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유다서에 등장하는 가인, 발람 그리고 고라!<1> (유다서 1장)
신약성경의 마지막 서신 서라고 할 수 있는 ‘유다서’가 있다. 유다서의 저자는 스스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밝히고 있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것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의미한다. 사도 야고보의 형제는 유다가 아니라 요한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이 서신을 보낸 수신자는 한 개인이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1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1장의 서신만을 남긴 유다가, 그 한 장의 서신을 통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유다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기독교에 있게 될 배교만을 전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짧은 글에는 에덴동산에서부터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거쳐 오늘날까지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3명의 인물을 예로 들고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가인이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인류태초의 살인자로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당시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살던 중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게 된다. 죄를 범한 아담의 현실적인 삶은 180도 달라졌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될 정도로 고된 인생이 될 것임을, 그리고 그 땀의 댓가를 온전히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땅은 가시와 엉컹퀴를 내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죄의 결과에 대한 현실을 말씀 하셨다. 그들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그들의 부모와 함께 먹고 살기 위해 농사짓는 생존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담의 가족이 모두가 농업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경은 가인은 ‘농사하는 자’라고 했고 아벨은 ‘양치는 자’(창 4:2)였다고 말한다. 아벨은 왜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지 않고 인간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양을 쳤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폐일언(蔽一言)하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왜 이러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누가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한다고 알려주었을까?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제사의 법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이러한 제사의식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을까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제사의 시작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다. 과연 죄의 문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문제인지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범죄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해결해야할 인생의 숙제는 부자되는 일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도 아닌 ‘죄의 문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라도 심령의 평안은 얻을 수 없다. 구약의 유대인이 드렸던 의식 중에 피 흘림이 없이 죄가 도말되는 의식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죄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러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셨던 것도 바로 이 죄의 문제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인류에게 어린양 예수에 대한 예표적인 차원에서 제사의 법을 정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4-7). 이 당시 바쳐진 제물은 곡식과 양의 첫 새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가인과 아벨의 삶 자체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그들의 제물만 드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행의 삶까지도 받기 원하셨다.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지적하셨던 것이다. 당시에 가인과 아벨이 행했어야할 선이 무엇이었을까? 선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전제할 때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먹지도 못할 양을 치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벨이 양을 친 것이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지 않았을까! 노아가 산에다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던 것처럼 아벨 역시도 그러했다고 본다. 실제적인 생활에 전혀 유익이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는 그 믿음의 선행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기쁘시게 열납 받으셨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서 돌이키라!
오늘 유다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 (유 1:11)라고 했다. 그가 책망하는‘화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첫 번째로 가인의 길로 비유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당시의 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먹고 마시며 애찬을 나누었던 그들 속에 가인의 길, 곧 외식과 불법 그리고 배도의 길을 걷고 있었던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선한 삶을 살았던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더 나아가 영적으로 죽이고자 하는 가인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종교행위의 삶을 살았던 것이지, 결코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도, 아니 그렇게 살려고 고민해 보지도 않았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실질적인 점과 흠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눈에도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유다서 1:23.13)로 보여졌다. 유다의 서신을 통하여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혹시 가인의 길이 아닌지 돌아보며 돌이킬 수 있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용호 목사(시드니달란트교회, 호주나눔선교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