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문학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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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그 2000년의 역사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제3장 (손호현 저)
Note: 많은 내용을 짧은 시간에 소개하는데 무리가 있어 저자가 언급한 책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그 중 두 세가지의 소 주제에 집중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주로, 역사 가운데 분리로 점철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토라적 (성경적) 세계관과 다른 입장의 견해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예수는 존재 했는가?
글을 남기지 않은 예수. 저자는 예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집단적 신화의 탄생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대해, 단군신화의 단군이 역사적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 처럼..예수 존재의 기독교 기록의 교차 분석을 해 봐야 한다는 제안을 한다.
예수의 역사성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 (56-117)가 기록한 BCE 14 ~ AD 68년 사의의 역사 기록 ‘연대기 (Annals)’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처형한 ‘그리스도’라는 기록을 남겼고, 바빌로니안 탈무드에서는 “유월절 전날 예수를 매달아 죽였다. 그는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속이고 길을 잃게 했으므로 돌로 켜 죽일 것”이고, 그를 변호 할 자가 나타나지 않아 40일 후 ‘그를 매달았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 등을 통해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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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시작
초대교회는 약 120여명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독교의 제2의 창시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교 안에서의 일종의 개혁운동이라고 이해했던 반면, 바울은 외국인을 상대로 선교를 생각하였다. 86p에 이방인들을 위해 49년경 사도 회의를 열고 (초대 공의회)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고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여러차례의 선교 여행 끝에 67년 로마에서 순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로마 황제. 272-337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국제화한 인물
312년 막센티누스와의 경합에서 승리 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선포-성직자에게 면세 혜택
황제의 개종에는 종교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가 존재-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성장
빵 굽는 가게에서의 신학 논쟁
.키에르케골, 1813-1855
덴마크 철학자, 신학자
모음 부호-권위 있는 네델란드 출판사의 비평본, 점 하나..휴 하고 아내가 한숨을 쉬니 점이 날라가 버림- 코담배 가루였던 것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 사이. 아리우스 (장로/신학자)-예수는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아리우스파 대다수) 동조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빵을 팔지 않음. 알렉산더 주교가 318년 신학 토론대회 개최-삼위일체 단일성-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며 행진(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아리우스 정죄 됨 -추종자들로 인한 논쟁 지속 -니케아 종교 회의 까지.. /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입 -325년5월20일 -니케아 공의회 열리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 / 하나님과 예수는 본질에 있어 동일하다고 선포 – 아리우스: 본질에 있어 비슷하다, 니케아 공의회: 본질에 있어 동일하다. 조그만 점이나 오타 하나가 정통과 이단을 가른 것 -교회는 나중에 니케아 신조를 만들어낸다 -삼위일체론.
325-381년 수정
.필리오케 논쟁: 라틴 동방 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분리
필리오케 (라틴어-그리고 아들로 부터),
요 10:26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
서방: 아버지-아들-성령 477년 스페인 톨레도 공의회에서 니케아신조에 추가
동방: 아버지-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대로
논점: 서방 카톨릭의 교황이 니케아 신조를 수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로마 교황권의 정치적 논쟁과 오만에 저항.
1054년 대분열로 서로를 파문함
.루터의 면죄부
아리우스 논쟁: 이단정죄 – 니케아 공의회 신학 매듭
필리오케 논쟁: 동서방 분리
루터의 면죄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
.마르틴 루터: 1483-1546
법률가 공부로 미래준비-번개 맞은 후 수도사가 되기로 함 – 죄의식 – 오직 은혜로..루터신학의 기반 – 중세교회의 구원 장사-면죄부를 팔며 장사 – 율리우스2세-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필요 – 면죄부는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이 연옥에 갈 수 있게 한다는 말로 꼬임
테젤 (도미니크 수도원)은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가 날 때 죽은 자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설교했다. 가격도 찬차만별-1517년 10월 30일-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다-‘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 – 쿠텐베르크의 활자 기술로 인쇄술 발달 – 날개 달린 듯 종교개혁의 거대한 혁명으로 번짐 – 루터의 파문 – 1521 황제가 보름스 회의 주최 – 소명 기회를 주었지만 굴하지 않음 – 교황과 황제로 부터 이중 파문 –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의 보호-비트부르크 성에 은신 – 독일어로 성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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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교
경교 기원설: 임진왜란
소현세자
천진암 강학회
이승훈의 세례
.경교:
당나라 통해 경교라는 기독교 분파가 들어왔다는 주장.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386-451)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러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인식이 우세.
네스토리우스파가 시리아로 쫒겨감 – 무슬림의 압박 받아-바그다드로 옮겨 교세 확장 – 당시 당나라의 교역의 활발함으로 중국에까지 선교 – 635년 태종9년에 중국에 들어감 – 태종은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의 설교를 경청함 – 교회당도 마련 – 신라: 삼국통일 위해 김춘추과 같은 인물들이 활발히 교역 – 경교 전파 가능성 (E.A 고든-영국 학자)
.가능성
1917 – 대진경교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발견
1965 –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 발견(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 소장)
경주 – 철제 십자문 장식과 성모마리아 소상 발견
19세기 초 – 팔라디우스가 경교가 중국에 성행하였다는 책 발견- 한국 문헌(출처 불명)
.임진왜란
1549년 일본에 카톨릭 전파 – 임진왜란 때가 기독교 전성기 – 일본 장병 및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의 예수회 신부8명에게 정복 후 기독교 전파 위해 교회당 건립 및 교육 요청 –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독실한 기독교인)와 부하들이 기도교인 – 고니시 요청으로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한국 파견 – 1593년 한국의 일본 병사들 성사줌
1874년 – 샤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처음 주장
명나라의 총사령관이 예수회의 마테오리치를 방문, 일본 주재 예수회가 각각 한국 전쟁에 대해 논의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임진왜란 중 많은 조선인 포로가 포르투갈의 선교사들로부터 전도 – 그 후 일본의 기독교 탄압 때 순교 – 투옥, 고문 (25명), 순교 (21명), 9명이 피우스9세에 의해 성자 추대
.소현세자
청의 조선 침략 (병자호란)
인조의 소현세자를 불모 – 심양에서 아담 샬 신부와 접촉 (1622-1658 선교 회고록에 소현세자의 신앙고백 기록) – 1664년 소현세자 한국 귀국시 5명의 천주고 신자 수행했으나 환궁 후 70일만에 (1665년 2월) 죽고 서학서적과 물품으로 재앙이 일어났다고 모두 불태움. 수행원들도 청으로 돌려보냄.
.천진암 강학회
1777 – 샤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사’ – 서학의 중국 전래 후,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천진암’이라는 곳에서 강학을 개최-유교및 서학 서적 검토 후 종교진리로 받아들임
이벽 (1777) – ‘청주 공경사’, ‘천주가사’를 예능장르로 신앙고백화함 – 자생적, 토착적 기원
이승훈 (1783) – 6년 후 북경으로 세례 받으러감.
.이승훈 세례
1783년 27세 – 사신단의 일행으로 중국 갈 때 이벽으로부터 북경에서 세례 받을 것을 권유
1784 – 서학 공부 후 그라몽 신부에게 최초로 세례 (이름.베드로). 교리서, 십자가상, 성화, 묵주, 기하학 책 갖고 조선 귀환 – 이벽 세례 (요한) – 전도 –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권철신 전도
1785 – 매주 예배 및 교리 강습 (김범우의 집) – 교회가 토착적으로 시작: 예배, 학습, 비밀모임 등이 조선의 평등관계, 신분제도, 유교적 예법과 제사 문제에 위해 하다는 이유로 탄압
1791 – 윤지충 순교 – 모친상 후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 (감옥에서 – 재판과정 기록)
제사 문제 – 김경재: 죽은 조상에 대한 존경 표시 – 사도행전의 ‘성도의 교제’ (사도행전 3장- 성령을 믿음, 거룩한 공회 – 성도의 교통) 고백에 조화롭다 – 시공의 제약을 넘어 교통의 가능성을 포함해야 – 성도의 교제로 제사 드릴 수 있다.
.황사영 백서 사건 (1775-1801)
정약종의 사위 – 1801년 박해가 일어날 때, 카톨릭 주교에게 밀서 – 5, 6만 명의 병사, 대포, 병기를 수백 척의 배에 실고 와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해 달라. 조선이 없어져도 성교의 표로 남아야 한다는 글을 남김 – 발각됨으로 천주교 탄압의 결정적 빌미제공 (민족 vs 신앙?)
거문고와 옹기
‘절두산 순교성지’ (합정동)는 고난의 역사의 건축학적 증언 – 1866년 이후 천주교인의 머리가 잘려나간 곳 – 거문고와 성화, 옹기로 신아의 지조를 지킴 – 정하상 (평신도) 말씀과 신앙을 거문고 가락에 연주
이희영 (최초 기독교 화가) – 그림 예수상 – 홍필주에게, 황사영에게 3점을 보낸 것이 탄로 – 신유박해 때 참수로 순교
김대건 신부 – 마카오 주재 (1845년) – 리보아 (파리외방전교회 – 극동지부장)에게 박해 현실을 삽화로 보냄 – 살아남은 천주교인들 – 교우촌 형성 – 화전, 담배, 숯막, 옹기점 등 짐장수로 생계 – 옹기에 십자가 문양 등으로 신아의 유대감과 용기 나눔
윤동주 (1945.2.16 순국 – 후쿠오카 형무소) – 기독교 집안 – 조부 윤하원 – 부유, 명동촌 집의 기와에 십자가 문양.
거문고, 성화, 옹기, 기와, 시, 예술로 신앙의 지조를 지킨 영혼의 저항이었다.
춘향전
18세기 영,정조 시대 – 외래 문물과 천주교가 성행 (오충태) – 신분차이 초월한 사랑, 평등 사상 – 이몽룡: 예수의 상징, 춘향은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정조를 지키는 기독교인의 저항의지 – 기독교 유언비어 작품.
한글성서
1877년 – 만주에서 낱권의 신약성서 번역 진행 – 1887년, 신약 전체 번역 ‘예수 셩교젼서’ 발간 – 죤 로스, 매킨타이어, 이응찬, 사상륜의 노력 – 한문 성경번역 (한국인) – 그리스 원문 대조 (서양 선교사) – 의주 출신으로 서북지역 방언으로 낯선 표현
이수정 – 양반학자, 조정의 관리, 임오군란 때 민비 피신으로 신임 – 1882, 일본 유학 – 1883년 기독교로 개종 – 1884년 4복음서, 사도행전을 한문으로 번역 후 한글 토를 달아 ‘현토한한신약전서’를 출판 – 다시 한글 번역, 만주의 한글 성서 – 1885년 한문 옆에 한글 병기형태 ‘신약 마가젼복음셔언’ 출간
언더우드 (장로교)와 아펜셀러 (감리교) 1885년 4월 5일, 인천항 입항시 갖고 있던 성경 – 이수정이 이 글의 한국어 가르침 – 민족적 주체성과 자발성
네비우스 선교 방법
한국 교회성장 이유? – 가난한 민중 편에 섰기 때문
죤 네비우스: 중국에서 25년 선교, 1890년 한국 초청 – 선교 정책 세미나
1892년 – 장로교, 감리교단에서 보완 후 한국의 선교 전략으로 – ‘네비우스 선교 방법’ 채택
– 하층, 여성, 청년 교육,성서 교육 (한국말로), 자급교회, 동족 전도자, 의료선교 – 환자, 하층계급, 여성, 교육과 의료, 한글에의 관심, 신의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름 – 죤 로스 (1883년 부터) : 상제를 하나님으로 표기 – 1. 무한성 2.유일성 3. 인격적, 우주적 전체
1894 –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번역됨 (삼문출판사) – 삽화 – 김준근 그림 – 운보 김기창 – 천당을 남대문과 같은 누각으로, 선녀를 천사로 그렸다고 평가.
한국의 기독교 큰 스승들
.문화신학, 유동식 – 토착화 신학 – 서양기독교가 한국 문화에 토착화 (1960)되야 한다.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의 문화 신학적 재현.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이 세상의 형태로 세상에 뿌리 내림으로 세상을 구원)
.최병헌 (1893 세례, ‘성산 명경’: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대화, ‘만종일련’,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학자들의 상제와 동일,
.유영모 (김흥호, 함석헌의 스승 – 한끼 밥, 남녀관계 끊음, 무릎 꿇고 앉음, 걸어 다님, 판자위 수면 – 다석 일지 – 1957 “존재와 무를 포괄하는 ‘없이 계신 분’”
.최태용: 우찌무라 간조 문화 성경 연구, 1936 민족교단 ‘기도교조선 복음교회’, 현재의 ‘기독교 대한 복음 교회’의 창설자 – 영적 기독교론 주장
.함석헌: YMCA, 퀘이커 교 도입-일요 종교 집회, ‘씨알의 소리’ (1970) 창간, 타인을 위한 자아의 고난, 우찌무라 간조의 속죄를 씨알의 자속 신앙으로 변화 – 민중 신학기초
.김교신: 무교회주의자 – ‘성서조선’ 창간,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지조 높은 정신 강조 –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그 땅으로 돌아가리라”
.윤성범: 칼 바르트 사사, 토착화 신학 연구, ‘단군신화와 기독교 삼위일체론’ 접목, ‘유교적 기독교에서 기독교적 유교 추구’
.서남동: 민중 신학의 창시자, 기독교의 근본 문제는 지배자의 ‘죄’가 아닌 민중의 ‘한’, ‘한의 사제’ – 민중 신학이 바로 Missio Dei의 실천
.안병무: 서남동과 함께 민중 신학의 창시자, 1970년 전태일분신사건 – 민중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사건, 민중 예수의 얼굴을 그리라!
.유동식: 한 풍류 신학의 창시자, 삶 자체가 예술, 사람다운 삶, 민족 생명 존중 사상 – 19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 – 민중 신학으로 발전
.변선환: 토착화 신학 추구, 1990 – 불타와 그리스도 글 발표로 1992년 감리교로 부터 출교 – 종교 다원주의 입장에서 불교와의 대화 시도.. ‘예수 사건은 급격히 변한 다원주의사회에서 배타적으로, 유일한 구원의 절대 규범이 될 수 없다” “서양의 옷을 벗고 한국 민중과 동양의 토양에서 예수를 봐야한다” 주장
한국 신학의 스승들이 보여 준 ‘웅대한 사상의 풍경’이라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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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정원일 목사 (목회자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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