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창조안에 계신 하느님
위르겐 몰트만 / 한국신학연구소 / 1999.8.31
이 책은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착취와 돌이킬 수 없는 파괴에 직면하여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로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의미하는 바를 고찰한 생태학적 창조론이다. 세계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는 위르겐 몰트만은 이 책에서 ‘환경의 위기’는 인간 자신의 위기라고 지적하면서, 기존 창조론의 중심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창조 전체를 향한 우주적 인식으로 신학의 지평을 확장한다.
몰트만은 창조자, 그의 피조물, 창조의 목적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볼 때, 창조자는 그의 창조의 영을 통해 세계와 개개의 피조물 안에 거하시며, 또한 그것을 통해 창조가 유지되고 존속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신적인 비밀은 쉐키나(하나님의 거하심)에 있으며, 그 목적은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집’을 만드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한데, 몰트만에 따르면 이 관계는 화해, 평화, 그리고 공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또한 이 책에서 모든 차원에서의 열린 대화를 전개하는 ‘에큐메니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론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자연과학의 인식들, 가설들, 이론들과 창조론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현대 산업 사회 생태에 대한 변혁 필요성과 그 지향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목차
머리말
Ⅰ.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생태학적 창조론을 위한 기본 생각들
-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참여하는 인식이다
- 영광을 위한 창조
- 창조의 안식일
-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창조의 메시야적 준비
- 성령 안에서의 창조
- 세계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내재
- 상호 침투의 원리
- 영과 인간의 의식
Ⅱ.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 통치의 위기
- 생태학적 자연의 신학을 향하여
- 자연의 소외와 해방
1) 칼 마르크스와 자연의 소외
2) 에른스트 블로호의 “자연주체”
3) 자연 속의 고향
4) 신체의 생동화
5) 인간의 자연화
Ⅲ. 창조의 인식 - 계약, 창조, 하느님의 나라
- “자연신학”
- 약속과 선취로서의 세계
- 메시야적 세계인식
- 창조의 성만찬 공동체
Ⅳ. 창조자 하느님 -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 하느님이 자기를 창조자로 결정함
- 무(無)로부터의 창조
- 삼위일체론적 창조론
- 우주의 성령
Ⅴ. 창조의 시간 - 영원의 반복으로서의 시간
- 영원한 현재로서의 시간
- 창조의 시간
-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시간의 경험
- 역사의 교차된 시간들
1) 미래의 지평에서 시간의 경험
2) 현재적 과거의 사실화(史實化)
3) 현재적 미래의 미래화
4) 역사적 시간들의 동시화
5) 역사적 시간과 자연의 시간의 동시화
Ⅵ. 창조의 공간 - 공간의 생태학적 개념
- 동질적 공간의 개념
- 공간들의 창조와 창조의 공간
- 절대 공간의 문제
Ⅶ. 하늘과 땅 - 왜 이원의 세계인가
- 자연의 하늘
-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 근대의“하늘 비판”
- “하늘에서와 같이 땅위에도”있는 하느님의 영광
Ⅷ. 창조의 진화 - 사람―창조의 역사 속에 있는 피조물
- 진화인가 아니면 창조인가 잘못된 대결―문제의 핵심
- 자연의 진화과정
- 계속적 창조
Ⅸ.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 형상: 사람 - 사람의 본래적인 규정: 하느님의 형상
- 사람의 메시야적 소명: 그리스도의 형상
- 사람의 종말론적 영화: 하느님의 영광
- 하느님의 형상인 동시에 죄인
- 사회적 하느님의 형상
Ⅹ. “신체성은 하느님의 모든 사역의 종점이다” - 영혼의 우위
1) 플라톤과 몸의 죽음
2) 데카르트와 육체기계
3) 칼 바르트와“다스리는 영혼의 섬기는 몸” - 생기 있게 된 몸
1) 육체에 대한 구약성서의 견해
2) 몸과 영혼의 순환적 형태
3) 성령과 형태
4) 선취로서의 성령
5) 교통으로서의 성령
6) 삶의 긍정으로서의 성령 - 건강과 병이 있어서의 삶
ⅩⅠ. 안식일: 창조의 축제 - 창조의 완성
- 창조의 축복
- 창조의 성화
- 구원의 축제
- 예수와 안식일
- 일요일: 시작의 축제
부록: 세계의 상징들 - 거대한 세계 어머니
- 어머니 땅
- 하늘과 땅의 축제
- 춤으로서의 세계
- 거대한 세계극장
- 세계 상징으로서의 높이
- 작품과 기계로서의 세계
- 메시야적 관점에서 본 상징의 비교

○ 저자소개 : 위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1926 ~ )
1926년 4월 8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몰트만은 17세가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되었다가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포로수용소에서 군목이 건네준 성서를 읽던 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괴팅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자격논문을 완성했다.
부퍼탈 대학 교수로 부름을 받아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본 대학을 거쳐 튀빙엔 대학에서 은퇴할 때까지 신학을 가르쳤다.
블로흐의 무신론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었던 『희망의 신학』(1964)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는 지금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1985), 『예수 그리스도의 길』(1989), 『생명의 영』(1991), 『오시는 하나님』(1995), 『몰트만 자서전』(2006), 『희망의 윤리』(2010)를 포함하여 30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바르트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현대 신학자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 역자 : 김균진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독일 튀빙엔대학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부터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기독교 조직신학』, 『헤겔철학과 현대신학』, 『헤겔과 바르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생태계의 위기와 신학』, 역서로는 『본회퍼의 사회윤리』,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 『생명의 영』,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오시는 하나님』, 『성령』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안식일에 창조는 완성된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중략…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세계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며 계시하는 날이다. 기이하게도 서구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에 있어서 창조는 대개의 경우 ‘육일간의 사역’으로 기술되어 왔다. 일곱번째의 날인 안식일은 자주 간과되었다.
…중략…
그러나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창조적인 하느님은 비로소 그의 목적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여 자기 자신에게, 그의 영광에 도달한다. — p.21-22

○ 몰트만의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 요약 _ 김은희
Ⅰ 창조안에 계신 하나님
생태학적 창조론을 위한 기본 생각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전개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생태학적 창조론’을 다루고자 한다.
- 하나님의 창조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참여하는 인식이다.
생태학적 면에서의 창조론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분석적 사고를 버리고 하나의 새로운, 서로 교통하며 통합하는 사고를 배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근대적 사고는 객체화시키고 분석하며 개체화시키고 귀납시키는 방법으로 발전되었다. 이에반하여 현대의 학문들은 이와는 다르게 대상들과 사실들은 그때 그때의 주변 세계 및 환경과의 관계와 연결 속에서 이해되며, 관찰하는 인간을 포함하여 그들을 나누지 않고 통합시키며, 그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전체성 속에서 인지할 때 훨씬 더 잘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창조론의 신학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비판이후의 과학적인 방법들과 사고의 형식들을 받아들이기도 할 것이다”(17)
- 영광을 위한 창조
이 책은 의식적으로, 또 강조하여 그리스도교적 창조론을 기술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메시야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이 메시야적인 것은 예수의 선포와 그의 역사를 통하여 규정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해방’과 자연의 해방, 그리고 부정적인것과 죽음의 세력들로부터 인간과 자연의 사귐을 ‘구원’ 하는 일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이 메시야적 창조론은 예수님의 선포와 그분의 역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창조론을 말한다. 이 ‘창조세계의 미래’는 일찍이 ‘영광의 나라’라고 불렸다. ‘태초의 창조는 열려진 창조요, 이것의 완성은 하나님 영광의 집이요 거처다. 인간은 이미 지금 여기 역사 속에서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주들을 경험한다.
- 창조의 안식일
성서의 전통에 의하면 구원을 향한 창조의 방향은 태초에서부터 주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의 창조는 안식일, 곧 “창조의 잔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창조는 완성된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안식일은 모든 성서적인, 모든 유다교적인,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창조론을 인식할 수 있는 표지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로서의 세계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며 계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창조적인 하나님은 비로서 그의 목적에 도달한다.
그리스도의 견해에 의하면 자신을 죽음에 내어준 그의 헌신과 부활을 통하여 그가 선포한 메시야의 시대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한 주간의 첫 날을 부활의 잔치로 축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 창조의 첫 날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창조의 메시야적 준비
창조론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 이원적 교의학 – “창조와 구원”, “창조와 계약”, “자연과 초자연”, “필연성과 자유” – 의 상황에 위치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전제하며 완성한다” 이 기본 명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 안에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 성육신은 창조를 전제하고 완성한다는 것을 연역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은혜는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준비시킨다.” “은혜는 자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세계의 메시야적 준비이다”라고 표현한다.
몰트만은 자연과 은혜가 모두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몰트만은 창조의 ‘내적 근거’를 바르트처럼 은혜의 언약에 두지 않고,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둔다.
- 성령 안에서의 창조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통해” 형성되며, “하나님 안에서” 실존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창조자와 주님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을 그의 창조세계에 대립시키는 입장과 기독론 집중의 창조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성령안에서의 창조’를 제시하되,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창조하셨다고하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을 비로소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신적인 영(ruah)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인하여 피조물들은 “지어졌으며” 영속에서 실존하며 영을 통하여 “새로워진다”.
몰트만은 성령과 창조에 관하여 무엇보다도 칼빈의 신학을 가져온다. 칼빈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 나오는 ‘생명의 시여자’와 ‘생명의 원천’으로 보면서 이 성령이 피조되니 만유 위에 부은바 되어, 이 ‘생명의 원천’이 실존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계신다고 한다. 몰트만은 이 ‘생명의 원천’인 성령은 모든 피조된 만유와 하나님 사이에, 인간들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공동체를 형성시킨다고 한다.
-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
구약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야훼 신앙은 끈질기게 하나님과 세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하나님은 세계가 아니며 세계는 신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를 자연의 힘들과 리듬 속에서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계약과 약속을 통하여 규정되어 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기를 계시한다.
그래서 자연은 그것의 신성을 제거당했고, 정치는 세속화되었으며, 역사는 운명을 벗어났다. 이 세계는 수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적 창조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대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것이 아니며 세상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내재적 ‘긴장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동시에 그것의 현존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힘 때문에 살며 하나님이 그 안에 산다.
(1) 랍비적이며 카발리아적인 ‘쉐히나 이론’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고통을 나누시고, 그들과 더불어 포로 된 타향살이에 동참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사, 인간들 사이에 거주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몰트만은 창조세계에 적용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세계와 고통을 나누시고, 이 창조세계 안에 거주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삼위일체론’ :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유롭고, 넘쳐 흐르는 사랑의 황홀 가운데서 자기자신으로부터 나오시사, 창조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이 세계는 그분이 거기 계신 것처럼 거기 있으면서 하나님과는 구별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그의 창조세계를 창조하시고, 화해시키시며, 구속하신다. 또한 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의 창조세계 안에 현존하시고, 이 창조세계의 화해와 구속에도 현존하신다.
- 상호 침투의 원리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상호간의 거함과 이 거함을 통하여 나타난 영원한 사귐을 순환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표현한다. 상이한 위격들의 영원한 ‘사귐’이 그들 상호간의 ‘거함’과 상호간의 ‘침투’의 힘으로 하나님 안에 있다. 삼위일체적인 ‘순환’은 신적인 삶, 영원한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삶의 가장 높은 강열함을 나타낸다. 삼위일체론의 순환은 경직된 구조가 아니라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의 원천이요 모든 반항의 소리이며 리듬 있게 춤추고 움직이는 것들의 근원이 되는 사랑의 가장 강열한 자극이요 절대적 안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안에는 사랑의 상호관계와 교호가 있다.
- 영과 인간의 의식
몰트만은 성령이 자연 속에 현존하시는 것을 전제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정신을 유추하여 설명한다. 성령께서 자연 안에 계신 것처럼 인간정신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말이다. 몰트만은 이와같은 성령 안에 있는 자연과 유추하여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말한다. 의식은 반성된 정신이기 때문에 인간 정신의 큰 영역이 무의식 속에 있고, 인간이란 많은 지층을 지닌 고도로 복합적인 생명체계라는 것이라.
몰트만은 이 인간정신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1) 몸과 영혼이 정신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 영 그리고 정신적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우리는 이 정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연결되고 교제하고 연합한다.
(3) 우리는 이 정신을 통해서 자연환경과 연결되고 교제하고 연합한다.
Ⅱ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현재의 상황은 모든 과학문명과 기계문명의 ‘생태학적 위기’, 인간을 통한 ‘자연의 고갈’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이 위기는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이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방향이 철저히 변화되지 않을 경우 이 위기는 하나의 총체적인 ‘재난’으로 끝날 것이다.
현대 세계의 생태학적 위기는 현대의 산업 국가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국가들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속에서 생성되었다. “땅을 정복하라”는 성서의 구절은 인간의 자연 지배와 세계 정복, 그리고 세계 지배를 위한 신적인 계명으로 간주되었다. 바로 이것이 생태계 파괴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이 몰트만의 주장이다.
- 통치의 위기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 사회의 생동적인 관계는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기술에 의해 계속 파괴되었고 이러한 추세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 문명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전체 체계는 물론 삼림의 사멸로부터 시작하여 노이로제의 확대에 이르는, 물의 오염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허무주의적 삶의 감정에 이르는 모든 체계들의 위기를 의미한다. 자연 파괴가 중지되려면 인간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들이 달라져야 한다. 생산을 ‘더 늘리고’ 인간의 노동의 효과를 ‘상승’시키며 이제까지의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는 그 사회가 초래하는 계속되는 환경의 파괴를 제한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의 가치체계와 의미체계를 철저하게 변화시킬 수 없는 사회들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그가 초래하는 파괴를 중지할 수가 없다.
- 생태학적 자연의 신학을 향하여
신학적 창조론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첫 단계’에서는 성서의 전통과 고대의 세계관이 결합되어 하나의 ‘종교적 우주론’이 생성되었다.
(2) ‘둘째 단계’에 있어서 자연과학은 이 우주론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켰으며, 신학은 창조론을 우주론으로부터 퇴각시키고 그것을 인격적인 ‘창조신앙’으로 위축시켜 버렸다.
(3) 오늘날 신학과 자연과학은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땅위에 있는 인간과 자연이 살아남아야 한다면 양자가 함께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전향이요 생태학적 위기에 있어서 그들의 위기시의 사귐이다.
(4) 신학에 대한 어떤 과제들이 여기에서부터 나타나는가?
①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을 신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고 악마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계”로 파악함을 뜻한다.
②과학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러한 관련에서 “자연”으로 간주될 수 있다.
③그러나 창조의 개념은 인간과 또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자연 사이의 긴장으로 가득한 역사도 넘어선다.
④자연을 창조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을 노예화되었고 자유를 희망하는 창조로 인식함을 뜻한다. 자연은 영광의 나라를 향한 길 위에 있는 세계의 창조의 큰 드라마 속의 한 행위를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연의 소외와 해방
(1)칼 마르크스와 자연의 소외
칼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획을 통하여 관념론적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의 투쟁을 종식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초기 저서”의 비전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인간의 소외뿐만 아니라 자연의 소외도 극복하여 인간성의 참된 본질뿐만 아니라 자연의 참된 본질을 회복시킨다.
(2) 에른스트 블로호의 “자연 주체”
에른스트 블로호는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쉘링의 자연철학과 보다 더 깊이 결합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자연화”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였다. 블로호는 인간과 자연의 상응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인간의 주체와 상응하는 파트너로서의 하나의 상응하는 “자연주체”를 가정한다. 자연이 그 자신의 독자성을 가진 “주체”로 인식되고 자연의 독자적인 미래가 고려된다.
(3) 자연 속의 고향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적어도 두 가지 기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한가지는 ‘노동의 관심’이다. 인간은 생필품을 얻고 그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자연을 가공한다. 인간은 주이고 자연은 그의 노예이다. 둘째는 ‘거주의 관심’이다. 인간은 자연을 가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서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거주의 관심을 ‘고향’이라는 개념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고향”은 자유 가운데만 있지 노예상태 속에는 없다.
인간은 ‘노동의 권리’만 가진 것이 아니라 ‘거주의 권리’도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 관심들은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4) 신체의 생동화
인간은 그가 사는 한 신체적으로 실존한다. 자연의 환경속에서 인간의 사회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되는 일은 인간 인격의 신체적 실존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살 수 있게 되는 일을 요구한다. 인간 자신의 신체적 자연이 주체를 통한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지배와 착취를 통하여 소외된 자연의 환경이 해방 될 수 없을 것이며, 거꾸로 소외된 자연 환경이 해방되지 않으면 인간의 신체적 자연도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5) 인간의 자연화
인간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자연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연화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독일의 학계에서는 먼저 ‘자연의 인간화’에 관한 새로운 발견들과 생각들이 있었다.
생태학적 이론의 다른 한가지 방향은 ‘인간의 자연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대칭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자연의 한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새로운 삶의 형식들과 삶의 형태들을 생성시키며 최종적으로 인간을 생성케 하는 위대한 주체이다.
인간이 먼저 자기를 자연에 대한 주체로,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먼저 자연의 산물로 이해하며 신학적으로는 ‘세계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하여 중요한 일이다.
○ 독자의 평
현대 신학에서 몰트만은 미래의 초월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희망의 신학이라고 하더군요. 포스트모던의 상대적 세계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돈을 느낄때, 전통신학에 대한 절망으로 나탄났던 반지성주의적 정서,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운동등의 현실무관의 경향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현실에 대해 좀더 종말론을 접촉시키려 합니다. 그의 희망의 신학과 종말론, 그리고 창조론은 생태학적 전개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러한 논리적 전개에는 사실 아직 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창조에 대해 정통신학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이전의 창조론이 6일간의 창조에 집중되어 있다면, 창조의 완성이요 영광인 7일째의 안식에 대한 재발견이 미술을 하는 제게 새로운 어떤 격려가 되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안식일에 창조는 완성된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 중략 …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세계를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며 계시하는 날이다. 기이하게도 서구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에 있어서 창조는 대개의 경우 “육일간의 사역”으로 기술되어 왔다. 일곱번째의 날인 안식일은 자주 간과되었다. … 중략 … 그러나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창조적인 하느님은 비로소 그의 목적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여 자기 자신에게, 그의 영광에 도달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