고 한다.
1865년 12월 10일 라에켄 왕궁에서 별세하였다.

○ 평가
벨기에는 1830년 7월 혁명의 여파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후의 벨기에에서는 군주정이냐 공화정이냐를 둘러싸고 보수파와 자유파가 항쟁을 벌이지만, 11월에 군주정 헌법이 성립되어 국왕을 다른 나라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31년 6월 4일에 국왕에 즉위한 것이 코부르크 출신의 레오폴드 1세였다.
프랑스에서 밀려오는 2월 혁명의 압력에 대해 왕정을 지켜내고 혁명의 파급을 저지했다. – 마토바 아키히로 (的場昭弘)
○ 왕비와 자녀
- 왕비
제1비 웨일스 공녀 샬럿 오거스타 (영국 조지 4세의 외동딸로 난산으로 세상을 떠남)
제2비 오를레앙의 루이즈마리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의 장녀이다)
- 자녀 (이름, 출생~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벨기에의 왕세자 루이 필리프 (Louis Philippe, Crown Prince of Belgium) 1833년 7월 24일 ~ 1834년 5월 16일
2남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1835년 4월 9일 ~ 1909년 12월 17일,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슬하 1남 3녀, 카롤린 라크루아 (논란), 슬하 2남
3남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왕자 (Prince Philippe, Count of Flanders) 1837년 3월 24일 ~ 1905년 11월 17일, 호엔촐레른의 공녀 마리, 슬하 2남 3녀
1녀 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 (Charlotte, Empress of Mexico) 1840년 6월 7일 ~ 1927년 1월 19일, 막시밀리아노 1세
- 손주
알베르 1세, Prince Leopold, Duke of Brabant, Princess Louise of Belgium 등

루이즈마리 왕비는 1850년 10월 11일 결핵으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레오폴드는 정부(情婦)인 아르카디 메이어 (Arcadie Claret 아르카디 클라레프랑스어)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조지 (게오르크 폰 에핑호벤)(1849년생)과 아르투르 폰 에핑호벤 (1852년생)을 두었다.
레오폴드의 요청에 따라, 1862년 그의 두 아들은 조카인 에른스트 2세에 의해 자유 남작 폰 에핑호벤으로 임명되었고, 1863년 아르카디도 남작 부인 폰 에핑호벤으로 임명되었다.
1848년, 왕비 루이즈마리의 아버지 루이 필리프 국왕이 퇴위했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혼인 관계를 포기하고 합스부르크가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려 했다.
레오폴드 왕세자에게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헨리에테를 아내로 맞이하게 했지만, 레오폴드는 애첩과 동거하게 되면서 결혼 생활의 파탄은 분명했다.
레오폴드 1세는 장녀 샤를로트를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과 결혼시키려 했다. 아들들과의 불화도 있어서, 레오폴드 1세는 샤를로트를 몹시 아꼈으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고 평할 정도로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샤를로트의 혼담 상대에는,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5세나, 작센의 왕제 게오르크 (후, 국왕)도 있었지만, 레오폴드 1세의 희망에 맞지 않았다.
1855년, 벨기에를 방문한 막시밀리안 대공을 레오폴드 1세 부자는 환대했고, 막시밀리안도 샤를로트와의 혼담에 동의했다. 이듬해 1856년 12월, 벨기에를 재방문한 막시밀리안과의 교섭에서, 레오폴드 1세는 끔찍이 아끼는 딸을 위해 거액의 지참금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1857년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제국에 의한 멕시코 출병이 이루어졌고, 영국과 스페인이 잇따라 철수하는 가운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막시밀리안은 이탈리아에서의 권익을 잃고, 은밀히 장인 레오폴드 1세에게 재산 보전을 교섭하는 등, 형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제 즉위를 수락한다. 샤를로트는 기뻐했다. 레오폴드 1세는 막시밀리안에게 프랑스, 영국, 스페인의 일치된 지원을 요구하도록 조언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