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8월 12일, 러시아의 시인•작가 바를람 샬라모프 (Varlam Tikhonovich Shalamov, 1907 ~ 1982) 별세
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 (Varlam Tikhonovich Shalamov, 러: Варлам Тихонович Шаламов, 1907년 7월 25일 ~ 1982년 8월 12일)는 러시아의 작가, 언론인, 시인이고, 굴라그 생존자였다.
– 바를람 샬라모프 (Varlam Tikhonovich Shalamov)
.출생: 1907년 6월 18일 / 신력 7월 1일, 러시아 볼로그다
.사망: 1982년 1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Tushino
.묘지: 러시아 모스크바 쿤세 보 묘지
.학력: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배우자: Olga Nekliudova (1956 ~ 1966년), Galina Ignatievna Gudz (1934 ~ 1954년)
.자녀: 옐레나 샬라모바
볼로그다에서 정교회 신자 변호사이자 선생이었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소비에트 법학을 공부했다.
1961년에 첫 시집 『부싯돌』을, 1964년에 시집 『나뭇잎 소리』를 출간했다. 1966년 둘째 부인 네크류도바와 이혼했다. 1967년 시집 『길과 운명』을 출간했고 이후 소련 작가동맹에 가입했다. 1977년 시집 『비등점』이 출간되었으며 출생 70주년에 명예훈장에 추서됐으나 수령을 거부했다.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시력과 청력을 잃기 시작하고, 운동 조정 상실을 동반한 마니에르 질병 발작이 잦아졌다. 1981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82년에는 정신병 환자 요양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크루프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 생애 및 활동
1907년 6월 18일 볼로그다 시에서 사제인 아버지 티혼 니콜라예비치 샬라모프와 교사인 어머니 나데즈다 알렉산드로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볼로그다 시 성(聖)알렉산드르 중학교에 입학하고 1923년에는 옛 중학교 건물에 있던 2급 6번 통일노동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 볼로그다를 떠나 모스크바 주 쿤체보 시 피혁공장에 무두장이로 들어갔다.
1926년 공장 파견으로 모스크바 섬유대학 입학과 동시에 공개시험을 통해 모스크바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1927년 ‘스탈린 타도!’, ‘레닌의 유언을 수행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10월혁명 10주년 기념일에 데모에 가담했다.
1928년 『신(新)레프』 잡지에서 만든 문학 서클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29년 2월 19일 이른바 「레닌의 유언」을 인쇄하려고 나간 지하 인쇄소에서 잠복 중인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 위험분자로 3년 형을 받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호송수인단과 함께 북 우랄에 있는 비셰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 수용소에서 첫 아내 갈리나 이그나티예브나 굿지와 만났다.
1931년 10월 교정노동수용소에서 석방, 복권되었다.
이후 1934년 굿지와 결혼했다.
1936년 첫 단편 「아우스티노 의사의 세 죽음」을 『10월』 잡지 첫 호에 발표하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37년 1월 13일 ‘반혁명 트로츠키스트 활동’으로 체포되어 부티르카 감옥에 재수감되고 특별심의에서 교정노동수용소 5년의 중노동형을 받았다.
이후 기나긴 수용소 생활을 지내야 했다. 훗날 ‘콜리마 노트’ 시리즈에 수록된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후 1951년에야 형기를 다 끝마치고 그 후 2년간 달스트로이의 파견으로 바라곤, 큐뷰마, 리류코반 마을 보조 의사로 일했다.
그동안 시를 계속 써서 아는 의사 E. A. 마무차시빌리를 통해 모스크바에 있는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냈으며 이후 두 시인 사이에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1953년 11월 12일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드디어 가족들을 만났으며 같은 해 파스테르나크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문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1954년 첫 작품집 『콜리마 이야기』 집필에 착수했으며 이해 굿지와 이혼하게 된다.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며 네크류도바와 재혼했다.
1961년에 첫 시집 『부싯돌』을, 1964년에 시집 『나뭇잎 소리』를 출간했다.
1966년 둘째 부인 네크류도바와 이혼했다.
1967년 시집 『길과 운명』을 출간했고 이후 소련 작가동맹에 가입했다.
1977년 시집 『비등점』이 출간되었으며 출생 70주년에 명예훈장에 추서됐으나 수령을 거부했다.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시력과 청력을 잃기 시작하고, 운동 조정 상실을 동반한 마니에르 질병 발작이 잦아졌다.
1981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82년에는 정신병 환자 요양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크루프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 바를람 샬라모프,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콜리마 이야기
작가들은 대개 이런저런 자전적인 경험을 토대로 거기에 상상력을 발휘한 허구를 덧붙여 소설을 쓰곤한다. 개중엔 오직 자전적인 체험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소설화한 작가도 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열정》을 쓴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 같은 작가. 아니 에르노는 다큐 소설의 전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유부남 외교관과의 불륜의 사랑,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작품들 일체를 온전히 자신의 실제 삶의 체험을 재료로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기록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간에 보통 경험을 뛰어넘는, 아주 예외적인 경험을 하고 그것을 글쓰기로 기록한 작가들이 있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형수였다. 청년 시절 짜르 황제에 대해 날을 세우다가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베리아 유형생활에서 살아남은 후에 그 경험을 보고한 《죽음의 집의 기록》이란 소설을 썼다. 그 소설엔 도스토예프스키가 겪었던 시베리아 유형생활의 죽음과도 같은 생활이 너무나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러시아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 탓인지 일종의 ‘수용소 문학’ 장르에 속하는 유명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만 하더라도 시베리아 노동수용소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작품이 아니던가?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겪은 참상을 기록한 책들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형생활을 고발하고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를 필두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의 《밤》 등 나치즘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위대한 시인 파울 첼란은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긴 했지만, 결국 그 고통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수용소 문학의 최고 정점, 그리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경험의 끝판왕은 따로 있다. 바로 《콜리마 이야기》를 쓴 바를람 샬라모프다.
그는 솔제니친을 포함해 그 이전까지 나왔던 모든 수용소 문학이 고개 숙이고 절을 해야 할 작가라고 인정받는데, 오늘날엔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위상을 가진 문학작품이지만,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지난 2015년에야 처음으로 완역되어 소개되었다.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한국에는 너무 늦게서야 도착한 셈이다.
콜리마는 스탈린 시대, 혹한이 지배하는 북동 시베리아 지역, 정확하게는 북극권에 더 가까운 러시아 극동지역에 있던 구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이름이다. 그곳은 1년 중 9개월이 혹한의 겨울이다. 한 겨울엔 기온이 영하 60~70도까지 떨어진다! 스탈린 시대 소련 곳곳에 있던 강제노동수용소 가운데 최악이라고 할 장소. 매년 수감자의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이 숨져 적게 잡아도 총 3백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은 걸로 알려진 끔찍한 수용소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되고, 보아서도 안 되며, 보았다면 죽는 것이 나은, 그런 일이 아주 많다”
있던 강제노동수용소 가운데 최악이라고 할 장소. 매년 수감자의 3분의 1 또는 그 이상이 숨져 적게 잡아도 총 3백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은 걸로 알려진 끔찍한 수용소다.
샬라모프는 겨우 스물두살 때이던 1929년, 모스크바 법대생이던 시절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라는 곳에서 3년간 강제 중노동을 하는 형을 선고받았다. 체포된 이유는 그가 ‘레닌의 유언을 수행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0월 혁명 10주년에 맞추어 데모를 했고, 〈레닌의 유언〉을 인쇄하여 배포하려 한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제대로 실천하자고 한 사람을 혁명정권이 체포한 것이었다. 그는 1937년에 트로츠키파로 몰려 다시 체포된 후 그 지독한 ‘콜리마 수용소’에 갇힌 채 무려 17년이란 세월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곳 생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처참한지, 샬라모프는 그곳을 “화덕이 없는 아우슈비츠”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는 그 책에서 “죽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때가 있다”라고 썼다. 죽고 싶어도 죽을 힘조차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인간 상태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는 또 “거기에는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되고, 보아서도 안 되며, 보았다면 죽는 것이 나은, 그런 일이 아주 많다”고 쓰고 있다. 사실, 샬라모프가 콜리마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샬라모프는 오랜 기간 겪은 육체적 고통의 후유증 때문인지 말년에는 시력과 청력을 잃고 운동조정 능력 상실을 동반하는 발작, 뇌졸중 같은 동시다발적인 질병의 고통을 겪은 끝에 1982년, 정신병 환자 요양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화산 아래서》를 쓴 맬컴 라우리는 허먼 멜빌의 항해 소설을 동경하여 직접 배를 타는 선원생활을 하고 그 경험을 소설로 썼지만, 그런 맬컴 라우리조차 샬라모프가 겪은 최악의 고통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대한 걸작 문학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 솔제니친, 도스토예프스키가 겪었던 종류의 고통도 결코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다. 작가들이란, 작품에 대한 헌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겪고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도 인간적 한계는 있는 법이다. 작품을 위해 ‘취재’ 차원에서 이런저런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기자스러운 취재와 실제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 내는 것 사이엔 비교하기 어려운 커다란 차이가 있을 터이다.
물론 샬라모프나 프리모 레비가 겪었던 것과 같은 극한의 참혹함을 겪어야만 걸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프루스트나 헨리 밀러, 아니 에르노, 찰스 부코스키, 잭 케루악이 겪었던 것과 같은 체험들은 불가피하게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한 생의 길에서 경험한,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체험들이었고, 그들은 바로 거기서 자신의 탁월한 예술을 빚어 낸 것이었다.
나 또한 살아 오면서 이런저런 고통과 쾌락의 경험들을 겪었지만, 그들처럼 걸작을 써 내지 못했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무능력 탓일 뿐이다. 혹은 나의 문학 취향 탓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식으로 완전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기 때문이다. 실은 아주 사소한 일상의 경험만으로도 얼마든지 걸작을 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 건 역시 무능을 탓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을 갖는다는 건 작가 입장에서 남다른 아주 특별한 소재를 얻고, 또 그런 경험을 통해 생에 대한 깊은 인식을 얻게 된다는 점에선 행운이랄 수 있다. 또 독자 입장에서도 삶의 다양성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삶과 세계의 이면을 간접 체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별난 체험을 한 작가와 작품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내려가다 보니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세상엔 여전히 너무 많은 고통과 절망, 슬픔이 있다는 것, 인간의 고뇌와 고통, 상처와 불행은 끝날 줄을 모른다는 것, 쇼펜하우어 말처럼 이 지구가 금이 가서 부서져서 가루가 되는 그 순간까지 인간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이 내 마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류가 일구어 온 많은 문학이 ‘고통과 슬픔의 박물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_ 글 김운하
- ‘콜리마 이야기’ 중에서
<설원을 걸으며>
발자국을 따라가는 사람은 남의 발자국이 아니라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의 일부를 밟아야 한다.
<외상으로>
“너 나와.” 나우모프가 손가락으로 가르쿠노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르쿠노프는 솜 점퍼를 벗었다. 얼굴이 하얘젔다. 더러운 속셔츠 안에 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아내가 준 마지막 차입품이었다.
<두 목수>
포타니시코프는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밀한 열망, 마지막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어딘가 병원에서, 침대에서, 이부자리 위에서, 형식적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단독작업>
이튿날 그는 다시 작업반에서 바라노프와 같이 일했고, 그 다음날 마구간 뒤로 끌려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어느 곳으로 갔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았을 때 두가예프는 이 마지막인 오늘 엇일하고 헛고생한 걸 후회했다.
<비>
배고프고 적의에 찬 나는 세상에 그 무엇도 내 목숨을 스스로 끊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그때 나는 생의 위대한 본능-인간이 최고로 부여받은 바로 그 자질의 본질을 알았다. 나는 우리의 말이 힘이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쉬운 일>
누운잣ㅅ나무는 때때로 자신도 착각할 정도로 너무 정확하고 과민한 도구다. 그는 시간을 질질 끄는 행빙기에 일어난다. 그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처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눈 속으로 도로 눕는다. “너는 잠시 누운잣나무 침엽을 따라 갈꺼야.” “며칠간 칸트를 줄 거야.”
○ 작품
1954년 『콜리마 이야기』
1961년 시집 『부싯돌』
1964년 시집 『나뭇잎 소리』
1967년 시집 『길과 운명』
1977년 시집 『비등점』
Kolyma Tales
Graphite
Vospominaniia (memoirs)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