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 31일, 대한민국의 정치인 조봉암 (曺奉岩, 1898 ~ 1959) 별세
조봉암 (曺奉岩, 1898년 10월 29일 / 음력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 (昌寧)이다.

– 조봉암 (曺奉岩)
.출생: 1898년 9월 25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사망: 1959년 7월 3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정당: 진보당
.배우자: 김조이 (1924 ~ 1927년), 김금옥
.자녀: 조규호
.저서: 우리의 당면 과업: 대 공산당 투쟁의 승리를 위하여
.설립 조직: 진보당, 조선공산당
대한민국의 항일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19년 3.1 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짧게 활동하였다.
이후 좌경화되어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으면서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을 조직하고 입당한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경도되어 조선공산당에서 움직였으나 1946년 이후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조봉암은 전향한 공산주의자 중 드물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선거에 둘 다 참여하였다.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후에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하였다.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1959년 2월 27일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 생애 및 활동
조봉암은 아버지 조창규와 어머니 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둘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이 오래 살라는 뜻에서 이름자를 바위 암으로 정하였다.
한편 조봉암은 창녕 조씨 항렬상 환 자 돌림에 해당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 (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 (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박헌영 (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 (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

○ 가족관계
아버지 : 조창규(曺昌奎, ? – ?)
어머니 : 유씨(劉氏, ? – ?)
형 : 요절
형 : 요절
형 : 조수암(曺壽岩)
동생 : 조용암(曺龍岩)
부인 : 김금옥(? ~ 1934년)
첫째 딸 : 조호정(曺滬晶, 1928년 ~ 2022년 10월 26일)
첫째 사위 : 이봉래(李奉來, 1922년 ~ 1998년, 영화 감독)
외손녀 : 이성란(李聖蘭, 1960년~)
외손서: 유수현
부인 : 김조이(金祚伊, 1904년 ~ ?, 독립운동가, 한국 전쟁 당시 실종되었다.)
둘째 딸 : 조임정
셋째 딸 : 조의정(1950년 ~ )
아들 : 조규호(1949년 ~ )
손자 : 조광현
처남 : 김송학, 김조이의 남동생
○ 주요저서
《공산주의 모순발견》
《우리가 나아갈 길》
《우리의 당면과업》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